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36화 (36/148)

36화

그 순간 그의 발갛게 부은 뺨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내가 황족임을 밝히고 아르가 내 수행원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아르가 먼저 눈치채고 내 손목을 강하게 잡아 아래로 끌어 내렸다. 마치 움직이지 말라는 듯. 그는 그렇게 자신의 등 뒤로 나를 감추었다.

“몰딘 남작님, 길을 막아 죄송합니다.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혀 아이답지 않은 아르의 대처에 무언가 이상한 기류를 느꼈는지 남작이 주춤 물러섰다.

“설마 귀족이냐?”

“남작님께서 아실 필요 없습니다.”

주변이 소란한 것을 눈치챈 사람들이 하나둘 우리 주변으로 모였다. 부채로 입을 가리고 수군거리는 귀부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머, 저자는 또 저러네요.”

“돈으로 산 작위 가지고 유세는 쯧쯧.”

“도박으로 쫄딱 망한 가문에 돈 주고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한다는 짓거리가 영…….”

아르가 남작과 입씨름을 하는 사이 나는 귀부인들의 수군거림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방금보다 더 경악할 만한 이야기를 듣고야 말았다.

“저자가 소아성애자라지요?”

“세상에!”

“다 자라지도 않은 애들을 연령대별로 하녀로 들인다더군요. 이번에도 부딪혀서 옷이 더러워졌으니 옷값을 물어내라는 핑계를 대겠죠.”

이건 단단히 미친 거야! 분명 뭐가 잘못된 거라고! 그럼 애초에 나하고 일부러 부딪힌 거라는 얘기잖아. 저 변태와 부딪힌 어깨에서부터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가 황족이라는 걸 밝히고 아르가 황실 기사라고 말하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네놈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저놈이 귀족을 모욕했다. 죽여! 계집애는 흠집 내지 말고.”

그러자 남작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자가 검을 빼서 앞으로 내질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르는 등 뒤에 선 나를 옆으로 부드럽게 밀면서 몸을 틀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빠른 동작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여유로운 느낌이었다.

설마 피할 줄 몰랐던 것인지 남작의 수행원이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질 듯 중심을 잃었다.

아르는 그가 달려오는 속도를 이용해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검을 빼앗아 그대로 휘둘렀다.

“으아아아악!”

수행원의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아르의 등 뒤에 선 내게는 피가 한 방울도 튀지 않았지만, 주변은 이미 피 분수로 난리가 났다.

남작의 목에 칼이 들어가자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 너 뭐야!”

“나는 우리가 평민이라고 한 적이 없다. 처음에 조용히 지나갔으면 묻어 주려 했지만, 오늘 일은 목격자가 많아 그냥 넘어가기 힘들겠군. 곧 몰딘 남작 저택에 정식으로 항의서를 보내겠다. 기다리고 있어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칼을 주저앉은 몰딘 남작에게 무심하게 던졌다.

챙그랑!

엉덩방아를 찧듯 앉은 남작의 발치로 날 무딘 검이 덩그러니 뒹굴었다.

“곧 치안대가 들이닥칠 겁니다.”

아르는 내게 귓속말을 하곤 그대로 내 손목을 잡고 우리가 처음 나올 때 사용했던 황궁 비밀 통로가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곧 멀리서 황도 치안대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이 좁은 굴을 지나서 저 앞의 문을 열면 내 드레스룸이 나올 거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린다. 다리도 바들바들 떨린다. 오늘 하루 마차도 없이 걸었더니 숨이 차서 죽을 것 같다.

“운동을 좀 해야겠다.”

“그래야겠습니다. 저하의 체력이 이 정도도 못 따라올 줄 몰랐습니다. 승마를 배우십시오.”

“승마?”

뜬금없이 웬 승마? 내가 아르를 가만히 쳐다보자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혹여 일이 잘못되면 도주해야 하니까요. 꼭 그게 아니더라도 배워 두면 재미있을 겁니다.”

“가르쳐 줘.”

“그냥 호위 기사들에게 배우십시오. 저한테는 대체 언제 어디서 배우실 겁니까?”

그러게……. 현실의 벽이었다.

“그럼 그대가 내게 검을 가르치는 것은 어떠하냐?”

“서임도 받지 않은 기사에게 검을 배우는 건 황실 법도에 어긋날 텐데요.”

“어? 아직이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섀도 나이트는 기사 서임을 받지 않습니다.”

황궁 기사가? 그것도 황제 직속인데.

“왜?”

“기사가 아니니까요.”

어느새 거울 문 앞까지 도착했다. 아르가 문을 짚고 잠금장치를 찾아 아래로 더듬어 내려갔다. 나는 그런 그와 문 사이로 끼어들었다.

“기사가 아니라니?”

“사실 섀도 나이트는 암살자입니다. 황제 직속 암살단. 황실에 암살단이라니 품위가 없잖아요. 그러니 후대에 와서 임페리얼 섀도라는 정식 명칭 뒤에 나이트라고 붙여서 기사라고 포장한 겁니다. 서임식은 원래 없었으니 전통대로 아직도 그냥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기사들에게 일생일대 가장 영광스러운 날을 꼽으라 한다면 누가 뭐래도 기사 서임을 받은 날일 것이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중요한 날이고 중요한 행사였다.

만인 앞에서 자신이 평생을 모실 주군에게 그의 검과 방패로 인정받는 날. 그리 공포되는 날.

그래서 기사들에게는 누구에게 서임식을 받는가도 몹시 중요했다. 황실 기사들은 대부분 황제가 서임식을 해준다. 이따금 황태자에게 서임식을 받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만약 황태자가 폐위된다면 출궁하여 평생 검을 잡을 수가 없게 된다.

“섀도 나이트에 서임식이 없다는 거 알고 들어갔어?”

“당연한 것을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일을 어떻게 포기해!”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기사 작위가 저하를 지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주군을 지키지 못한 기사라는 이름 따위 필요 없어요.”

그는 입구를 막은 나를 슬쩍 밀어내고 거울 문을 열었다.

“들어가십시오.”

엉거주춤 있다가 거의 떠밀리다시피 드레스룸으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딸깍-.

뒤를 돌아보자 처음부터 통로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는 거울이 반듯하게 붙어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몹시 작다.

‘너무 어려.’

이때까지 겉모습이 어린아이라 많은 것을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내가 나섰어야 했어.’

아르가 앞에 나서기 전에 내가 해결해야 했다. 그는 나의 검이지 책사도 보모도 아니다. 그도 내게 자신을 검으로만 이용해 달라 하지 않았던가. 겉모습이 어리다는 건 핑계였다.

***

수페니아 자작이 처형되고 며칠이 지났다. 그랜 영윤의 자백 이후 백, 자, 남작을 가리지 않고 황도의 유력 귀족 가문들이 줄줄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랜 영윤이 모든 것을 자백하고 황도 밖으로 추방되어 그랜 백작령으로 떠났다는 사실이 황도에 파다하게 퍼졌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 정도면 선처지.’

확실히 선처가 맞았다.

그 사실이 신문에도 실리면서 신문 낭독꾼들이 연일 그 사실을 읊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것이 선처인지 아닌지도 사실 잘 모르면서 남들이 그렇다고 말하니 저들도 그러하다고 떠들었다.

오늘도 슬럼가 입구에서는 신문 낭독꾼이 자리를 잡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 근처에서 에오넬은 자신의 오랜 호위기사와 나란히 걸었다. 허름한 옷과 화장기 하나 없는 모습에서는 황족은커녕 귀족 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처벌이 너무 약했습니다. 많은 황후파 귀족들을 계보에서 파버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호위기사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아니, 살을 내주고 뼈를 깎은 거야.”

“확실히 파격적인 선처 탓에 트로이카 백작가의 차남도 쉽게 자백하고 황도 밖으로 추방되는 선에서만 끝이 났습니다만, 앞으로는 자백하는 이들을 더 선처해 줄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에오넬은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쓸었다.

“확실히 인제 와서 하는 자백은 의미가 없지.”

“그들은 황자 전하께서 이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 말하는 순간…….”

“알아. 황후의 체리에 후작가가 그 가문을 파산시키겠지.”

“체리에 후작가와 사업적으로 얽힌 굵직한 가문이 한둘이 아닌 만큼 자칫하면 제국 경제까지 휘청일 수 있습니다.”

에오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국 경제는 무너지지 않아. 경제까지 휘청일 정도로 저들에게 복수하진 못해. 배신에 대한 처벌은 배신자가 한둘일 때에나 가능한 거야. 막말로 배신자들끼리 손잡으면 후작가도 무너지는 거 한순간이야.”

후작가도 배신자들의 선처를 바랐다. 그들이 무너지면 계약되어 있는 많은 사업이 파투난다. 그러면 후작가의 경제력도 무너질 테니까.

더불어 에오넬도 그들의 선처를 바랐다. 적당한 선에서 자백한 자들에 한해 선처해 준다면 저들이 알아서 동료들을 무덤으로 데려와 줄 테니까.

에오넬은 신문 낭독꾼의 목소리 정도는 딱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서서 길거리에서 파는 닭고기 꼬치를 사서 입에 물었다.

“자네도 먹을 텐가? 맛은 보장할 수 없네만.”

사실 닭 맛보다 소스 맛이 더 진해 닭을 산 건지 소스를 산 건지 잘 모르겠는 맛이었지만 무료하게 서 있기에는 손도 입도 허전했다.

호위기사가 손사래를 쳤다.

“어휴, 그거 닭고기 아니고 쥐 고기라고 하던데요.”

“하하하! 불에 태워서 닭고긴지 쥐 고기인지 알지도 못할 맛인데 뭐 어떤가?”

“그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만…….”

기사는 도무지 제 주군의 상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분이 장차 이 나라의 황제가 될 황태녀라니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전하께서는 털털해도 너무 털털했다. 위엄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제발 부탁이니 조금은 위엄을 갖추어 주십시오.”

“여기서까지 이미지 관리를 하라 하다니, 듣기 싫다. 다음부터는 혼자 나와야겠구나.”

“도대체 다른 이들이 왜 전하를 냉정한 군주가 될 거라고 하는지 소신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기사가 툴툴거렸다.

귀족들은 에오넬의 뒤를 돌아보지 않는 행동력과 사교계에 추문이 돌아도 제 앞에서 들추어내지만 않는다면 아랑곳하지 않는 꼿꼿함을 보며 냉정하고 무자비하다고 말하곤 했다.

몇 년 전, 그녀가 조금 더 젊었을 적에 호위기사였던 자신과 이렇게 궐 밖을 돌아다니다가 염문설이 돌아 구설에 올랐을 때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제 오라비인 황태자의 생일파티에서 염문설을 입에 올린 귀부인의 얼굴에 도수 높은 술을 끼얹었다.

심지어 그녀는 키옌 황후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래 놓고는 그 흔하디흔한, 일명 ‘멕이는 대사’를 읊지도 않은 채 뒤돌아 나가 버렸다. 그 뒷수습을 당시 아멜리아 황태손을 임신 중이셨던 황태자비께서 다 하셨다는 건 아시려나 모르겠다.

그녀는 공적인 자리에서 좀처럼 입을 여는 법이 없다. 심지어 말을 해야 할 곳에서도 아낄 때가 많았다. 사적인 곳에서는 덜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어지간하면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잘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지도 않으시고 타인이 주는 마음을 받지도 않으시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이렇게 밖에 나올 때면 방금처럼 쓸데없는 말이 많아지니 한편으론 다행인 것 같다. 어쩌면 이게 그가 모시는 주군의 진짜 모습일지도 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