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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37화 (37/148)

37화

“전하, 그거 맛있습니까? 안 짜요?”

“자네도 먹어 보라니까?”

에오넬이 키득거렸다. 그렇게 수다를 떠는 사이에 신문 낭독꾼은 기사 하나를 다 읽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신문을 듣던 사람들도 갈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방금 들은 기사 내용에 대해서는 저들끼리 추측성 짙은 이야기도 떠들어 댔다.

“저게 대체 뭔 소리야? 그럼 그 수펜 어쩌구 자작인가 하는 양반이 왜 죽은 거래?”

“근데 잠 잘 온다는 약은 그렇다 치고, 미약인가 그건 대체 어디다 쓰신 거래?”

“고급 색싯집이라도 가셨나 보지.”

“높은 양반들 자주 본다는 연극인가 거기 나오는 여자 배우 하나가 아비 모를 애를 뱄다는데 혹시 관련 있는 거 아니야?”

귀족들이 자주 보이는 쇼핑거리, 문화거리, 그리고 시내에 나가면 가끔 귀족을 접하곤 하는 부촌의 평민들과 달리, 귀족을 접할 일이 거의 없는 슬럼가 사람들은 높으신 분들이 들으면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날 소리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내가 저번에 저쪽 동네에 일거리가 있어서 다녀와 봤는데……. 소문을 듣자 하니 황자님도 잠 오는 약을 샀을 거라던데?”

“그럼 어디 잠 오는 약만 샀겠는가? 어디서 황족 사생아라 우기는 사람 나오는 거 아니려나 모르겠네.”

그들의 대화를 모조리 듣고 있던 호위기사의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제 주군의 낯을 살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정작 그녀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물들기는 개뿔, 몹시 멀쩡했다. 그녀는 제 호위기사가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는 볼썽사납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 큰 사내놈이 고작 저런 소릴 듣는다고 얼굴이나 붉히고……. 자네나 낯을 식히게.”

“그야 전하께서 같이 계시니까. 혹여 저런 소문을 듣고 당황하셨으려나 하고…….”

“아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된다. 내가 원하던 소문이 드디어 날 것 같아 기쁘니까.”

***

나는 역사 수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그대로 엎어졌다. 곧바로 유모가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머, 체통을 지키셔요. 저하!”

“체통이고 자시고 나 죽겠어. 유모! 어떻게 아홉 살짜리한테 규격 양피지 1미터짜리 자필 소논문 3만 자를 요구할 수가 있어!”

“역사 스승으로 디엘로니 교수를 원하셨던 건 저하십니다.”

“유모는 내가 어제 그 숙제를 하느라 날밤 꼴딱 새운 걸 알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칫!”

유모는 앓는 소리 그만하라면서 흐느적거리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내 잠이 달아나기 적당할 정도로 등짝을 두들기면서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감청색에 꾸밈이 덜한 드레스를 벗자 시녀들이 오프 숄더에 치맛단은 화려한 프릴 달린 미니드레스를 가져왔다.

“웬 미니드레스? 이제 다음 일정도 없잖아.”

나 좀 내버려 둬달라!

“갑자기 생겼습니다.”

“무슨 일정?”

“크로이젠 공자님이 오실 거예요.”

로이드?

***

옷을 모두 갈아입고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온다던 크로이젠 공자는 로이드가 아니었다. 로이드의 형, 크로이젠의 첫째 공자이자 소공작인 엘비어스 폰 크로이젠.

“저하를 뵙습니다.”

“반가워요.”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상대는 크로이젠 공작가의 소공작이다. 내가 황제가 되면 크로이젠 공작가를 짊어질 차기 공작.

먼저 말을 꺼낸 건 엘비어스였다.

“몰딘 남작가에 크로이젠 공작가의 이름으로 항의 서한을 보낼 겁니다.”

“몰딘 남작?”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이름이 귀에 익다. 누군지 떠올리려 애쓰는 내 모습을 보곤 엘비어스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못 하시는군요.”

“……네.”

설마 중요한 이름이었나? 하지만 이어지는 엘비어스의 질문을 듣고 퍼뜩 떠올랐다.

“혹시 수페니아 자작의 처형식에 가셨나요? 그 이후에 로즈벨리아 거리에서 식사하셨지요?”

내 입에서 도 깨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아!”

그때 그 변태 남작!

하지만 잠시 후 나는 중요한 사실 두 가지를 깨달았다.

“그 일을 공작가에서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그걸 왜 공작가에서 보내요?”

“그럼 황실에서 보내려고 하셨던 겁니까?”

아, 그건 인정.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제 동생이 부탁해서요.”

“로이드 님이요?”

아마 아르가 로이드에게 부탁했을 거다. 그런데 아르가 로이드랑 이렇게 친하다고?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속이 뒤틀렸다. 일전에는 로크스 거리의 가면 클럽에 대신 잠입해 주었다더니, 이번에는 제 형을 움직여 주었다.

“제 동생의 예비 약혼녀이신 저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크로이젠 공작가도 저하의 황위 계승 서열에 공작가의 이름을 배팅한 의미가 사라집니다.”

엘비어스가 돌려 이야기하긴 했지만, 결론은 이번 일은 로이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서 준 것이니 앞으로는 조심해 달라는 거였다.

입 안이 썼다. 엘비어스가 말했다.

“몰딘 남작에게 보낼 항의 서한 내용은 미리 알려 드리겠습니다. 저하께서는 그날 지방 영지에서 갓 올라오신 제 약혼녀의 사촌 동생이며, 황도의 지리에 대해 잘 모르시는 상태에서…….”

그의 뒷말이 웅얼웅얼 들려왔다.

그들 눈에는 아직 내가 어린애라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어린애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다. 언제까지고 내가 저지른 일을 다른 사람이 뒷수습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엘비어스가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불렀다.

“저하, 듣고 계십니까?”

“엘비어스 님, 도움은 감사하지만.”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어쩌면 악수가 될지도 모를 말을 꺼냈다.

“항의 서한은 제 쪽에서 황실의 이름으로 보낼 겁니다.”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 그날 저하께서 밖으로 나가신 걸 알게 되실 겁니다.”

“공자께서도 아시는 일을 할바마마께 숨기라고요? 폐하의 봉신이라면 제 무단 외출을 눈감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엘비어스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폐하의 봉신은 제 아버님이시지 제가 아닙니다. 제가 훗날 공작가를 짊어지게 된다면 그때 황위에는 저하께서 앉아 계실 테지요.”

“그럼 저를 돕지 않아도 되니 제게 간언을 하세요.”

엘비어스는 잠시 나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우리 둘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서 한참이나 얽혔다. 그런 정적을 깨뜨린 쪽은 엘비어스였다.

“간언은 신하가 주군에게 하는 겁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그대가 미래에 모실 황제가 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할바마마께 그날의 일을 솔직히 고하고 황실의 이름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사건을 덮어 버리고 그대 가문의 힘을 빌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엘비어스가 손끝으로 제 입술을 한번 훑었다.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엘비어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하하하! 저하께서는 진짜……! 저는 사실 저하께 많이 실망했었습니다. 아무리 어린애라도 저하께선 그냥 어린애가 아니라 황태손이니까요. 스스로가 감당 못 할 일을 벌이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그대는 손 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어차피 몰딘 남작은 아직도 그날 만난 내가 평민인 줄 알아. 그러니 항의 서한 따위 보내지 않아도 날 찾지는 못해.”

“손 뗄 생각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저하께서 스스로 책임지시겠다니 실망했다는 말은 취소하죠. 역시 사람은 직접 만나 봐야 아는 거네요.”

그의 여유롭고 나른한 웃음을 보고 깨달았다. 엘비어스가 날 시험했다.

그는 제 동생인 로이드처럼 무르지 않다. 그가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저하, 몰딘 남작이 황도 경비대에 신고했다는 건 아십니까? 평민이 귀족을 모욕하고 귀족의 수행원을 공격해서 상해를 입혔다고요. 귀족을 사칭했다는 말도 있었군요. 남작이 벌써 현상금까지 달아서 방을 붙였습니다. 몽타주는 누가 봐도 저하의 모습이었습니다.”

“뭐?”

이 변태 놈이!

순간적으로 튀어나간 반말을 수습할 정신도 들지 않았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멍하니 엘비어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별일 아닌 것처럼 굴었다.

“공작가에서 항의 서한을 보내겠습니다. 황실의 이름으로 보내는 건 위험합니다.”

“내가 벌인 일이다. 아무 연관도 없는 공작가에서 책임지는 것은 옳지 않아.”

“말씀드렸잖습니다. 이미 제 동생이 얽혀 있기 때문에 나섰다고요. 그게 아니더라도…….”

엘비어스가 빙긋 웃었다.

“주군께 간언만 하는 것이 신하의 일은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 몇십 년 후에 저하의 봉신이 될 예정인데 그까짓 거 몇십 년 좀 앞당겨서 그냥 지금 저하의 신하가 되면 어떻습니까?”

“네?”

가슴이 설렜다. 두근거려 터질 것 같다.

엘비어스는 뛰어난 책략가다. 그가 어려서부터 체스 같은 전략적 게임으로 따라올 자가 없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간간이 들리던 소문들 속에는 실제로 공작가를 움직이는 건 그의 아버지인 크로이젠 공작이 아니라 후계자인 엘비어스라는 말도 있었다. 크로이젠 소공작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런 크로이젠 소공작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제가 저하의 책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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