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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39화 (139/148)

139화

나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문에 기대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하!”

시녀들이 서둘러 나를 부축했고 호위 기사들이 움찔하며 달려오려다가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대로 멈추었다.

“괜찮아.”

나는 벨과 제니의 부축을 받아 소파에 앉은 다음 차분하게 그녀들과 호위 기사들을 훑었다.

“내가 급하게 할 일이 있어서 지금 당장 어딘가로 가야겠다. 마차는 필요 없어. 그대들에게 이유는 말해 줄 수 없지만 다녀와서 자세히 말해 줄 것이다. 함께할 호위로는 내 예동을 데려갈 것이니 제니는 지금 바로 아르에게 장거리 여행 채비를 하도록 해서 조용히 불러와.”

“예, 전하.”

제니가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가고 나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이따가 로엔을 데려와. 로엔을 나 대신 내 방에서 하루 재운 다음 내일 내 마차에 태워서 크로이젠 공작령 방향으로 출발시켜. 유모와 잔느가 로엔과 함께 가주었으면 해. 호위로는 페일을 붙여.”

나와 같은 금발에 붉은 눈동자를 한 로엔은 머리카락에 구불구불하게 웨이브를 넣고 챙이 넓은 모자를 씌운 다음 내 드레스를 입혀 놓으면 멀리서 보아선 나와 구분하기 힘들었다. 내가 가끔 은밀하게 외출하고 알리바이를 만들 때 자주 써먹는 방법이었다.

그녀의 동생인 밀렌은 걸렸다간 제 누나가 황족 사칭한 죄로 목이 달아날 거라며 기겁을 했다. 그래도 정작 당사자인 로엔이 재미있어하고 나 또한 그녀가 걸렸을 때 나 몰라라 할 생각이 없으니 밀렌의 목소리는 늘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지금 바로 크로이젠 공작가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서 엘비어스 님께 ‘알테어 폰 크로이젠이 크게 다쳤다는 엘비어스 님의 개인 편지를 써서 내 궁에 오늘 밤 내로 보내 달라.’고 말해. 이유를 묻거든 ‘누굴 좀 구하러 간다.’고 해. 아르 데려가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꼭 해주고. 그럼 알아들으실 거야.”

그러자 잔느가 눈치 빠르게 답했다.

“로엔에게 그 편지를 읽도록 하고, 놀란 연기를 시키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리고 자고 일어나 아침에 공작령으로 바로 출발해 알리바이를 만들라는 거고요?”

“맞아. 공작령까지 이틀 내에 도착할 수 있도록 무리해서라도 빨리 갔으면 해. 그리고 공작령에서 일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지내. 공작성에 들어가는 것까지만 보여 주고 공작성 안에서는 내가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자취를 감춰 줬으면 좋겠어.”

잔느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일단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가 승마 수업을 할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여행 가방에는 물과 비상식량, 그리고 가벼운 미니드레스 한 벌과 구두 한 켤레를 넣었다. 몹시 단출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나니 제니가 아르와 함께 내 방으로 돌아왔다. 시녀들과 호위들이 제각기 평상시처럼 행동하려 노력했고 그러는 사이에 나는 아르를 데리고 비밀 통로를 통해 황궁 밖으로 향했다.

곧 야외로 나온 우리는 밀렌을 시켜 준비해 둔 말에 올라탔다. 밀렌을 비롯한 몇몇 섀도 나이트들은 내가 탈 말을 준비해 놓고는 작전 지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보다 조금 더 먼저 출발했다.

“말이 한 마리군요. 2인용 안장이고요.”

“최대한 빨리 가야 해. 그러려면 내가 직접 말을 모는 것보다 경이 나를 태우고 함께 가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내가 말 위에 올라타려고 바둥대는 것을 아르가 능숙하게 도왔다. 그러고는 자신도 말에 훌쩍 올라탔다.

“어디로 갑니까?”

“몰딘으로 제론 자작을 구하러 간다.”

내가 그의 허리를 뒤에서 슬그머니 잡자 그가 슬쩍 뒤로 고개를 돌렸다.

“빨리 달리라면서요. 꽉 잡으십시오. 떨어집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말머리를 북쪽으로 잡았다. 말이 흔들리자 나는 본능적으로 아르의 허리를 꽉 조이듯 감싸 안았다.

그 순간 갑자기 말이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고 순간적으로 몸이 뒤로 휘청였다. 나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있는 힘껏 매달렸다. 오른쪽 볼과 귀를 그의 등에 바짝 누르듯 끌어당겼다.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속도감이었다. 바람이 전신을 훑으며 뒤로 쓸려 지나갔다.

“그런데 전하! ……습니까?”

“뭐라고? 안 들려! 바람 때문에 안 들려!”

***

같은 시각, 엘비어스는 황녀의 전언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를 데리고 누굴 구하러 급하게 간다니 대강 알 것 같았다. 언젠가 터질 일이 터졌다.

“그래서 자작 대신 바칠 희생양이 대체 누군데?”

“이런, 찝찝하신 모양이네요. 안심하십시오. 안전할 겁니다. 그게 누구냐면 아르입니다.”

그때 아멜리아 황녀는 단칼에 그 계획을 거절했다.

“보내지 않아.”

“보내십시오. 가장 적절합니다. 그 녀석은 태후가 보낸 암살자로부터 자신과 자작을 충분히 지켜 낼 수 있는 능력도 있고, 그는 전하의 검술 예동이라는 지위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가 위험했다면 아무리 키옌 태후라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정도로 파장이 클 겁니다. 전하의 예동이니 전하께서 직접 사건에 관여할 명분도 좋습니다.”

‘결국엔 직접 가시는 거군.’ 그녀가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대강 예상은 했다.

만약 그녀가 직접 움직이지 않고 자신이 이야기했던 계획대로 아르를 보낸다면 섀도 나이트를 딸려 보낼 수 없다. 암살자를 상대하고 난 이후에 그 섀도 나이트들의 정체를 해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르 혼자 그걸 해결해 내야 한다.

그러나 그녀가 직접 가면 섀도 나이트 몇몇이 더 동행하게 될 거다. 황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섀도 나이트들이 억지로 따라붙을 테니까. 그러니 결과적으로 훨씬 더 안전할 거다. 태후가 보낸 암살자를 그들이 우르르 상대해도 황녀의 그림자 호위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황녀가 거기 있었던 이유는? 그건 어떻게 설명하려고?

‘부디 무사하길…….’

***

한참을 달려 말이 지쳤을 즈음, 우리는 성곽도 따로 없는 작은 도시에 들렀다. 그곳에서 지친 말을 맡겨 놓고 새로운 말을 구했고 허기를 달랬다.

“자작이 들켰습니까?”

“아니, 숙부가 그를 너무 의지해서 제 입맛대로 굴리기 어려웠던 모양이야. 고모님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닷새 후에 암살자가 제론 자작을 죽이러 갈 거야.”

“…….”

“왜?”

“그거 원래 저 혼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엘비어스가 그러더냐?”

그는 대답 없이 호밀빵을 손으로 찢어 입에 넣고 씹었다. 나는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호밀빵을 빼앗았다.

“위험해. 나는 엘비어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이미 내 뜻을 명확히 전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다.”

“고작 자작 하나 죽이려고 그리 엄청난 암살자를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암살이란 건 정체를 들키는 순간 이미 불리해져서 처음부터 제가 유리한…….”

나는 빼앗았던 호밀빵을 그의 입에 냅다 쑤셔 넣었다.

“웁!”

“시끄럽구나. 내가 괜찮지 않다고 말했다. 잔소리가 많은 걸 보니 배가 부른 모양이구나. 가자.”

나는 음식 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벌떡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갔다. 아르가 제 짐과 내 짐을 양쪽 어깨에 걸쳐 메고는 서둘러 내 뒤를 따라 나왔다. 내가 먼저 말 위에 올라타고 아르가 따라서 말에 올라왔다.

마을 밖을 벗어나 북쪽을 향해 적당한 속도로 달리면서 그가 물었다.

“대체 어쩌시려는 겁니까?”

“자작과 경을 안전하게 지킬 거야. 그러려면 그대 혼자 보낼 수는 없다. 물론 내가 직접 가지 않아도 섀도 나이트를 보내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나중에 그대가 곤란해져. 사건 조사 과정에서 그대의 아군이 되어 줬던 섀도 나이트에 대해서 해명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저 혼자 가도 된다는 겁니다.”

“그건 내가 불안하니 기각했다.”

“그럼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신 건 어떻게 해명하실 겁니까?”

“아, 그거? 내가 알테어한테 도와달라고 편지 보냈는데?”

나는 쓰지도 않은 편지를 있다고 말하며 아르의 반응을 살폈다. 끌어안고 있던 그의 등이 움찔거렸다.

“뭘 도와달라고 했다는 겁니까?”

“엘비어스가 지금쯤 황궁으로 편지를 하나 보냈을 거야. 알테어 크로이젠이 여행 중에 다쳤다고. 알테어에게는 5일 전 날짜로 자기가 지금 제론 자작 영지에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달라고 했어. 제론 자작 영지가 삼림욕으로 그럭저럭 이름 있는 관광지이기도 하니 혼자 한가하게 삼림욕을 즐기다 뱀에 물렸다고 해도 딱히 이상하진 않겠지.”

“대체 그럴 틈이 있기는 했습니까?”

“그대가 내 방에 도착하기 직전에 급하게 써서 보냈지. 어쨌든 내 계획은 이래. 밀렌이 몰딘에서 자작을 만나서 자작령으로 안전하게 데려다 놓을 거야. 우린 자작령에서 자작과 함께 함정을 파놓고 태후의 암살자를 기다리면 되고! 완벽하지?”

그의 심란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떠들었다.

“이게 태후의 짓이라는 증거는 지금쯤 고모님께서 황궁에 남은 섀도 나이트들과 함께 수집하고 계실 거고, 태후는 고작 자작 하나쯤이라며 방심하고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잘 모이고 있을 거야. 그게 아니라도 뒤집어씌울 구실은 만들겠다고 하셨어.”

나는 아르의 등에 얼굴을 묻고는 키득거리며 이어 말했다.

“그럼 내가 얽힌 이상 냉궁은 무조건 처박히게 되겠지. 그대 혼자 보냈다면 태후는 냉궁이 아니라 자기 궁에서 재판이 열릴 때까지 근신처분만 받았을 거야.”

“계획은…… 완벽하군요.”

아마 지금쯤 머릿속이 복잡할 거다. 계획이 완벽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알테어가 계획대로 편지를 보내주었을 때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너는 내가 방금 요구한 답장을 여기서 어떻게 황궁으로 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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