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와이번은 왜 그때처럼 산의 초입으로 향하지 않고 행사장의 베이스캠프 막사로 왔던 것일까.’
어째서…….
그저 우연일까? 우연이라 넘겨짚기에는 상식적으로도 수상한 구석이 많았고 과거와도 다른 부분이 많았다.
그때 방문 앞에서 기척이 들렸다.
“저하! 잔느입니다.”
시녀장 잔느였다.
“무슨 일이냐.”
“일전에 시키신 대로 알아보았사온데…….”
“들어와.”
곧 잔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한편 세 시간 전. 황제의 집무실.
그 고요한 공간에는 황제와 시종장인 마론 백작 그리고 기사 한 명뿐이다.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맞은편에 선 기사를 쳐다보았다. 황제의 눈빛에 기사는 송구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황제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황후가 의심스럽단 말인가?”
“누구라고는 정확히 짚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와이번이 나타나기 전에 자리를 떴다가 사태가 끝나고 나타나셨다면 조사를 해야 할 겁니다.”
“그 말이 그 말이잖아. 그때 막사 밖으로 나갔던 사람은 황후와 황후의 시녀들, 황후의 호위들뿐이야.”
황제는 대놓고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티 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기사는 아까보다도 더욱 면구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같은 거구의 기사가 움츠리는 꼴을 보니 아주 우습구먼. 왜 ‘황후가 의심스럽다’ 말을 못 해?”
“그, 그것이…….”
기사는 몹시 억울했다. 어떻게 감히 “이 어마어마한 사건의 범인이 황후 폐하일지도 모릅니다.”라고 아뢸 수 있을까. 그것도 일개 기사 따위가 물증도 없이 정황상의 심증만으로.
“황제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는데. 자네 의견은 지금 그게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된 범죄인 것 같다. 이 말이잖아.”
황제의 목소리에는 잔뜩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그러자 기사가 바짝 긴장한 채 대답했다.
“예.”
“의심되는 범인이 누구인지 추려 오는 것도 자네 일이고.”
“……예. 그러합니다.”
황제의 다음 나올 말이 적잖이 예상되어 기사는 더욱 긴장했다. 그의 예상처럼 황제는 잔뜩 숨을 들이켰다가 곧바로 고함을 내질렀다.
“이 월급도둑놈 같으니라고! 너 인마, 지난달 봉급 뱉어 내!”
보다 못한 마론 백작이 황제 옆으로 가서 황제를 말리며 시원한 물을 권했다.
“폐하, 일단은 고정하시옵소서! 물 한 모금 드시고 진정을…….”
“고정? 고정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황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사에게 손가락을 뻗어 마구 휘두르며 계속해서 말했다.
“누군가의 계획된 범죄 같다며? 그날 누가 몇 시에 행사장에 도착했는지, 언제 무엇 때문에 나갔는지, 다시 들어왔는지, 그런 것들까지 조사했다며. 그랬더니 황후밖에 없었다며! 그럼 ‘황후의 행적이 수상하니 조사를 해야 합니다.’라고 똑 부러지게 말을 못 해! 왜?”
황제는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거나 잡아 기사를 향해 던져 버렸다. 사실 잡고 보니 페이퍼 나이프였지만 명색이 제국 황실 기사인데 그것 하나 못 피하나 싶어 그냥 그대로 던져 버린 것이다.
기사가 황급히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의 어깨가 있던 자리를 페이퍼 나이프가 스쳐 지나가 소파에 맞고 아래로 떨어졌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소신이 잘못을…….”
“잘못했으면 특별 조사단 꾸려 줄 테니까 증거 없애기 전에 황후와 황후궁의 궁인들부터 소환해서 조사해.”
“예. 알겠습니다.”
기사는 행여라도 황제가 다시 저를 부를세라 밖으로 튀어 나갔다.
“후우!”
황제는 책상을 짚었던 두 손을 떼고는 쓰러지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쳐올렸다. 그러다가 이내 아까 시종장 마론 백작이 책상 위에 놓아둔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백작.”
“예. 폐하.”
“어명이다. 제14기사단에서 이번 사건 조사단 인원을 차출하겠다. 임명에 필요한 서류를 만들어 와라. 그리고 조사 책임자는 세르피스 후작으로 하지. 후작을 불러와.”
“예. 예?”
마론 백작은 기계적으로 대답하다 말고 약간 의외라는 듯 움찔 놀랐다.
“문제 있나?”
“소신의 말이 주제넘은 줄은 압니다만 어째서 크로이젠 공작이 아닌지…….”
“크로이젠은 너무 커. 내가 대놓고 황후를 저격해 체리에 후작가를 면 주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네. 그런고로 전 황후의 친정인 파피란 공작가도 안 된다.”
황제는 잠시 말을 끊으며 깃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뱅글뱅글 돌렸다. 그러다가 수염을 쓸어내리고 입맛을 한번 다시고 이어 말했다.
“황후와 체리에 후작가를 조사하는 데 꿀리지 않을 정도로 작위가 높으면서도 체리에 후작을 대놓고 무릎 꿇려서도 안 돼. 그렇다면 같은 후작 작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전 황태자비의 친정인 세르피스 후작가가 제격이지.”
“체리에 후작가에서 세르피스 후작가의 소행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후작이 설마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할까……. 그날 멜리도 죽을 뻔했어. 세르피스 후작가에서 황실에 유일하게 혈연이 닿은 황족은 멜리뿐인데 그들이 범인일 리는 없지.
특히나 에오넬이 황태녀라는 전례를 만들어 주었는데. 세르피스 후작가는 필시 멜리를 다다음 황제로 앉히려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멜리를 사지로 몰아넣는다? 개도 안 믿을 그런 주장을 하면 중립 귀족들에게 더 큰 의심을 받을 게 뻔한데 그럴 리 없다.”
“그렇군요.”
마론 백작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럼 곧 서류를 작성해 올리겠습니다.”
백작이 곧 자리에서 물러났고 황제는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서류들과 옆에 놓인 옥새, 그리고 집무실에 틀어박힌 이 시간이 야속하리만치 청명한 창문 밖의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크로이젠 전 공작이 부럽구먼. 나도 빨리 에오넬한테 황위나 물려주고 이 좋은 날에 여행이나 다니고 싶다. 에휴!”
***
노크가 들리고 잔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모는 나가 있어 줄래?”
유모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읽던 책을 덮었다. 그녀가 방문을 닫으면서 카펫에 문이 쓸리는 소리와 딸깍 문고리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으으- 달칵!
무릎 위에 있던 두꺼운 벨벳 표지의 동화책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잔느를 쳐다보았다.
“말해.”
“일단은 황제 폐하께서 이번 사건 조사를 곧바로 시작한다고 하셨답니다. 특별 조사단 인원은 제14기사단에서 인원을 차출할 것이라고 들었고요. 조사 책임자는 세르피스 후작님입니다.”
“책임자가 외할아버님이라고?”
“예.”
할바마마는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 이걸 단순 사고라고 판단했다면 그저 기사단장을 조사 책임자로 임명해서 사고 경위나 조사하고 끝날 일이었다.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있을지언정 죽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책임자가 내 외할아버님인 세르피스 후작이라니, 이건 할바마마가 이 사고를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하신 건가…….”
“……!”
잔느가 깜짝 놀란 눈을 하곤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아, 아닙니다.”
아, 맞다. 나 여덟 살이지.
다섯 살 무렵부터 나는 의도치 않게 주변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그 나이답지 않은 깊은 생각과 인간에 대한 불신을 은연중에 내비칠 때가 있었다.
내가 정치적인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24시간 내 곁에서 시중을 드는 유모와 시녀들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냥 천재인 척하지, 뭐. 내가 똑똑하면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 떨거지 황족인 것도 아니고 무려 황제의 적장손인데 천재인 척하면 좋은 것 아니겠나.
“어쨌든 사고 조사 책임자가 외할아버님이고 특별 조사단은 제14기사단이 맡을 거라고?”
“예.”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게 생겼다.
지난 삶에서 요맘때 할바마마는 과다출혈 때문에 혼수상태였다. 정말 말 그대로 사경을 헤매고 계셨다. 그 때문에 키옌 황후가 나서서 사고를 조사했었다.
자신의 수족이었던 백작 하나를 책임자로 앉혀 놓았고 제 작은 오라비가 이끄는 12기사단을 조사기관으로 임명했었다.
그리고 그날의 사고는 사냥 행사 때문에 위협을 느낀 와이번 무리가 사냥에 참여한 기사들과 용감한 귀족들을 피해서 산 아래로 내려오다가 황제 일행을 공격했던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흐음…… 이번엔 어떻게 되려나.”
“무엇이 말입니까?”
잔느가 물었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내 말을 못 들은 척 넘기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아무리 어른스러운 소리를 해도 흠칫 놀랄지언정 내 말을 못 들은 척하려 하지는 않았다.
“어른들이 어떻게 하실까나.”
할바마마가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겠다고 나섰다는 건 무언가 냄새를 맡았다는 거다.
게다가 와이번의 습격 시나리오 자체가 회귀 전과 이미 달랐다. 그것 때문에 나도 인위적인 조작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나야 지난 삶에서의 기억을 토대로 합리적 의심을 하는 거라지만, 할바마마는 대체 어떤 근거로 이 사태를 인위적 사건이라고 의심을 하신 걸까.
내가 별다르게 말을 붙이지 않았지만 잔느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잔느,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알아 왔어?”
“아. 그것도 알아 왔습니다. 이름은 아르, 성은 없다고 합니다. 제14기사단 소속의 견습 기사라 합니다. 기사 서임은 내후년에 받을 거고요.”
내후년이면 그가 열다섯이 되면 받는 것인가. 지난 삶에서 나와 처음 만났던 해로구나.
“그 이외에 다른 것은?”
“성도 없는 평민이 황실 기사단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게 이상하여 더 알아보려 했사온데…… 그것이…… 그가 황실 기사단에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건지는 그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사도 모른다고 해요.”
“그게 가능해?”
“기사들의 신상에 관한 서류를 열람할 권한도 기사단장에게나 있고, 그가 평소에 자신에 대해서는 말을 일절 하지 않는다 합니다. 기사단장을 통해서 더 조사해 볼까요?”
성이 없는 평민이 황실 제14기사단의 견습 기사라…….
“어떻게 황실에 들어온 건지 뒷조사 좀 해줄래?”
“예. 그런데 저하, 그 아이는 어째서 찾으시는지요? 그날의 일에 대해 공을 치하하시려면 불러서 상을 내리시면 되는 일이온데 특별히 더 시킬 것이 있으신 겁니까?”
“그의 재능을 내가 키워 보려고. 황족답게 보은을 해야지.”
이번에는 부디 나와 상관없이 네 재능을 마음껏 펼치거라.
“호위로 두시려는 겁니까?”
“일단 시킨 것만 조사해 줘,”
“알겠습니다. 그의 정확한 출신과 그를 후원하는 자의 배경을 우선 순위로 조사하겠습니다. 그럼 주무세요.”
잔느가 공손히 말하고 물러간 다음 나는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마법 조명을 껐다. 아마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사라졌으니 내가 곧바로 잠을 자리라 생각할 거다.
나는 잠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베개를 이용해 적당히 이불을 부풀려 이불 속에서 자는 척 꾸며 두었다.
자꾸만 잔느가 나갔던 문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손바닥에 땀이 축축하게 흘렀다.
테이블 위의 마법 조명을 꺼진 상태 그대로 집어 들고 서둘러 드레스룸으로 넘어갔다. 교양 검술 수업을 할 때 입는 가죽바지와 부드러운 면 블라우스를 꺼냈다.
오늘은 그 전부터 의심스러웠던 것을 확인해야겠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터질 것 같다.
대체 나는 어째서 과거로 되돌아온 것이며, 그 꿈에는 왜 항상 그 단검이 나오는 것인가. 그 단검을 찾게 되면 오늘 밤 드디어 나는 내가 회귀한 이유와 꿈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