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3화 (13/148)

13화

고모님 옆에 있던 기사가 목소리에 마력을 담아 외쳤다.

“황태녀 전하의 명령이다! 사냥에 나간 이들을 귀환시켜라! 비상 나팔을 불어라!”

곧 중저음의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뿌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웅-.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들은 와이번을 상대하고 나머지는 귀빈의 대피를 도와라!”

고모님이 다시 한번 명령했다. 그러자 그것을 옆에 있던 호위기사가 다시 큰 소리로 옮겼다.

“황태녀 전하의 명령이다!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들은 와이번을 상대하고 나머지는 귀빈의 대피를 도와라!”

제각각 움직이던 기사들이 고모님의 명령에 따라서 질서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끼에에에엑!

기사들의 함성과 사람들의 비명, 와이번의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고모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유모는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게!”

그 명령에 시녀들과 유모가 발을 동동거렸다.

“전하께서는요?”

“귀빈들이 모두 대피하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

그 말에서는 황족의 위엄마저 느껴졌다.

“하오나…….”

“어서 아이를 안고 폐하를 따라서 떠나…….”

고모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와이번 하나가 우리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꺄악!”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들자 고모님의 호위기사의 칼에 아까 그 와이번의 목이 꿰뚫려 있었다.

“위험합니다. 여긴 저희 기사들에게 맡기시고 황태녀 전하께서도 어서 피하십시오.”

와이번의 목에서 뜨겁고 끈적한 피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와이번의 피를 뒤집어쓴 기사의 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게 물들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유모의 도톰한 손바닥이 내 눈을 가렸다.

“애는 자네가 업고 뛰게.”

할바마마가 명령을 내리자 가장 젊고 체구가 듬직한 시종이 나를 등에 업었다. 나는 시종의 등에 딱 달라붙은 채 유모와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황궁을 향해 뛰었다. 할바마마와 고모님도 옆에서 달렸다.

와이번 몇 마리가 우리 뒤를 따라왔고 우리를 호위하는 기사가 와이번 무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꾸애애애액!

검에서 뻗어 나온 오러가 와이번의 배를 가르자 내장이 와르르 쏟아졌다. 나는 그것을 다 눈에 담기 전에 얼른 고개를 돌리고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제 발로 뛰어야 하는 시종 시녀들은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급기야 토악질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우욱! 우웨엑!”

얼핏 봤던 나조차 기억 속에 그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콱 박혀 버려서 한동안 꿈에 나올 것 같은데 시종 시녀들은 오죽할까.

곧 사냥을 나갔던 이들이 속속 모이는 듯 말발굽 소리가 지척에 요란했다. 사람과 말과 와이번의 소리가 아무리 귀를 막아도 뚫고 들어왔다. 고막이 터져 버릴 것처럼 먹먹했다.

와이번의 날갯짓에서 시작된 바람이 등을 스치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것들의 모습이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바람이 점점 강해지고 가까워졌다.

“으아아아아!”

나를 업고 달리던 시종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넘어지듯 앞으로 고꾸라질 때 나도 그의 등에서 옆으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그러자 그 직후에 와이번 한 마리가 그의 덜미를 낚아챘다.

“흐어어어아아악!”

그는 허공에 매달린 채 손발을 휘저으며 비명을 질렀고 나는 바닥에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유모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그녀의 손끝이 이 내 팔뚝을 스치며 놓쳤다.

데구르르- 철퍽!

간신히 구르던 것을 멈추고 땅에 엎어졌다. 고개만 빼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이 시커먼 가죽으로 뒤덮여 있다. 그 까만 막은 아까 그 시종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날아오르려는 와이번의 날개였다.

곧 그 가죽 날개를 뚫고 아래로 기다란 검이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와이번의 등허리 위에 우리를 호위하던 기사가 올라타 있었다. 와이번이 시종을 낚아채려고 하강한 틈에 와이번의 등에 올라타 가죽으로 덮인 날갯죽지에 검을 힘껏 박아 부욱 찢어 버린 것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팔을 어깨 양쪽에 짚어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켰다.

“읏!”

일어나서 다시 뛰어 도망쳐야 했다. 이런 아수라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방금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잔뜩 구른 탓에 발목이 몹시 아팠다.

그때 또다시 다른 와이번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저하!”

“꺄악! 저하아아아!”

아, 나 또 죽는구나.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리자 죽는다는 공포보다 억울함이 먼저 밀려들었다.

이렇게 또다시 허무하게 죽는구나……! 아직 복수다운 복수도 못 해보았는데.

그때였다.

등을 뒤덮었던 살기가 한순간에 가셨다. 팔로 머리를 감싸고 숙인 고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바닥에 갑자기 햇빛이 비쳤다.

“어……?”

고개를 들자 등 뒤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쿵!

지진이 난 것처럼 바닥이 미세하게 울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황실의 기사단 제복을 입은 기사였다. 정확히는 정식 기사가 아닌 견습 기사.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햇빛 아래서 파랗게 반짝였다.

‘……?’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뒷모습에는 낯선 생김새와 익숙한 느낌이 혼재했다.

뒤를 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

아르…….

목이 꽉 막혀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지금 만나도 될까? 지금 그의 나이가 몇이더라? 열셋이던가. 원래라면 2년 뒤에 만나야 하는 것 아니었나?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햇빛이 비쳐 아련하게 반짝이는 그의 뒷모습에 그대로 홀려 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먹먹한 가슴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검을 들고 선 그의 뒷모습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날 지켜 줄 것처럼 너무나 든든했다. 내 마지막을 끝까지 지켰던 충신에게서 나는 몹시도 애틋한 마음을 느꼈다.

나는 그가 이렇게 제대로 검을 빼 드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 모습이 이렇게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나는 미처 몰랐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아아, 내가 그의 재능을 죽이고 있었구나.’

그가 어마어마한 재능이 있다더라는 말은 다른 기사들을 통해서도 흘리듯 들었지만 단 한 번도 그가 제대로 검을 꺼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황실에 갇혀서 지내는 황녀의 호위란 게 그랬다. 내가 지난 삶에서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권력에 기인한 정치적 압박 때문이었던 것이지 암살 위협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 봐도 나는 지난 삶에서 숙부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무력으로 살해당한 게 아니라 정치로 살해당했다.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사약을 받아 내 손으로 그것을 마셔서 죽은 것이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그가 호위기사로서 검을 빼 드는 일은 일절 없었다.

그런 황녀를 모셨던 기사가 전력을 다해 검을 쓸 일이 어디 있었겠나.

‘이번 생에서는 그를 내 곁에 묶지 말고 놓아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눈을 감았다.

분명 이것이 옳은 일일 터인데 어째서 눈물이 나는지 알 수가 없다. 가슴이 찢어진 것처럼 아팠다. 그를 포기해야 하는데…… 내 욕심 때문에 그를 의도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정치 한복판에 끌어들일 수야 없지 않을까.

그를 놓아두고 혼자 죽겠다며 사태를 회피해 버린 내가 어찌 감히 그의 충심을 이용하는 발칙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나는 그의 뒷모습을 차마 더는 볼 수가 없어서 외면해 버렸다.

곧 저 너머에서 황실 기사단들과 귀족들 그리고 대귀족 소속의 기사단이 보였다. 비상 나팔 소리를 듣고 베이스캠프로 귀환한 것이었다. 그들이 돌아오자 전세가 뒤바뀌었다. 난폭했던 와이번들이 추풍낙엽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내가 아르를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잡을 것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할바마마였다.

“멜리! 멜리야! 괜찮으냐? 이 할애비가 미안하다. 이 할애비가…… 너를 괜히 재미도 없는 행사에 데려와서……. 다친 데는 없느냐?”

나는 발목이 아파서 아직 엎어져 있는 상태였다. 할바마마가 그런 내 어깨를 짚고는 무릎으로 엉금엉금 걸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황제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으로 기는 모습을 보곤 기함을 토했다.

“폐, 폐하! 옥체를……! 아니, 체통을…….”

“체통이 문제냐?”

그러고는 내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황손의 발목이 부었다. 어의를 데려와라! 멜리야, 발목을 삐었느냐? 응? 어의는 어서 달려오지 않고 뭣 하는 게야?”

할바마마가 하도 난리를 치며 시야를 가린 덕분에 아르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 버렸다.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꾹 참고 참다가 결국 고개를 빼꼼 내밀고 그가 서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

황도에서 있었던 사냥 행사는 와이번의 습격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애초에 천막을 치고 베이스캠프로 지정했던 곳은 몬스터들이 잘 내려오지 않는 곳이었다. 게다가 해마다 그곳은 베이스캠프였다. 단 한 번도 이런 사고는 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와이번은 제 영역 밖을 잘 나서지 않는 영역 몬스터였기에 이번 사태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사실 아직도 와이번이 제 영역을 벗어난 이유는 미스터리다.

그리고 나 역시 그것과는 또 다른 추가적인 이유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원래대로라면 할바마마가 사냥터 외곽을 호위 다섯 명과 함께 둘러보다가 와이번 무리의 습격을 당하는 게 시나리오인데…….’

그런데 왜…….

‘왜 이번에는 와이번들이 사냥터 외곽을 둘러보던 볼테르를 습격한 것이 아니라 베이스캠프를 습격한 것일까?’

이건 어쩌면 와이번의 등장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건 아닐까. 그저 우연이었다면 와이번은 나의 회귀 전의 시간대에서처럼 사냥터 외곽, 즉 볼테르 일행을 습격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정확한 이유, 와이번의 정확한 목적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까지 생각하자니 너무나 머리가 아파서 나는 생각을 잠시 접어 두었다. 일단은 저녁을 먹고 피곤한 몸과 마음을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나서 자기 전 시간.

나는 뜨개질을 하는 유모 옆에 얌전히 앉아 동화책을 읽는 척하며 의미 없이 책장을 넘겼다. 사실 동화책을 읽으려 해도 집중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자꾸만 딴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골똘한 내 눈앞에 유모의 손이 쓱쓱 지나갔다.

휘휘, 휘휘-.

“어어? 유모?”

“저하, 읽고 계신 것이지요?”

“그, 그러엄!”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내가 그렇게 대답해도 못마땅한 것인지 유모는 뜨개질하던 실을 손등으로 한번 쓸어내리면서 “끙…….” 하고 소리를 냈다.

“왜? 나 진짜 읽고 있었다니까.”

“정말이요?”

“응. 내가 지금까지 읽은 거 얘기해 줄까? 마침 지루하던 참이었어.”

그래, 뭔가 말이라도 해야 지금 떠오르는 이 잡생각들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자꾸만 낮에 보았던 아르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죄책감과 고마움이 뒤섞여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시 덮어 둘 것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유모는 내 말을 그저 어린애의 ‘결백 주장’ 정도로 생각한 건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어요. 계속 읽으세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답니다.”

사실 내용을 물어봐도 상관은 없었다. 아니, 물어봐 주길 바랐다.

이미 지난 삶에서도 질리게 읽은 동화책이라 이 동화 전집(단권이 아니고 무려 전집이다)에 실린 각 동화의 내용은 이미 줄줄 꿰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삽화 속 주인공의 옷 색깔까지 전부 읊을 자신이 있다.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 읊다 보면 잡념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모는 다시 뜨개질에 집중했고 나도 어쩔 수 없이 책장을 한 장 넘기며 사냥 행사 때 일을 무의식 반 의식 반인 상태로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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