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87화 (87/148)

87화

봄이 되었다. 할바마마의 병환이 깊어져 할바마마의 상태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따금 정신이 돌아오시기는 하셨지만, 결코 외부의 문병을 받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 할바마마의 병환 때문에 연말 즈음에 있던 내 생일은 작은 티 파티 규모로 넘어갔고 심지어 신년회마저 대폭 축소했다. 나와 리엘라의 데뷔 역시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날이 슬슬 풀리기 시작되며 몰딘 지방에 야만족이 한차례 쳐들어왔고, 볼테르 숙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몰딘 지방으로 떠났다. 아마 여름에 다시 돌아올 것 같다.

“여름에는 왜 다시 돌아온다는 거야?”

솔직히 짜증이 났다. 아예 내쫓아 버릴 생각이었는데 아주 끈질기게 부모 밑에서 백수 생활을 영위하려는 숙부의 꼬락서니가 눈꼴시었다.

내 투덜거림에 잔느는 지극히 형식적인 답을 내놓았다.

“황자가 출궁을 하려면 황자비를 맞이한 다음에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 돌아오긴 해야겠지요.”

“그게 황실의 법도는 아니잖아.”

“명문화(明文化)된 법은 아니라도 관습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고모님은?”

“예전 에오넬 황태녀 전하의 경우는 특별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외 사항이었어요.”

이런 일을 예상은 했지만 입안이 썼다. 그래도 몰딘 지방을 엉겁결에 떠넘겨 버린 게 어디겠나. 그걸로 위안 삼아야겠다.

잔느와 대화하는 사이에 시녀들이 해주던 머리 손질이 끝났다. 단단하게 말아서 올린 머리였다.

“이 정도면 풀리지 않겠죠?”

벨이 생글생글 웃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활동하기 편한 바지와 셔츠 차림이었다.

내가 오늘 왜 이런 차림이냐 하면, 드디어 대망의 검술 수업 첫날이기 때문이다.

서편의 홀을 연무장으로 개조하는 것이 겨울 안에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기 때문에 이제야 검술 수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들뜬 마음 때문에 서두르다 보니 이른 시각에 도착했다. 시녀들과 호위기사들을 밖에 두고 안으로 들어서고 문이 닫혔다.

출입문은 하나였고 천장은 높았으며 창문은 그런 천장 가까이에 붙어 있어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내가 배울(아르에게 배우게 할) 검술은 워낙 보안이 철저해야 하다 보니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연무장 한가운데로 가서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자 궁인들의 눈을 피해서 사각지대에 있던 아르가 슬며시 일어나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고개만 까딱하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지난 초겨울의 그날 이후로 나는 그를 일부러 부른 적도 없었고 서월궁으로 나간 적도 없었다. 내가 그에게 정신적으로 기대는 것이 그동안 그를 힘들게 했다는 그의 말을 이따금 의도적으로 상기했다.

“제게 감정노동까지 강요하지 마십시오.”

***

글로렌스 경은 내게 검술의 기본 베기만 하나 알려 주더니 자세만 몇 번 교정해 주었다. 그렇게 30분 만에 수업이 끝나 버렸다. 그러더니 진도 차이가 심할 것 같으니 아르에게는 ‘그 검술’을 따로 먼저 가르쳐 놓겠다고 말했다.

“그럼 저하께서는 이 자세를 다음 시간까지 완전히 익혀 오십시오. 나머지 시간은 아르 경에게 배우셔도 됩니다. 지금부터 딱 10분만 쉬시고 연습하십시오. 저는 이만 폐하께 가보겠습니다.”

아르가 기사 작위를 받지 않았음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글로렌스는 아르에게 꼬박꼬박 ‘경’이라고 칭했다. 성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이름에 ‘경’을 붙이는 것조차 처음에는 몹시도 어색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글로렌스가 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는 쉬는 동안 자리에 앉아 아르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대에게 성(姓)을 하사해야겠다.”

“필요 없습니다.”

“내가 불편해서 그러니 주거든 받아.”

나는 자꾸만 가벼워지려는 말투를 애써 억눌렀다. 그에게 말을 걸 때마다 절로 나오는 눈웃음도 참아 냈다.

그의 말대로 ‘주군과 기사’ 딱 거기까지가 우리 관계였다. 그는 내 검이 되기를 자처했고, 그러므로 나는 그를 검 이외의 것으로 쓰지 않는다.

내가 내키는 대로 그에게 내 곁을 내주었던 것처럼, 그가 충성 이외의 것을 내게 내주는 것 역시 그 마음대로 할 일이었다.

내가 그 선을 침범한 것은 월권이었다. 처음부터 우리는 주종관계였고 아르가 내게 내준 자신의 곁은 딱 거기까지였다.

“내가 훗날 그대에게 작위를 하사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작위를 받게 되면 성은 당연히 있어야 해. 그대 멋대로 필요가 없다 말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작위와 성을 하사하여 그대와 그대 후손의 지위까지 황실의 이름으로 대대손손 보장해 주겠다. 그러니 그대는 내게 그대의 검을 바쳐. 그게 네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느냐? 쌍무적 계약 관계.”

‘쌍무적 계약 관계.’ 그 단어가 입술 끝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자꾸 들러붙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에 비해서 나를 쳐다보는 아르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도 모른 채 그가 내 말에 무언가 대답해 주기를 바랐다.

“감사합니다.”

담백하고 형식적인 감사 인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명치에 걸쳐 있던 날카로운 숨이 길게 흘렀다.

그사이 글로렌스 경이 말했던 10분도 모두 지나갔다. 나는 연습용 목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글로렌스 경에게 방금 배웠던 가장 기초적인 베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

에오넬은 황제의 침실에 앉아 귀족들과 각 부처의 고위급 인사들이 줄줄이 올리는 상소를 읽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바마마, 체리에 후작이 걸려들었습니다!”

이따금 정신이 돌아오는 황제도 마침 깨어 있었다. 황제는 공기 빠지는 소리를 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정신이 돌아오고 며칠간 황제는 마론 백작을 통해 중간중간 상황을 전해 들어서 엔델포프의 전염병 사태에 대해 꽤 많은 부분을 파악하고 있었다. 후작가에서 치료제를 배포할 때 아멜리아와 에오넬이 퍼뜨린 소문까지도.

신약 개발이 1년이 넘게 걸린다는데 후작가의 치료제 배포 시기가 지나치게 빠르지 않으냐는 의혹이 빠르게 퍼졌다.

그러자 각 지방 영주들을 비롯한 귀족들과 여러 명망 있는 학자들이 황궁으로 보내는 상소가 빗발쳤다. 낱낱이 조사해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둥, 명망 있는 후작 가문을 모독한 자들을 발본색원해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둥, 내용도 다양했다.

종합해 보면 ‘이 사태를 황실이 나서서 해결해 주세요.’라는 내용이었고, 그것이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그나마 일치하는 공통 의견이었다.

“감히 황실의 사돈인 체리에 후작가를 욕보이는 간악한 무리가 있다니 어서 진상을 규명해서 어마마마의 억울함을 풀어 드려야겠군요.”

에오넬이 상쾌하게 웃어 보이자 황제도 희미하게 마주 웃었다.

“저는 아바마마처럼 무르지 않아요. 쓸모없는 자라면 아군도 잘라 낼 겁니다. 하물며 적이라면 더더욱…….”

황제의 입에서 다시 바람 빠지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에오넬은 그런 황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의 힘없는 손을 꾹 잡았다.

“체리에 후작가가 제국 경제의 80% 이상을 좌우할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힘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후작가가 무너지면 경제 특수 영지인 엔델포프 황제 직할령이 봉쇄되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물가가 요동치면서 수많은 귀족이 파산하고 그보다 수백 배 많은 애꿎은 민생도 줄줄이 파투 날 것을 잘 알아요. 그래서 아바마마께서 후작가를 누르기만 할 뿐 제대로 도려내지 못했다는 것도요.”

에오넬은 황제의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경제적 타격과 대혼란 같은 거 아랑곳하지 않을 거예요. 민생이 파투 나더라도 일단은 그들을 귀족 계보에서 파내어 버릴 겁니다. 언젠가 도려내야 할 고름이 아프다면서 도려내지 않는다면 더욱더 깊게 썩어 문드러질 뿐이에요. 아바마마께서 민생을 우선시하면서까지 원하셨던 결과가 정말로 이런 거였나요? 똑똑히 보세요.”

황제의 눈이 2초 정도 감겼다가 뜨였다.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희미한 눈빛으로 제 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에오넬이 숨을 목구멍으로 깊게 넘기고는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체리에 후작가를 비롯하여 그의 가신들까지 전부 쳐내지 못하겠다면 제가 할 겁니다. 그러니 자신 없으시면 제게 양위하세요.”

황제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집이 다 어디로 갔는지 그녀의 말에 부정하는 부분 하나 없는 눈치였다. 에오넬은 힘 빠진 제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전 아바마마처럼 만인에게 자비롭지 않아요. 자신을 죽이고 제국의 국민들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군주는 절대 안 될 겁니다. 전 폭군이 될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