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중 일부는 고개를 들자마자 할바마마가 품에 안고 있는 나를 향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할바마마가 길쭉한 대전을 쭉 지나 용상을 향해 걷는 동안 저들끼리 몰래 쑥덕댔다.
“저하께서…….”
“어째서……?”
그 숙덕거림은 할바마마가 용상에 앉자마자 그쳤다.
할바마마의 무릎 위에 앉아 내려다본 대전은 끝없이 길고 넓었다.
곧 할바마마께서 입을 열었다.
“내 오늘 중대한 결정을 하려 하네.”
모두가 오늘 황제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볼테르가 그렇게 들떠서 소문을 다 내고 다녔는데 모를 리 없지. 황후도 이미 제 친정을 통해서 아군을 만들었을 것이고.
“황태자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 말투가 마치 ‘네’라고 해. 답은 정해져 있어. 틀린 답을 이야기한다면 목이 날아갈 것이야. 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자 귀족들이 용상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폐하!”
“그래서 말인데 내 황태자 위에 누굴 앉힐지 참으로 고민이란 말이야.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미 답은 고모님으로 정해져 있는 것을 할바마마는 굳이 물었다.
그때 중간 즈음에서 누군가 말했다.
“어차피 이 황실에 황자는 볼테르 황자 전하뿐 아닙니까.”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나는 살기를 느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할바마마의 턱선, 그 위에서 내려오는 눈빛. 거기서 난 집착과 광기를 보았다.
‘네가 감히 내 생각과 전혀 반대인 의견을 맨 처음으로 내놓아? 넌 이제 죽었어.’
“황실의 적통은 에오넬이지.”
황제의 말에 귀족들이 술렁였다.
“하오나 에오넬 전하는 황자가 아니라 황녀…….”
“그래서?”
“폐하!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황녀가 황제가 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래? 그럼 우리 에오넬이 최초네? 이거 역사에 길이길이 남겠구먼. 껄껄껄!”
황제가 즐겁다는 듯이 웃어 젖히자 현 황후 키옌의 친정아버지이자 볼테르의 외할아버지인 체리에 후작이 대놓고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대전이 술렁술렁 시끄러워졌다. 그때 하필이면 이 조용한 가운데에서 누구의 목소린지 모를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왜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한참 시끄럽다가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조용해지는 때. 민간에서는 ‘요정이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질렀나 보다’라고 표현하는 때.
지금이 딱 그랬다.
그 바람에 원래라면 웅성대는 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을 것이 뻔했을 크기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그렇다고 황위에 석녀를 앉혀?”
귀족들이 재빨리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건 무조건 걸리면 죽는다. 모두가 자신은 아니라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주위를 조심스레 두리번거렸다.
“누구야? 어느 놈이야! 석녀? 이런 발칙한 놈을 보았나! 어떤 우라질 놈이야!”
할바마마의 손가락이 대전 한복판을 향했다.
할바마마가 벌떡 일어났다. 얼결에 그 옆에 선 할바마마의 시종 품으로 떠넘겨진 나는 멀뚱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할바마마의 목에 핏대가 섰다.
“네 이노오오옴! 감히 황족을 모욕한 저놈을 당장 끌어내라!”
“요,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폐하아아아!”
그가 끌려 나가는 것을 확인한 할바마마가 씩씩거리며 앉자 옆에 있던 시종이 냉큼 할바마마 품에 다시 나를 안겼다. 어쨌든 나는 오늘도 할바마마 손에서 계속 둥개둥개를 당하고 있다.
***
몇 날 며칠 이어진 대전 회의 때문에 나는 매일 같은 시각 할바마마를 따라 대전 회의에 들었다.
그리고 할바마마는 기어이 고모님한테서 어차피 기억도 못 할 어린애 데리고 매일 대전에 들어가서 도대체 뭘 가르치려 하냐며 잔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나에게 자유를 주었다.
대전 회의의 레퍼토리는 매일 똑같아서 몹시도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할바마마의 답정너식 회의 진행. 그리고 그런 할바마마를 대신해서 조목조목 대변해 주는 크로이젠 공작. 할바마마의 마음을 돌리려 용을 쓰는 체리에 후작파의 귀족들. 이게 무한 반복이다.
어쨌든 황태자 자리에는 에오넬 고모님이 앉게 될 것이고 어린 나는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나설 이유가 없고. 가만히만 있으면 미래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나는 어린애답게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크면 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렇게 띵가띵가 놀고먹는 생활도 몇 년 후면 이런저런 교양 수업을 시작하면서 끝이 날 텐데. 그렇다면 고모님이 황제가 될 때까지는 지난 생에서 진짜로 못다 누린 황족 라이프를 열심히 즐기고 말 테다!
그런고로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해서 황궁 남쪽 대정원에서 나들이하기로 마음먹었다.
“유모. 나갈래. 어어- 가자.”
“그럴까요? 날도 따뜻해졌는데 맛있는 거 들고 어어어- 갈까요?”
나는 벌떡 일어나 서둘러 품이 넓고 활동성 좋은 나들이옷을 꿰어 입고 방을 나섰다. 내 뒤로 유모와 잔느, 시녀들이 우르르 따라 나왔다.
나는 아장아장 뛰어서 밖으로 나가 내 궁의 작은 정원을 가로지르고 몇 개의 문과 화원을 지나 드디어 황궁의 대정원에 도착했다.
갓 나온 어린잎이 새파란 나무와 화사한 봄꽃이 막 피어나기 시작하면서 정원은 몹시 싱그러웠다. 그 중간중간에는 비밀의 화원처럼 꾸민 티 테이블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 멀리 제1남문이 보였다. 그곳을 통해 이른 아침부터 속속 입궁하는 귀족들, 관리들도 보였다.
분위기도 전망도 딱이군.
나는 볕이 잘 드는 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광합성을 하면서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유모가 해맑게 외쳤다.
“자! 어린아이는 재밌게 뛰어야 키가 쑥쑥 큰답니다.”
“…….”
어…… 그러니까 내 정신연령은 이미 열여덟 살……. 까르르 뛰면서 땀 뻘뻘 흘리고 헉헉거리는 거 싫어! 내가 상상했던 나들이는 이런 게 아니었어!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유모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쪼그려 앉아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무슨 놀이를 할까요? 술래잡기할까요? 우리 황손녀님 잡아라- 할까요?”
그, 그런 거 싫어! 도리도리도리!
“흠, 그럼 반대로 제가 도망갈까요?”
그런 뜻이 아니야! 도망가는 것이든 잡는 것이든 뛰는 게 질색이라고!
하지만 이미 유모의 눈빛에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를 뛰게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아아, 놀고먹고 잠만 자는 아기 라이프는 개뿔! 인생 정말 너무 힘들다.
유모가 늘 육아는 체력이라고 말했는데 유모의 지금 표정을 보아하니 어쩐지 그 체력이란 거…… 내가 나를 육아하기 위해서 길러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관자놀이에 힘을 팍 주고 머리를 팽글팽글 굴리기 시작했다.
그래!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언뜻 보기에 활동적으로 보이는 놀이를 찾자! 유모도 만족하고 나도 편할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만이 내가 살길이나니.
그때 내 머리를 파밧! 하고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꼭꼭 숨어라!”
숨바꼭질이었다.
사실 남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나 같은 어린애가 숨어 봐야 얼마나 숨겠는가. 그러니 유모는 아마 적당히 헤매는 척하다가 나를 찾았다며 또 사방팔방 뛰어 숨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나는 그렇게 쉽게 들켜 줄 생각이 없다.
크으! 역시 난 똑똑해!
곧 내가 흔든 낚싯대에 유모가 걸려들었다.
“숨바꼭질할까요?”
유모가 나를 우쭈쭈- 어르며 물었다. 나는 유모의 마음이 변할세라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숨는다아! 나 진짜 잘 숨는다아!”
나는 배시시 웃으며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갔다. 유모가 뒤돌아 크게 숫자를 세었고 그러는 동안 잔느의 눈동자가 나를 좇았다. 그런 잔느와 시녀들을 향해 짐짓 매서운 말투로 일갈을 날리며 나는 총총총 뛰었다.
“다 따라오지 마!”
나는 잔느가 걱정하지 않을 정도, 하지만 유모가 찾기에는 꽤 힘들 것 같은 거리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티 테이블이 가운데 놓여 있는 테라스 안으로 들어갔다.
유모와 잔느는 아마 어린애가 기껏해야 테이블보로 가려진 테이블 밑에 숨었다고 생각할 거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테라스 입구 반대편의 꽃밭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나들이옷이 흙과 나뭇잎으로 더러워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꽃덤불을 헤집고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다시 탁 트인 반대편 정원이 나왔다.
입궁하는 이들이 무척 잘 보이는 곳이었다. 여기에 적당히 누워서 나른한 오전을 즐기다가 유모와 시녀들이 걱정하기 직전에 나가야겠다.
그렇게 유모와 시녀들의 사각지대 즈음에 자리를 잡고 따스한 햇볕을 느끼고 있을 즈음 무언가가 내 발목을 와락 움켜쥐었다.
아니, 이런! 벌써 걸렸나?
“으악! 유, 유모오오오!”
나는 몸을 벌컥 뒤집어 손아귀에 잔디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내 발목을 잡은 손이 어쩐지 평소 느끼던 유모의 손과 달랐다. 훨씬 더 우악스러웠고 거침이 없었다.
내가 버둥거리자 그 손이 나를 꽃밭 밖으로 주르륵- 끄집어냈다. 치맛자락이 벌렁 뒤집힌 채로 땅바닥에 엎드려 질질 끌려갔다.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게다가 내가 황제 폐하의, 우리 할바마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황태손인데 이 무슨!
“우아아아악!”
내가 비명을 지르는데 갑자기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가씨! 이, 이러시면 안 돼요! 이러시면…….”
“얘가 아까 나 쳐다봤는데 인사 안 했어!”
어느덧 길바닥까지 끌려 나온 나는 엎어진 상태로 멍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서 풀잎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너무 황당하니까 아직도 내가 당한 일이 실감이 나질 않는다.
나는 주춤주춤 일어났다. 엉망이 된 내 몰골이 아마 말이 아닐 거다. 유모와 시녀들이 깜짝 놀라겠지.
그냥 콱 울어 버릴까? 그럼 할바마마가 가만있지 않을 거다. 내가 어린애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이 나이 아니면 언제 다시 울음으로 남을 협박을 해보랴!
하지만 하도 어이가 없으니 그런 가짜울음도 나지 않는다.
나는 뒤를 돌아 그 무례한 작자의 상판을 확인했다. 그 순간 나는 숨이 턱 멎을 뻔했다.
곱슬곱슬하고 화려한 스칼렛 레드 머리카락과 눈동자. 체리에 후작가의 상징과도 같은 색깔.
난 얘가 누군지 안다. 민티아 드 체리에.
훗날 제 고모인 키옌 황후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곤 키옌 황후의 대리인으로서 사교계를 평정할 인물이었다. 그녀는 민티아라는 제 이름보다 후작 영애라고 더 많이 불렸다.
왜냐하면 가문에 대한 그녀의 자존심이 몹시 대단하기도 했고 그녀를 이길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귀족이 또래 영애 중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국의 공작가를 전부 통틀어도 공녀는 없었으니 자연스레 그 자리를 그녀가 대신했다. 물론 황후의 조카 딸이라는 명분도 컸고.
어쨌거나 나보다 두 살 위인 그녀는 올해로 다섯 살. 회귀 전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그녀가 훨씬 커 보였다. 세 살, 다섯 살이라는 차이가 새삼 이렇게 크구나 싶었다.
곧 내 눈앞의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양쪽 허리에 손을 올리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대뜸 소리를 질렀다.
“네 이년!”
그것참 소리 한번 앙칼지구나.
그런 민티아의 뒤에 있던 시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가씨! 이분이 누군 줄 알고 대뜸…….”
뒤에서 발을 동동거리는 시녀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민티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흥! 인사하거라. 나는 체리에 후작가의 민티아 체리에다! 황후 폐하의…….”
민티아가 말끝을 흐리자 시녀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해주었다.
“조카요. 아가씨.”
그러면서도 발을 동동 구르며 주변을 살폈다. 내가 어느 가문의 영애인지, 내 시녀들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찾는 모양이었다.
“응! 맞아. 난 황후 폐하의 조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