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자신을 황후의 조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미래의 민티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회귀 전에도 그녀는 어른이 될 때까지 나에게 무례했다. 볼테르가 황제가 된 후에는 나에게 무늬만 황족이라며 대놓고 무시하고 모욕을 주기 일쑤였다.
아무리 되바라졌다고 해도 아직은 쟤도 애기지. 그냥 정신연령이 한참 위인 내가 참아 준다. 옜다, 인사는 받아 주마. 나는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아…… 그래.”
그랬더니 이 도를 모르는 것이 냅다 내 따귀를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조그만 게 어찌나 손이 매운지 아파 죽겠다. 그녀에게 얻어맞은 내 볼은 여리여리한 세 살의 아가 피부라 더욱 따끔한 느낌이다.
“우리 할아버지 체리에 후작이야! 우리 고모 황후라고! 너 왜 반말이야!”
“꺄악! 아가씨. 진정하세요. 저 아가씨도 귀족일 수도 있다고요. 제발요!”
민티아의 시녀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이제 이 사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서 빨리 나의 보호자가 나타나 교양 있게 해결할 수 있길 바라는 것처럼 주변을 미친 듯이 두리번거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화끈거리는 볼을 감싸고 멍해져 있는데 민티아가 그제야 제 시녀를 향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쟤도 귀족이라고?”
“그럴 거예요. 그러니 어서 화해해요. 아가씨.”
“그럼 우리 할아버지보다 세?”
그 순간 나는 육성으로 육두문자가 튀어나올 뻔했다. 이런 미친.
“그, 그건…….”
“난 고모가 황후인데?”
네 고모가 황후면 내 고모는 황녀……. 아, 이쪽은 신분이 딸리네.
그럼 나는 울 할아버지가 황제다!
하지만 고작 다섯 살짜리한테 싸대기 좀 맞았다고 내가 질질 짤 정신연령도 아닐뿐더러, 이런 유치한 싸움질을 하기엔 기력이 후달린다.
여기서 내가 황손녀라고 바락바락 마주 싸우면 어떻게 될까? 저 시녀가 놀라서 민티아를 데리고 뽀르르 줄행랑을 치려나? 그럼 증인도 없이 내가 얻어맞은 채로 끝날 텐데 나도 그냥 때릴까.
그럼, 에라 모르겠다. 일단 될 대로 되라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네놈 뒤처리는 네 후작 할아버지든 황후 고모든 알아서 처리해 주실 거고. 내 뒤처리는…… 아마 황제 할아버지가 알아서 잘 처리해 주시겠지. 훗!
뺨을 후려 맞았으면 응당 쌍 따귀에 손톱자국까지 이자를 쳐서 돌려줘야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나는 양쪽 손바닥을 치켜들고 손끝에 힘을 바짝 줬다. 그렇게 손톱을 세워 민티아의 양쪽 뺨을 두 손으로 번갈아서 후려쳤다.
단번에 그녀의 볼에 손톱자국이 길게 생겼다. 갓 생긴 생채기가 발갛게 부어올랐다. 어린아이의 손톱은 어른의 것보다 얇고 날카로워 효과가 컸다. 새빨간 그 자국을 보자 더욱 뿌듯함이 차올랐다.
그런 내 의기양양한 두 눈을 마주한 민티아가 당황했는지 붉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커다란 눈은 삽시간에 눈물로 글썽글썽했다. 급기야 울먹울먹 딸꾹질까지 시작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민티아의 시녀에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외쳤다. 물론 민티아의 볼에 일부러 침이 튀기도록 말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네 이뇨온! 가미 황족 몸에 손울 대다니이!”
나는 민티아가 도망치지 못하게 두 손으로 귓바퀴와 머리끄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민티아가 제 귀를 부여잡고 내 손등을 할퀴며 매달려 울기 시작했다.
“으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그때 민티아의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듣고 유모와 잔느가 달려왔다.
“저, 저하아아아아아! 무슨 짓입니까아아아!”
유모가 내게 달려들더니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
“악!”
그 매서운 손속에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손에 쥐고 있던 민티아의 귓바퀴를 놓쳐 버렸다. 쳇, 아예 쥐어뜯어 버릴 수 있었는데…….
유모가 높은음으로 비명처럼 외쳤다.
“이이이이,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랍니까! 머리끄덩이 싸움이라니요!”
아니, 유모는 왜 내 편 안 들어!
“쟤가 먼저 때려써!”
난 정당방위라고!
“그래도 다른 영애의 귓불을 잡다니요오오오! 제가 폭력은 안 된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볼은 왜 이렇게 되셨습니까! 손이랑 무릎은 왜 다 까졌고요?”
유모가 나를 혼내고 타이르며 몸 구석구석을 살피는 동안 수석 시녀 잔느가 민티아의 시녀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져 물었다.
“그, 그것이…… 조금 오해가 있어서……. 아가씨께서도 절대로 저하를 다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슨 오해?”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는 폐하와 저하께서 하실 일이지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네. 오해가 무엇이든 황궁에서 소란을 피웠고 의도가 어쨌든 황족을 해친 것은 사실. 이번 일은 황제 폐하께 고할 것이니 아가씨를 데리고 가게.”
민티아는 제 시녀의 품에 안겨 황후궁 방향으로 줄행랑을 치면서도 목이 터지게 악을 썼다.
“할아버지한테 이를 거야! 고모한테 다 이를 거야아아아! 으애애애애애애앵!”
***
모처럼의 나들이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나는 유모의 품에 안겨 내 방으로 돌아왔다.
“어휴. 이걸 어쩜 좋아요. 팔꿈치도 까졌네. 그런데도 울지도 않으시고……. 어휴! 제가 다 속이 터져서……!”
유모가 눈물을 글썽였다. 보는 눈만 없었다면 온갖 듣도 보도 못했던 욕설을 걸쭉하게 뽑아낼 것 같은 분위기로 그녀가 이를 갈았다.
나는 유모가 자리에 앉혀 주는 대로 잠자코 앉았다. 그러자 시녀들이 너덜너덜해진 옷을 벗겨 주었다.
그들은 피부가 까져서 흙과 피가 진득하게 뒤섞여 있는 내 무릎과 허벅지를 보곤 비명을 질렀다.
“어머나, 세상에! 이건 황제 폐하께 아뢰어 체리에 후작가에 정식으로 항의를 해야 해요!”
“맞아요! 이건 그저 아기들끼리의 다툼이라기엔 너무 도가 지나쳐요. 어쩜 이렇게 끔찍할 수가 있죠?”
그들이 하도 입에서 불을 토할 기세로 쫑알대는 바람에 정작 당사자인 나는 찍소리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안해졌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니 나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느껴져서 그저 잠자코 그들의 손길을 받았다.
흐르는 맑은 물로 흙을 씻어 낸 다음 값비싼 포션을 깨끗한 헝겊에 흠뻑 묻혀 온몸을 구석구석 닦았다. 그러던 중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우리 애기! 누가 우리 애기를! 누가아아아아아아!”
눈에 핏발이 시뻘겋게 선 할바마마였다. 그 뒤를 시종장 마론 백작이 뒤따랐다.
“아이고. 폐하! 고정하십시오! 그리고 곧 대전에서 회의가…….”
“지금 대전 회의가 문제인가? 누구냐? 어떤 육시할 것이 내 새끼를 이리 피떡으로 만들었어!”
피떡까지는 아닌데……. 내 몰골이 그렇게 엉망인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할바마마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할바마마가 서슬 퍼렇게 으르렁거리며 잔느를 닦달했다.
“그것이…… 민티아 아가씨께서…….”
“민티아 체리에? 황후 조카? 걔가 왜?”
일순 할바마마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시녀들이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자 할바마마가 버럭 성을 내셨다.
“걔가 왜 우리 멜리를 이 꼴로 만들었냐니까!”
사건의 시작부터 자리에 있지 않아 전말을 다 알지는 못한 시녀들이 대답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그렇담 내가 얘기해 줘야지. 애초에 나도 할바마마 빽을 믿고 마주 귓방망이를 날려 준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더욱 과장된 목소리로 마구마구 일러바쳤다.
“인사 안 했다고 막 여기 여기 때리고 잡아땅겼다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울기 직전의 표정까지 짓자 할바마마의 이성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민티아의 입궁을 사교계에 데뷔할 때까지 금지해. 지금 황후에게 가서 그리 전하고 애는 퇴궐시켜.”
그 순간 나는 이 사건이 무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 미래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회귀 전의 나는 오늘 민티아와 따귀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정원에 나가자고 한 것도 내가 의식적으로 주도한 일이었고, 숨바꼭질을 하자고 했던 것도, 하필 그 자리에 숨은 것도, 지금의 내가 단순히 뛰기가 싫어서 의식적으로 벌인 짓이었다.
그렇다면 어리다는 핑계로 손 놓고 있을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무언가를 바꾸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면 움직여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내 부모님의 마차 사고가 단순히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걸 할바마마에게 알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나는 그 사건이 숙부의 짓이라는 것을 냉궁에서 알게 되었다. 사실 숙부의 짓이라는 것만 알았지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사고로 위장했는지 그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있긴 한 건지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할바마마에게 ‘사건’의 냄새를 맡게 하는 데만 성공한다면…….
갑자기 피가 들끓었다. 하루빨리 복수하고 싶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부족했다. 하다못해 황궁의 기록실이라도 출입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심호흡을 했다.
“후우-.”
아니, 과욕을 부리지 말자. 그보다 오늘처럼 민티아를 골로 보내 버리기만 해도 황후에게는 타격이 크다. 민티아는 사교계에서 황후의 눈과 귀, 입과 손발이 되어 줄 것인데 그것을 아예 싹부터 잘라 버렸다.
우와, 개이득!
물론 지금은 민티아가 아직 어려 그 역할을 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차근차근 황후가 직접 교육하면 될 일이었다.
지난 삶에서도 민티아는 원체 황궁에 자주 드나들었다. 황후에게는 사교계에 내세울 대리인이 필요했고 황녀가 없는 그녀에게 선택지는 조카인 민티아였으니까.
민티아의 아비이자 후작가의 후계자인 황후의 남동생 역시 데뷔도 치르지 않은 제 딸이 황궁에 드나드는 것을 다른 귀족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이기 위해서 부러 황후에게 자주 보내곤 했다. 서로의 이해타산이 잘도 들어맞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일은 미래에 황후의 사교계 세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터였다.
크으! 당장 가서 황후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꼴을 구경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나. 이 몸은 세 살짜리라서 유모가 데리고 다니는 대로 하루 일정에 맞추어 움직이기만 할 뿐인 데다가 내가 간다고 고집을 부리려 해도 명분이 없다.
대신에 평소보다 힘을 잔뜩 준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하고 할바마마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아까는 뛰어놀기 편하도록 장식도 거의 달리지 않은 부드럽고 단출한 옷을 입었다면 지금은 그냥 화려했다. 쨍한 붉은색 드레스에 오직 황족 직계에만 허락된 티아라 장식을 머리에 얹었다.
“이 할애비가 옆에서 지켜 주마. 나가서 다시 놀자.”
그리고 마론 백작은 절규했다.
“대전 회의 있다고요, 폐하아아아!”
***
키옌 황후는 지금 기분이 몹시 나빴다.
아침에 친정 조카가 찾아왔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볼은 어디 긁힌 생채기에 눈은 어찌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 있었다.
민티아의 시녀에게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민티아가 황후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흐어어어엉! 고모오오! 으애애애애애앵! 나쁜 계집애! 맞았어요! 엉엉! 한 주먹도 안 되는 게!”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입궁하는 중에 정원에서 자신보다 작은 여자애를 만났는데 제 볼을 양손으로 할퀴고 귓불을 쥐어뜯었단다. 제가 어쩌다 맞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그럴 리는 없었을 테니 분명 저도 그 전에 무언가를 하긴 했을 텐데 저는 끝까지 가만히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맞았단다.
다섯 살이라는 게 그러했다. 제가 잘못한 게 뭔지 알아서 제 잘못은 쏙 빼놓고 절대로 말하지 않지만, 거짓말은 또 천연덕스럽게 할 재간이 못 되어서 무얼 말해도 티가 난다.
어차피 어린애한테 자세하고 조리 있는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던지라 황후는 민티아의 시녀를 대신 다그쳤다.
“누가 이리 만들었느냐?”
시녀가 행여라도 황후에게 혼이 날세라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황급히 대답했다.
“황손께서 그리했습니다.”
키옌은 그 대답을 듣고 몸이 휘청 기울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필이면 시비가 붙어도 황족이라니! 그것도 황제의 금지옥엽, 몹시도 아픈 손가락인 황손녀라니!
불길한 직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