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그걸 보내 놓지 않으면 지금 내가 말했던 계획은 조금 빗나가게 된다.
그는 심란하겠지만 사실 보내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감히 황녀가 증언을 했는데 거기다 대고 증거까지 내놓으라며 연애편지를 증거물로 뺏어 갈 자가 있으려고. 게다가 설령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더라도 목욕하면서 읽다가 물에 빠뜨려서 잉크가 다 녹아 버렸다고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아르의 등에 얼굴을 부비며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자, 이제 넌 어떻게 할 거냐?’
곧 그가 말을 멈추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뒤로 허리를 틀어 나를 쳐다보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그렇게만 보냈습니까?”
따뜻한 숨이 훅 들어왔다.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그건 내가 보낸 편지가 궁금하다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가 항상 내게 보이던 슬픈 눈빛이었다.
“그게 그대가 왜 궁금한데?”
“즐거워 보여서요.”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왜 내 계획 물어봐 놓고 점점 남의 연애사에 관심을 보여?”
“전하의 연애사에 관심 없습니다. 그냥…… 전하를 걱정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하셨습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도 순간 멍해서 아무 말이나 흘러나왔다.
“누, 누가?”
“그런 편지를 받는 사람이요. 갑자기 그런 부탁을 하고 답장이 오랫동안 없으면, 그리고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으면…… 걱정할 거라고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대가 봐서 걱정했었거든 얼굴 한번 비추지도 않으면서 약혼자 노릇은 다 하려고 하지 말라고 전해. 권력의 이해관계가 우리 사이의 전부였어. 편지를 주고받은 목적 역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정말 그게 답니까? 제가 일 년 정도 쉬었다가 황궁에 돌아온 이후로 전하께서는 가끔 아무 이유 없이 즐거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공작령에서 편지가 오는 날이면 그러더군요. 작년 즈음, 제게 편지를 직접 전달하고 답장까지 받아 오라고 할 때 알았습니다.”
어차피 들킬 거짓말을 끝까지 이어나가는 그의 모습을 쳐다보면서 나는 목구멍이 간질거려 견디기 힘들었다.
“그게 다냐 묻는 의도가 뭐야? 황실의 정략혼에 무슨 세기의 로맨스 같은 게 있을 것 같으냐? 다른 귀족들 전부 마지못해서 하는 정략혼이 황족이라고 다를 것 같아? 아니면 할바마마가 이어 준 로이드랑 파투 내면서까지 내가 직접 골랐으니까 뭐라도 있을 것 같은 건가? 그리고 설령 내가 즐겁다고 해도 그게 그대가 궁금해해도 될 일이라고 생각하나?”
“그럼 마지못해서 하시는 겁니까? 애써 즐거운 척하면서. 그래서 상대방은 편지를 받고 걱정할지도 모른다는 건 안중에도 없으셨던 거였습니까?”
“점점 주제 넘는다!”
잠시 나를 쳐다보던 그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몸을 다시 앞으로 돌려 말을 몰았다.
갈 곳 잃은 손이 그의 옷자락 뒤를 꼼지락꼼지락 잡았다. 그도 꽉 잡으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은 달리지 않고 걸었다.
***
제론 자작령에 도착한 건 자작의 암살이 예고된 바로 전날 밤이었다. 약간 아슬아슬한 느낌이 있었지만 당일 날 도착한 것보다는 나았다.
나야 지치는 것 정도는 크게 상관없지만, 내 경호에 바짝 긴장을 해야 하는 아르가 하루를 더 쉴 수 있게 된 건 다행이었다.
아직은 조금 화가 났던 탓도 있고 강행군에 지친 까닭도 있어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자작령에 도착하자마자 뻗어 버렸다. 내가 갑자기 방문한 탓에 자작은 꽤 놀랐고, 내가 온 이유를 듣고 나서는 더 놀라 자빠질 뻔했다.
그리고 당일 밤, 나는 챙겨 온 미니드레스를 입고 굽 낮은 구두를 갖춰 신고는 자작성의 가장 화려한 식당에서 사람들 보란 듯이 제론 자작 부부와 저녁 식사를 했다.
그렇게 예고된 밤이 찾아왔다.
나는 자작 부인과 그녀의 방에서 잠이 잘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부인은 잔뜩 긴장하고 불안했는지 어젯밤 잠을 설쳤다고 하더니 낮에 기절하듯 잠든 바람에 지금은 더욱 잠이 오지 않은 채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나도 걱정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 정도로 불안하지는 않았다. 자작 부인의 옆방에서는 제론 자작이 자는 척을 하고 있었고, 섀도 나이트들이 그 주변에 은신해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방 안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경호 인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자정이 되었을 즈음, 자작의 방에서 희미하게 부산한 소리가 넘어왔다.
우리 옆에서 찻물을 데우며 시중을 들던 하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마님. 주인 나으리 침소가 시끌시끌한 것 같은데요.”
“전하, 잠시 옆방을 좀 보고 오겠습니다.”
자작 부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어나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꺄아아아악!”
가장 먼저 비명을 지른 건 하녀였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자마자 그 자리에서 그대로 혼절했고 자작 부인은 딱딱하게 굳어서는 문고리를 붙잡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그 자세 그대로 엉덩이를 바닥에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났다.
“흐읍!”
그녀는 두 손을 입 앞으로 모은 채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아악! 으아아악! 경비병! 경비벼어어어엉!”
그런 그녀의 목소리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나는 황급히 곁으로 달려가 방 안을 의식적으로 쳐다보지 않은 채 자작 부인 앞에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았다.
“정신 차리세요!”
나는 제론 자작 부인의 눈을 가리듯이 얼굴을 끌어당겨 감싸 안았다.
“제론 자작 부인!”
“으악!”
등 뒤, 열린 문 너머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섬뜩한 비명에 솜털까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전하!”
그와 동시에 아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뒤를 돌아보려다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윽!”
“보지 마십시오.”
쉬익-
바람 가르는 소리 뒤로 무언가 둔탁하게 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바닥에 무언가 질질 끄는 소리와 함께 곧 방문이 닫혔다.
탁!
“끝났습니다. 그래도 아직 눈 감으십시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드러운 손이 내 어깨를 돌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내 양 볼을 잡고 들었다.
“눈 뜨고 저 보십시오, 전하.”
떨리는 눈을 뜨자 시야 가득 아르의 얼굴이 들어왔다. 다른 건 일부러 보여 주지 않으려는 듯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있었다.
“지금 제 등 뒤에 시체가 하나 있습니다.”
“흐읍!”
반사적으로 얼굴과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아르가 내 볼을 쥔 두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저자가 전하를 공격하려 해서 제가 처리했다고 진술하십시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도 아시겠습니까?”
곧 자작 부인도 고개를 끄덕인 모양인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내 자작성의 경비병들이 달려 들어왔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건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
“그럼 그곳엔 왜 가셨습니까?”
사건 조사관이 내 황궁에 찾아온 건 내가 황궁으로 돌아온 다음 날이었다. 충격에 앓아누웠다고 둘러댔어도 서두를 건 서둘러야 했다. 태후가 증거 인멸을 시도하거나 누군가에게 누명을 씌울 준비를 하기 전에 터뜨려야 했으니까.
고모님께서 내 계획에 따라 착실히 준비했다고는 했으나 사건 조사관은 황후의 입김이 닿은 모양인지 질문이 영 시원치 않았다.
“내가 그곳에 왜 갔는지가 이 사건에 필요한 질문인가?”
“그날 굳이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 약혼자가 제국 일주를 하던 중에 제론 자작령의 등산로에서 뱀에 물렸다고 해서 공작령에 들렀다 자작령으로 갔네. 급하게 가는 바람에 호텔을 예약하지 못해 자작의 배려로 자작성에 머물렀던 것이고.”
“아……. 알겠습니다.”
그는 양피지에 펜을 끄적여 내 진술을 받아 적고는 또 다른 질문을 했다.
“호위는 평소 전하를 모시던 호위 기사단의 기사들이 아니던데 그림자 호위입니까? 그런데 무슨 그림자 호위를 그렇게 많이 데려가셨습니까?”
“그대는 지금 나를 심문하려는 건가? 내가 용의자인 건지 아닌지 확실히 말해.”
나는 내 말을 그대로 받아 적으려는 조사관의 조사서 위에 손을 얹어 종이를 덮어 버렸다. 갈 곳 잃은 그의 펜대가 허공을 휘적거렸다.
“그, 그야…… 전하께서는 목격자이십니다.”
“아니지, 나는 피해자지. 암살자가 나도 죽이려고 했는데. 그대는 조사가 끝나면 이 종이에 내 서명을 받아 가야 하지 않은가? 이대로 시간을 끌어도 상관은 없네.”
조사관으로 온 백작은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시간을 끄시면 전하께도 별로 좋지 않으십니다. 황제 폐하께서 일부러 서두르고 계신 것 같은데…….”
“나도 알아. 그래서 시간을 끌 생각은 없어. 그러니 그대를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고 조사관을 교체하면 돼. 한 번만 더 엉뚱한 질문을 하고 나를 용의자 취급하며 알리바이를 캐물으면 나는 그대가 나를 희롱하거나 모욕했다고 주장하며 조사관을 교체해 달라고 할 수도 있어. 그것 말고도 방법은 많아.”
내 협박에 백작이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 졌다.
“지금 절 협박하십니까?”
“어. 협박하는 거다. 내가 어려운 걸 요구하는 게 아니야. 거짓 진술서를 쓰도록 도우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피해자로서 진술할 수 있도록 정당한 질문을 하라는 거야.
태후가 그대의 뒤를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의 권력을 나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아 둬. 이번 사건, 피차 좋게 끝나고 싶으면 순순히 정상적인 질문을 하고 내게서 시원하게 서명을 받아 내는 게 이로울 것이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덮었던 손을 떼었다. 그러고는 백작이 아까 그랬던 것처럼 등받이에 의자를 기대었다.
“뭐 하나? 질문 시작해. 질문까지 내가 정해 줘야 할까?”
“아닙니다…….”
백작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번 사건에서 그가 내 진술을 받아 가도록 한 데에는 키옌 태후의 입김이 닿은 것이 사실이지만, 조사관이야 그럴듯한 사유만 있으면 황제가 언제고 교체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가 나를 모욕했다고 주장한다면 백작과 나 사이에는 이런저런 공방이 오가게 될 거다. 그는 자신의 무고를 주장할 것이고, 나는 내 주장을 증명할 수 없을 거다. 그렇다면 나도 꽤 골치가 아프겠지만, 어쨌든 당장 조사관을 내 입맛에 맞게 교체하는 건 가능하다.
잘하면 태후를 완전히 꺾어 버릴 수 있는데 고작 백작 한 놈과의 공방이 무서워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곧 나는 내 입맛에 그럭저럭 맞는 목격자 겸 피해자 진술서를 확인하고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