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백작님.”
“예, 저하.”
“후작가에서 치료제 배포를 시작하면 동시에 퍼뜨릴 소문을 하나 준비해 줘요.”
나는 백작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백작이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집중했다. 이윽고 입에 남은 스무디를 삼킨 나는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체리에 후작가의…… 자작극이었다.”
마론 백작이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할바마마 옆을 지키던 글로렌스 경까지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들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 다음 자신들이 치료제를 개발해 낸 척 배포하면서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해 전염병을 퍼뜨렸던 거다.
절반은 사실이잖아요? 그들이 만약 이런 소문을 의식해 치료제를 무료로 풀어 버린다면 작년의 가면클럽 사건 때 근거 없는 의혹으로 실추되었던 볼테르 황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라고 하면 되는 거고요. 아, 이건 사실이군요.”
백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하, 지금 저하께서 무얼 하려는지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황자 전하와 싸우겠다는 뜻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대답이 뭔가요, 백작. 저는 크로이젠 공작가와 세르피스 후작가에 부탁해서 사람을 풀겠어요. 그러니 마론 백작은 이 일을 고모님께 말씀드려서 파피란 공작가를 움직여 주세요. 할 수 있나요?”
***
마론 백작으로부터 아멜리아의 계획을 전해 들은 에오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 조카님이 상당히 영악했군요.”
“그보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저하의 의견이 괜찮은 듯 보입니다만.”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에오넬은 마론 백작에게 물었다.
“치료제에 관련한 암호문은 해독이 끝났다고 했죠?”
“예.”
“그렇담 치료제를 대량 생산 해서 보급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아무리 짧아도 반년은 잡아야 할 겁니다.”
“흠…… 3개월.”
반년은 걸릴 거라는 백작의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에오넬이 중얼거렸다.
“전하, 그건 불가능합니다.”
“알아요. 아무리 짧아도 반년이라면서요. 그저 소문만 그리 내세요. 이미 황실에서 치료제 개발에 성공해 3개월 안에 보급이 끝날 거라는 정보를 그럴듯하게 꾸며서 고위 귀족들 사이에 뿌려요. 절대로 하급 귀족이나 민간에는 이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황태녀의 명령은 몹시도 난해했다.
“어째서……?”
“황후의 탄신 파티 때 우리가 후작저에 자객을 보내 이 정보를 빼냈다는 사실을 이미 후작이 알고 있다면서요. 그러니 분명 우리보다 먼저 치료제를 내놓으려고 할 겁니다. 수년이나 공을 들인 일인데 공을 빼앗길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여기저기 소문이 다 난다면 헛소문이라고 떠드는 꼴이 되겠지요. 직접적인 소문을 내지 마세요.”
“그럼 어찌할까요?”
“황제 직할령의 외진 영지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임시 건물을 세우고 입이 무거운 궁의 두 명과 적당히 사람을 보내 두세요. 사람이 있는 척 마차를 보내서라도 머릿수가 많은 척해요. 또한 그곳으로 약초 수레를 계속해서 보내세요. 약초가 귀할 시기이니 제대로 된 재료를 채울 수는 없지만 빈 수레에 풀이라도 가득 채워서 무언가 있는 것처럼 위장해요.”
에오넬이 몇 가지 구체적인 안을 제시했고 마론 백작은 그런 에오넬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일전에 황태손 저하께서 사두었던 땅이 하나 있습니다. 과수원과 약초 재배지로 유명한 곳인데 황제 직할령보다는 그곳이 적당하겠습니다.”
그곳은 아멜리아 황태손이 나중에 크로이젠 공작가에 약혼 선물로 주겠다고 사두었던 땅이었다.
“좋습니다. 조만간 필요한 서류를 만들어 올리세요. 그리고 우리가 푼 가짜 정보를 믿고 후작가가 미끼를 물거든 타이밍을 잘 맞춰서 소문을 하나 내주셨으면 합니다.”
또 무슨 소문? 이 황녀님들은 도대체 뭐 이리도 소문에 집착한단 말인가. 마론 백작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공법을 좋아했던 이스카 황태자가 그리웠다.
마론 백작이 그러거나 말거나 에오넬은 무심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읊었다.
“원래 이런 신약 개발은 반년 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1년은 걸리는 일이다. 이렇게요. 그리고 이거 사실이잖아요?”
“전하, 설마……!”
에오넬이 백작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람들은 적어도 1년은 걸린다는 신약 개발을 3개월 안에 해낸 후작가를 대단하다고 칭송하게 될까요, 아니면 자작극이라는 소문을 확신하게 될까요? 백작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
“이건 누가 봐도 여자 머리 장신구잖아! 이 자식이 꼬맹이 주제에 연애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아멜리아를 의식적으로 멀리하려 했던 건. 그런데도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면 언제나 그녀가 옆에 있었다.
머리로는 멀어져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질 않았다. 모순덩어리였다.
그리고 그런 모순의 결과, 보름이 넘도록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럴 때마다 자꾸만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그대는 나를 볼 때마다 슬프게 웃는 것이냔 말이야!”
이 감정이 마주하게 될 잔인한 결말도, 지속해 봤자 의미가 없을 마음이라는 사실도 뻔히 알면서, 어떻게 마냥 순수하게 웃을 수 있겠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더는 이런 사소한 교류조차 이어 갈 수가 없다.
언젠가는 정리할 마음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정리되는 걸 원한 것도 아니었다.
멍한 정신으로 눈이 거울을 향했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만 보였다.
‘슬프게 웃는다는 건 대체 어떻게 웃는 거지?’
그때였다.
벌컥!
예고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밀렌이 들어왔다.
“너 황태손 저하랑 싸웠냐?”
들어와서 한다는 소리가 너무도 뜬금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의 생각이 그대로 들킨 것만 같아 아르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빠르게 부정하는 걸 보니 저하랑 싸웠군.”
“아닙니다.”
“아니라고? 네가 정말로 저하랑 아무 일 없었으면 아니라고 부정할 게 아니라 저하한테 무슨 일 있으시더냐고 물었겠지.”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쓸데없이 촉이 좋기로는 로이드보다 저놈이 더했다.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아니기는……. 벌써 저하가 잠행을 몇 번을 나가셨는데 너는 한 번도 안 불렀잖아.”
“요즘 들어 황태손 저하의 기분이 나쁘신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너하고 관련이 없는데 네가 저하 기분이 나쁜지 좋은지는 어떻게 알아?”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제 방에서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만.”
밀렌은 단호한 축객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괜찮아. 어린애들끼리 다툴 때도 있는 거지. 저하가 일방적으로 응석 부리는 감도 좀 있긴 하지만. 너도 고생이 많다.”
아르는 한마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해 봐야 밀렌에게 장작이나 던져 주는 꼴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있으려니 밀렌의 말이 머릿속에 다시 되풀이되었다. 그러고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응석일까?’
모르겠다.
아르는 자신의 방에 찾아온 불청객을 멍한 얼굴로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낀 밀렌이 눈가를 살포시 찡그렸다.
“뭐냐? 나 쳐다보면서 그런 아련한 표정 짓지 마라. 징그럽게.”
“…….”
“할 말 있으면 얼른 하고.”
재촉하듯, 한편으론 무심한 듯 건네는 말에 아르는 손끝이 간지러웠다.
“슬프게 웃는 게 어떤 걸까요?”
그러자 밀렌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입을 살짝 벌리고는 숨을 들이켰다.
“어…….”
기습적인 질문임에도 밀렌은 마치 당연히 나올 질문이었다는 것처럼 한참을 앓는 소리를 내며 할 말을 찾았다. 그러고는 곧 적당한 말을 찾았는지 운을 떼었다.
“너처럼 웃는 거?”
그 순간 아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고 밀렌은 그걸 예리하게 포착해 냈다.
“저하가 그러디? 네가 슬프게 웃는다고?”
아르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이를 꽉 물고는 밀렌을 쳐다보았다. 밀렌은 그런 아르의 반응을 반쯤 무시한 채 코끝을 찡긋하며 울창한 나무숲과 담장으로 시야가 꽉 막혀 있는 창문 너머를 멀리 내다보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기들이 별걸 다 하네. 부럽다.”
밀렌은 그 말을 끝으로 한참이나 자리에서 꼼지락거리다가 그냥 일어났다.
“재미없다! 난 간다.”
아르는 멀뚱멀뚱 그가 일어나는 걸 쳐다보다가 저도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그냥 간다고? 마치 현명한 답을 내놓아 줄 것처럼 굴면서 남의 속은 죄다 까뒤집어서 들여다봐 놓고 정말 이렇게 그냥 간다고?
“그냥 갑니까?”
“왜? 아까는 나가라며.”
밀렌이 뭐가 문제냐며 되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당당해서 아르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처음부터 밀렌은 대답해 주겠다는 말을 확실히 한 적도 없었다. 물론 아르 역시 애초에 대답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가버리는 건 더 예상 밖이었다.
밀렌이 밖으로 나가려고 문고리를 막 잡고 돌리려다 말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 괜히 검술 예동이랑 염문설이니 뭐니 소문이라도 날까 봐 미리부터 조심하는 거라면 이 선배님이 한마디 하겠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쪼그만 것들이 별걸 다 한다!”
“……?”
“뭘 그렇게 갸우뚱거리면서 쳐다봐, 인마! 호위기사랑 염문설 같은 건 혼기 꽉 찬 레이디에게나 치명적인 것이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들끼리 특별히 친하게 지낸다고 그딴 헛소문이 날 것 같아? 과장 좀 보태면 설령 네가 황손녀님이랑 진짜 연애를 하든 말든 지금은 그냥 소꿉장난 같아서 귀엽고 말겠다.”
그 말을 끝으로 밀렌은 자신도 못 해본 걸 새파랗게 어린 꼬맹이들이 한다는 둥, 저거 지금 황태손 저하의 총애를 받는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거 아니냐는 둥, 저놈은 단장한테 말해서 딴생각 못 하게 일을 더 시켜야 한다는 둥 꿍얼거리면서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