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 * *
이블린의 독서 모임은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모티머 백작가의 린지가 이블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주장한 탓이다.
“그 여자는 정말 미쳤어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나와 내 친구들을 가둬 놓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죠. 난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토비아스에게 졌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낀 린지는 이런 상황을 만든 이블린을 거세게 공격했다.
여기에 린지를 따르는 남부 귀족들이 가세하면서 이블린은 청년들을 감금하고 학대한 마녀가 되었다.
하지만 축하 만찬에 참석했던 상위 25명은 적극적으로 이블린을 옹호하고 나섰다.
"생명의 위협이요? 농담이겠죠. 우린 신나는 모험을 즐겼습니다. 함정도 있었지만 아주 귀여운 장난 같은 거였죠. 지금 다시 하라고 해도 기꺼이 뛰어들 겁니다."
사람의 기억은 본래 시간이 갈수록 미화되기 마련이었다. 함정 속에서 굴러다닐 때는 이블린을 욕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이제는 다시없는 즐거운 모험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이블린은 아주 교묘하게 그들을 띄워 주었다.
가장 멋진 장면을 편집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쏟아지는 박수와 함께 모험왕의 배지를 선사했다.
독서 모임의 목적이 참가자를 포장해 주는 것이라면, 이블린은 그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였다.
“린지, 그 친구가 워낙 겁이 많아서요. 그에겐 별것 아닌 장난도 생명의 위협으로 느껴졌을 겁니다.”
여기에 채스터 백작의 아들인 토비아스가 대놓고 린지를 저격하면서 논란은 더욱 크게 번졌다.
양측의 말이 다르니 사람들은 누구의 말이 맞는지 궁금해 했다. 바로 그때, 각 귀족 가문에 곱게 포장된 영상구가 도착했다.
영상 속에선 상위 5위권의 청년들이 즐겁게 모험을 줄기고 있었다. 그들은 재치 있고 멋진 모습으로 함정을 돌파했다. 적당한 편집이 후추처럼 뿌려져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닌데?"
"처음에야 놀랐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을 텐데요.”
원래 당사자와 관람자의 입장은 다른 법이었다.
사람들은 린지 모티머가 별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떠는 겁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린지를 구해 준 것은 이블린이었다. 그녀는 러셀 백작 부인을 통해 슬금슬금 떡밥을 뿌렸다.
“제가 얼핏 들었는데요, 모티머 백작의 아들이 속한 조가 6등을 했나 봐요. 그것도 몇 초 차이로 아깝게 졌다더군요. 그게 너무 분해서 헛소문을 퍼트린 거래요.”
“어머, 세상에. 그럼 일부러 그런 거예요?"
“어쩐지. 좀 이상하다고 했어요. 함정이라고 해도 기껏 후추 폭탄 같은 거던데 , 생명의 위협이라니.”
린지 모티머가 겁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언론 플레이를 하다가 들켰다는 거였다.
겁쟁이나 플레이어나 둘 다 이미지는 별로지만, 후자는 귀족들 사이에 일상적인 것이었다. 다들 하는 것이니만큼 흠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승부욕이 강한 열정적인 모습으로 미화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모티머 백작은 냉큼 이블린이 뿌린 떡밥을 물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이블린에게 아들의 잘못을 사과하는 편지를 보냈다.
[제 어리석은 아들이 승부욕이 넘쳐 이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공작 부인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깊게 사과드립니다.]
이블린은 여기에 아주 상냥한 답장을 보내 모티머 백작을 감동시켰다. 겁쟁이라는 소문에 시달리던 린지 모티머 역시 이블린의 너그러움에 감사했다.
린지 모티머가 사실 9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토비아스도 이블린을 위해 입을 다물었다.
논란이 마무리되자 사람들은 다른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바로 영상속에 나오는 방탈출 게임이었다.
처음 보는 새로운 장르에 흥미를 보이는 사람도 있고, 편집된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프리지어 궁에는 매일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싶다는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땔감으로 써도 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블린에게 따로 문의를 넣는 극성 부모들도 있었다. 우리 아들도 독서 모임에 참여한 것으로 아는 데 왜 영상에는 나오지 않느냐는 거였다.
이블린은 그들에게 새로운 영상구를 보내 주었다.
악마의 편집이 교묘하게 들어간 영상은 ‘아드님은 열심히 노력하여 우승할 수 있었으나, 바보 같은 동료들에게 발목을 잡혔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자 귀족 가문 사이의 굳은 결속에 가느다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또한 왕의 입맛에 맞춘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영상의 원본을 가진 왕은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요즘 왕의 취미는 함정에 빠진 귀족 청년들이 병아리처럼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돌려보는 거였다.
시녀장인 피오나는 점점 품위 없어지는 왕의 취미 생활에 한숨을 쉬었다.
“폐하, 신하의 불행을 그렇게 즐기시는 것은 군주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웃긴걸? 이걸 나만 본다는 사실이 퍽 안타까울 정도야.”
왕은 연신 히죽거리며 영상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피오나는 영상구 속에서 울면서 도망 다니는 청년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블린이 청년들을 저택에 가둬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너무 놀라서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하지만 이블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논란을 짓밟아 버렸다. 그것도 영상의 녹음과 편집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기술로 말이다.
이블린은 이번 독서 모임을 위해 마탑을 동원했다.
이블린에게 여러 차례 죄를 지은 마탑은 그녀의 명령에 멍멍 데굴데굴 꿀꿀 짖어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블린은 그들에게 방탈출 사업 계획서를 제시하며 당근부터 먹였고. 그녀가 제시하는 황금빛 미래에 완전히 눈이 돌아간 황탑주는 수백 명의 견습 마법사들을 동원해서 영상 편집에 매달렸다.
결과는 놀라웠다.
단 한 번의 모임으로 이블린은 수십 명의 약점을 잡을 수 있었다.
편집된 영상을 본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욕설과 동료들에게 가한폭력이 감춰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웅으로 포장된 만큼 추락이 무섭다는 사실을 아는 그들은 이블린 앞에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블린은 그들을 조련해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었으며, 린지 모티머라는 대영주의 아들까지 수렁에 빠트렸다가 다시 건져 냈다.
너무나도 귀족적이면서 깔끔한 솜씨였다.
“폐하, 공작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피오나의 말에 낄낄거리던 왕이 뚝 웃음을 멈췄다. 얼마 전에 세스가 던지고 간 선전 포고가 떠오른 것이다.
며칠 전, 느닷없이 나타난 세스는 자신의 재혼 상대에 대한 조건을 내 걸었다.
프리지어 궁에 거주 중인 그리핀들의 인정을 받을 것.
바실리스크 까미와 흑룡의 인정을 받을 것.
정령수와 그 수호자인 코크 곰의 인정을 받을 것.
성검 주크와 성화 성냥의 인정을 받을 것.
복실이와 코코에게 엄마로 인정을 받을 것.
“이 조건만 충족된다면 어떤 여자라도 상관없이 결혼하겠습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에 분노한 왕이 들고 있던 옥새를 그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야, 이 자식아! 평생 결혼하지 마!"
가볍게 옥새를 잡은 세스가 그것을 다시 왕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말을 이었다.
“제 가족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여자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넌 진짜 양심이 있느냐?!"
“폐하, 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입니다. 평범한 여자는 그들 중 하나의 분노만 사도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스산한 말을 남긴 세스는 할 말을 다했다는 것처럼 떠나버렸다.
그때를 떠올린 왕은 다시 뒷머리를 잡고 끙끙거렸다.
“빌어먹을 자식, 내가 그렇게 경고했는데.”
"공작이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피오나는 내심 왕이 그만 고집을 부리고 이블린을 진짜 공작 부인으로 인정해 주길 원했다.
왕이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주라고? 나는 세스가 아니면 믿을 수 없다. 나머지는 다 사갈 같은 놈들이야. 나라를 말아먹고도 남지.”
"······."
“그리고 다음 왕이 세스와 이블린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은가? 둘이 가진 힘과 세력은 왕위를 위협하고도 남을 정도다. 반드시 꺾으려고 들 거야.”
왕도 마음 같아선 세스와 이블린 사이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이블린의 출신 때문에 불가능한일이었다.
“너무 답답해서 다른 나라 하나를 쓸어버리고 이블린을 거기 공주로 조작할까 생각한 적도 있다. 차라리 내가 이블린을 12살에 낳았다고 우길까?"
“그리되면 근친혼이 문제가 될 겁니다.”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치는 피오나 때문에 왕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완벽한 내 새끼에게 왜 출신이라는 짐이 있단 말인가.
“어디서 좋은 신분 하나 뚝 안 떨어지나.”
* * *
신성 왕국의 차기 성녀, 루시아는 마른침을 꼴딱꼴딱 삼키고 있었다.
‘세상에, 대지신남 맙소사!'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원고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활자 속의 남녀가 벌이는 짓에 눈이 크게 떠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망측해! 너무 망측해! 신성 모독적이야!'
하지만 도저히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완전히 원고에 빠져든 그녀를 보고 마리아 프림로즈가 혀를 찼다.
"루시아 님, 그거 지금 분류를 하라고 드린 거거든요.”
“아, 아앗! 죄송합니다!"
얼굴이 벌게진 루시아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를 보며 히죽 웃은 이블린이 그녀를 놀렸다.
"루시아 님이 3분 이상 읽고 계시면 순애, 바로 집어 던지면 25금으로 분류하죠."
“그럼 대부분이 순애가 되잖아.”
카밀라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들도 처음엔 적나라 한 소설 내용에 놀랐지만, 이젠 익숙해져서 웬만한 것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원고를 집어 던질 정도로 놀라는 것은 루시아뿐이었다. 하도 그러니 좀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눈 밑이 시커메진 앤이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조용히 좀 해 주실래요? 그림에 집중이 안 돼요.”
바쁜 이블린 대신 그림 원고를 맡은 그녀는 과중한 부담과 스케줄로 예민해져 있었다.
“앗, 안 돼! 앤 작가님이 집중하실 수 있도록 다들 조용히 합시다.”
이블린의 너스레에 혀를 찬 앤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레스에 붙은 레이스를 한 올, 한 올 그리는 손끝이 섬세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 여자들을 공략하기 위한 두 번째 독서 모임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