# 5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52화
어쨌든 오늘 만찬도 만족스러웠다. 비싸지만 어쩐지 기분을 상하게 했던 드래곤아이도 식탁에 올라오지 않았고, 에드가도 오늘 오후에 찔리는 일이 있어서 그런지 시비를 걸지 않았다. 루비카는 식사를 하는 내내 흘낏흘낏 에드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에드가는 식사에 집중하는 척하며 루비카의 그런 시선을 즐겼다.
‘결국 당신도 내게 끌리게 될 거야.’
다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할 때 에드가는 대체로 소름이 돋았고 끔찍했다. 하지만 루비카는 달랐다. 루비카가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는 게 내심 기뻤다. 그는 가끔 거울을 보며 저주할 정도로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싫어했다. 하지만 루비카가 자신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을 때면 그는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제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왜? 대체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왜 루비카가 자신을 그리 홀린 듯 바라보면 기분이 좋고, 심지어 요즘은 그녀가 자신을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에드가는 곧 그 해답을 찾았다.
그는 쭉 루비카에게 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무시했을 소리도 그녀가 하면 가슴에 콕 박혔다. 그녀가 한마디 할 때마다 한심하게도 그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정말이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대체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더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면 이 말도 안 되는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되면 눈치를 보는 건 자신이 아니라 루비카가 되리라.
그리고 에드가는 자신 있었다. 여태 그에게 홀리지 않은 여자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모르겠군.’
그러나 에드가는 여태 유혹을 받는 편이었지 유혹하는 편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여자는 그가 그냥 말만 걸어도 좋아했다. 꺼지라는 뜻을 잔뜩 담은 비아냥거림을 던져도 그랬다. 그러나 루비카는 그가 선의로 말을 걸어도 인상을 쓰거나 짜증을 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늘 오후만 해도 들뜬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옷을 열 벌 주문하자고 말했다가 루비카에게 당장 나가라는 소리나 들었다.
에드가는 일단 말을 하지 않도록 유의했다. 루비카를 유혹하고 싶었으나 방법은 알 수 없었다.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이른바 어떤 행동에 대한 정보는 있었으나 그게 루비카에게 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는 일단 주변에서 평소 극찬하는 대로 무관심하고 냉정하지만 우아한 태도로 식사를 하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루비카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통하는 건가?’
에드가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나이프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고, 오늘 오후만 해도 그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골치 아픈 문제들이 싹 다 잊혔다. 정말 이런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얼마만이던가, 아카데미 졸업 이후 처음이었다. 에드가는 자신이 무척 즐거워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저기, 에드가.”
식사가 끝나고 루비카가 먼저 에드가에게 다가왔을 때 그 기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에드가는 바보처럼 웃지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냉정히 루비카를 바라봤다.
“왜?”
“네 번째 단추가…… 열렸어.”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네 번째 단추가 열려 있었다. 어느 사이에 풀어졌는지는 모른다. 식사시간 내내 루비카가 자신을 흘낏흘낏 쳐다보다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던 것은 그의 외모에 홀려서가 아니라 이 단추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에드가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었다.
“잠깐만.”
식사 시간 내내 그가 움직일 때마다 벌어졌던 단추가 신경 쓰여 집중할 수 없었던 루비카는 말이 나온 김에 손을 뻗어 단추를 잠갔다. 이왕 하는 김에 삐뚤어졌던 소매도 정리했고, 옷깃도 바로 했다. 풀어진 에드가도 멋지긴 했다만 역시 그는 단정한 게 어울렸다. 에드가도 종종 자신의 뺨을 만진다거나 손을 잡아 댔으니 이쯤은 허락받지 않아도 할 수 있을 듯 했다. 내키는 대로 그를 완전히 단장시킨 뒤 뿌듯해진 루비카가 고개를 들었다.
‘어?’
에드가의 귀 끝이 또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루비카는 그의 푸른 눈동자 아래에서 노란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황급히 떨어지니 에드가가 탄식 같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루비카의 볼이 붉어졌다.
“나, 나 먼저 갈게.”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숨이 닿았던 뺨 한쪽이 간지러웠다. 정작 먼저 귀 끝이 붉게 물들인 것은 그였지만……. 루비카는 제 속이 왜 이리 울렁거리지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 먼저 가서 쉬어. 난 천천히 가지.”
당황하는 그녀와 달리 에드가는 제법 여유롭게 답했다. 루비카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느라 보지 못했다. 식탁 아래에 숨긴 에드가의 손가락 끝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어떤 정신으로 침실까지 걸어왔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가까스로 여유를 찾았을 때는 루비카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보드라운 면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운 뒤였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목욕시중을 받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머리카락에서는 그녀가 좋아하는 백합향이 났다. 다만, 오늘은 하녀가 은근히 이상한 권유를 했다.
“마님, 각하 쪽 욕실에 샤워하실 건가요.”
“응? 내 욕실이 있는데 왜?”
“두 분이 함께 씻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망측함에 질겁했다. 루비카는 어떻게 그런 걸 권할 수가 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하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 우린 부부긴 부부지.’
무늬만 부부를 하기로 했는데 이상하게 주변에서 두 사람을 사이좋은 부부로 보는 눈치였다. 실제로 루비카와 에드가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만 감도는 데 어쩜 그리 착각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앞으로도 목욕은 내 욕실에서 할 거야.”
루비카의 대답에 하녀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기대하기에 그러는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대체, 왜? 왜 이런 착각을 주변에서 하는 걸까? 아마도 그건 에드가의 태도와 관련이 있는 듯 했다. ‘키스’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거나 남들 보는 앞에서 자주 손을 잡거나 종종 몸을 끌어당기는 게 아무래도 주변의 착각을 유도하는 듯 했다.
그리고 에드가가 그럴 만한 이유는 오직 하나다. 자신을 ‘골탕’먹이기 위해. 실제로 루비카는 에드가의 돌발 행동에 때때로 얼굴이 새빨개졌고, 에드가는 그런 그녀를 보며 낮은 웃음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놀리는 건 그만두라고 따져야지.’
그러나 그녀의 그런 굳건한 결심은 공작의 방과 연결된 문이 열리고 에드가가 들어오는 순간 깨졌다. 물기에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긴 그의 얼굴에서는 금욕적인 향기가 풍겼다. 그 향기에 취해 루비카는 할 말을 금방 까먹고 말았다. 이 아름다운 얼굴을 계속 볼 수만 있다면 그의 재수 없는 태도도 비교적 참아 줄 만하였다.
하녀를 모두 물리고 에드가는 털썩, 침대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루비카를 바라보았다. 루비카는 온 몸을 다 감싼 잠옷을 입고 있는데도 에드가는 이상하게 몸이 근질거렸다. 방금 식사 중에 그녀가 그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며 차림새를 정돈해 줬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 오후에 본 드레스 디자인 때문일까? 온몸이 다 비칠 것 같은 천으로 된 드레스를 입은 루비카의 모습을 상상하자 심장이 또 쿵쾅쿵쾅 뛰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아카데미의 학자에게 의뢰한 연구가 빨리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특수한 상황에 처하지 않고도 이렇게 심장이 뛸 수 있나? 어쩌면 저주보다 더 급한 죽을병에 걸린 건지도 모른다.
“루비카.”
“응?”
그가 이름을 부르자 루비카가 대답했다. 어두운 촛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한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어쩐지 요즘 에드가는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루비카.”
그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르더니 갑자기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나 루비카의 바로 가까이에 있는 콘솔 의자에 앉았다.
“갑자기 왜!”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루비카가 소리 질렀다. 너무 가깝다. 마음의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가까이에 앉는 법이 어디 있나. 게다가 에드가의 머릿결에서는 아직 물이 떨어지고 있었고 그는 촉촉이 젖은 상태였다. 지나친 자극이었다. 이 음란한 자식이 자신에게 뭘 하려는지 화가 버럭 났다.
“이야기를 좀 하려는 것뿐인데 왜 이래.”
그가 억양 없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간신히 루비카가 진정했다.
“너무 가깝잖아.”
에드가가 어이가 없어 웃었다. 한편으로 그녀가 자신을 의식한다 싶어서 나쁘지 않았다. 그는 순순히 의자를 한걸음 뒤로 밀었다. 그리고 그녀를 관찰했다. 루비카는 차가운 손으로 발그레해진 뺨을 진정시키는 중이었다.
“루비카…….”
“왜?”
“뺨이 붉어.”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쓰였는데 에드가가 지적하자 얼굴에 더욱 피가 몰렸다. 에드가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얼굴이 불타는 거 같네.”
“그만 놀려!”
루비카는 시계를 힐끗 봤다. 야속하게도 아직 12시가 되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루비카는 마음먹은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당신 날 놀리는 건 이제 좀 그만뒀으면 좋겠어. 툭하면 키스를 해 달라거나 사람들 앞에서 손을 잡거나 끌어당기는 거. 그런 거 제발.”
“왜.”
방금까지 있었던 웃음기가 싹 사라진 목소리로 에드가가 반문했다.
“왜 하면 안 되지?”
“곤, 곤란해. 사람들이 오해한단 말이야.”
“루비카, 너랑 나랑은 부부야. 서로 미혼인 남녀가 아니야. 사람들이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하는 건 나쁜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루비카는 눈을 가늘게 떠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를 보았다. 또 조건반사처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퇴폐적인 냄새를 풍기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에 금욕적인 푸른 눈이라니. 게다가 지금 일부러 그런 건지 타고난 건지 무척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조합은 너무 지나치다. 이건 사기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자신을 또 홀린 듯이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의 그런 시선이 좋았다. 묘하게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좀 자존심 상하지만 그녀는 저택에서 그 이외의 존재들에게도 종종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모두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물건이었다. 에드가는 곧 논리적으로 당연한 추론에 도달했다.
“당신 예쁜 걸 밝히나?”
“뭐? 뭐?”
루비카는 침대에서 펄쩍 튀어 오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여태 삶을 살면서 그녀가 아름다운 걸 지독히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루비카는 사실 나이에 비해서 철이 없는 과였다. 하지만 그녀는 차분히 행동할 줄 알았고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 곧잘 속았다. 그런 그녀의 본모습을 에드가가 꿰뚫었다. 난데없이 정곡이 찔린 루비카가 허둥거리자 에드가는 제법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그런 반응은 동의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닌가?”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