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 *
이블린의 사교계 데뷔는 무척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들 엘마이어의 새로운 공작 부인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겠다.
하지만 그것이 이블린을 자신들의 세계에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눈만 마주쳤다 하면 이블린의 만행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 끔찍한 무도회에서 무려 9쌍이나 파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9쌍이나요?"
아버님 산성이 만든 업적이었다.
니콜라스 보어가 파혼당하는 것을 본 어떤 이들은 이것을 못마땅한 사윗감을 치워 버릴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진작 파혼하고 싶었으나 딸이 비방을 들을 까 봐 참고 참았던 아버지들이었다.
그들은 반강제로 딸의 약혼자를 아버님 산성 앞에 끌고 가서 내던졌고, 처참한 평가가 나오면 재빨리 파혼을 선언했다.
그렇게 아홉 명의 약혼자들 아버님 산성을 들이박고 사라졌다.
“정말 너무하지 않아요? 다들 건실한 청년들인데, 단지 공작 부인에게 춤을 신청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다니.”
물론 파혼당한 청년들이 전부 집안 망신이나 시키는 쓰레기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이블린을 헐뜯기 위해 모른 척할 뿐이었다.
“그런 주관적인 평가를 믿는 사람들이 어리석을 뿐이죠. 악감정을 가지고 헐뜯는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사교계에 데뷔한 어리고 순진한 아가씨들을 제멋대로 헐뜯던 사람들은 갑자기 이성적인 척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날까 봐 걱정입니다.”
"요즘 안 그래도 철없는 아가씨들이 아버지와 친척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교계에 데뷔하고 싶어 한다더군요.”
"허어, 참나. 세상이 어찌 되려고!"
"공작 부인이 안 좋은 선례를 만들었어요.”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블린을 깔아뭉갤 생각뿐이었던 사람들은 그 야망이 좌절된 것에 분개하고 있었다.
"보석이며 옷도 어찌나 사치스러운지.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르겠더군요.”
이블린의 아름다운 장신구와 화려한 드레스를 탐내던 사람이 속내를 숨긴 채 슬쩍 떠보는 말을 했다. 혹시라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제가 얼핏 들었는데, 장신구는 전부 물의 선전에서 나온 보물이래요. 비단은 요정족이 짠 거고요.”
“세상에. 공작가의 재산을 들이부었겠어요.”
그들은 이블린이 사치스럽다고 욕하면서도 당장 물의 신전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블린은 이미 그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 버릴 상품들을 물의 신전에 대기시켜 둔 채였다.
그래, 이들이 만든 요정 비단 역시 출처가 세탁된 채 로 시장에 나갈 날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ppl에 당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이들은 연신 투덜거렸다.
“그 여자는 대체 어디서 그런 것들을 가져오는지 모르겠네요. 답례 선물까지 이상했죠?"
무도회의 참석자들은 돌아갈 때 작은 선물을 받았다. 참석해 준 것에 대한 답례였다.
원래는 여성에겐 정교한 부채를, 남성에겐 수놓은 장갑을 주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큰돈을 쓰기 싫었던 이블린은 영 생뚱맞은 선물을 준비했다. 바로 초콜릿이었다.
리본으로 포장된 작은 상자를 열면 앙증맞은 모양의 초콜릿 4개가 들어 있었다.
지금껏 쓰디쓴 카카오빈 가루를 뜨거운 물에 녹여 설탕과 후추를 넣고 마시던 사람들은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고형 초콜릿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체면도 잊고 선물을 나눠 주는 시종의 손에서 강제로 몇 상자를 더 뺏어 올 정도였다.
“제 주방장은 대체 어떻게 만든 것인지도 감을 못 잡더군요. 그래도 꽤 유능한 자라고 생각했는데 갈아치워야 할 것 같아요.
”
주방장이 알아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레시피를 아는 이블린도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만들 수 없었으니.
초콜릿이 지금 수준으로 완성된 것은 순전히 그녀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던 백탑주의 노가다 덕분이었다.
그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소가 돌리는 맷돌을 이용해서 초콜릿의 재료를 섞는 데 성공했고, 수많은 실험 끝에 초콜릿을 녹이고 매끄럽게 하는 온도를 알아냈다.
그리고 새로운 레시피는 훌륭하게 이블린의 비밀 무기가 되었다.
“정말 못마땅한 여자지만 초대한다면 가지 않을 수 가 없겠어요.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요.”
“그, 그렇죠. 감시하지 않으면 사교계를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갈지도 모르잖아요.”
사람들은 이블린을 욕하면서도 그녀가 주최하는 사교모임에 참석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었다.
"공작 부인이니 살롱은 당연히 열겠죠?"
"간단한 티 파티나 독서 모임으로 시작할 수도 있죠.“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블린은 그들의 뜻대로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 * *
“당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프림로즈의 후계자, 마리아 프림로즈는 있는 대로 성질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동료들의 환영을 받으며 의상부 안으로 들어온 이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블 번으로 말아 올린 분홍색 머리가 갸웃거리며 흔들렸다.
악명 높은 공작 부인이라는 소문을 믿기 힘들 정도로 귀여운 동작이었다.
“마리아? 제가 뭔가 실수했어요?"
"왕실 무도회에서 데뷔한다는 걸 일주일 전에 알리면 어쩌자는 거예요! 뭔가 대책을 세울 틈도 없었다고요!”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마리야간 할 수 있는 것은 사 교계에 데뷔한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이블린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이블린이 멋지게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진 불안과 초조함에 시달려야 했다.
“미안해요, 마리아. 그런데 저도 급하게 무도회에 참가하게 돼서요. 더 빨리 알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사교계 데뷔를 왜 그렇게 급하게 결정하냐고! 열이 올라 씩씩거리는 마리아가 안쓰러웠는지 다이애나가 대신 설명에 나섰다.
“이블린, 원래는 우리가 먼저 사교계에 나가서 인맥을 쌓은 다음, 이블린이 데뷔했을 때 공격받지 않도록 보호해야 해요. 이블린이 우리의 리더니까요.”
"어어?“
처음 듣는 말에 이블린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블린이 그렇게 혼자서 사교계로 돌진할 줄 몰라서 모두 당황했어요. 그렇다고 데뷔하지 않은 몸으로 무도회에 참석할 수도 없으니까, 아무 도움이 되지 못 해서 슬펐어요.”
빨강 머리 카밀라가 입을 삐쭉거리며 덧붙였다.
“혼자서 잘할 수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우리 도움이 없어도 날아다녔잖아?"
"카밀라, 자꾸 못된 말 하면 초콜릿 안 준다.”
"뭐, 뭐야! 나만 안 주는 거 싫어!"
한마디로 카밀라를 제압한 이블린이 마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 걱정했어요?"
"······.“
대답하기 싫다는 듯 마리아가 팩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블린이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동작을 했다.
"진짜 미안해요. 제가 사교계에 대해 몰라서 그런 거지, 마리아와 다른 친구들을 무시한 건 아니에요.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요?"
그게 말이 되냐고 쏘아붙이려던 마리아는, 다음 순간 그럴 수도 있다고 납득했다. 이블린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교계를 진흙처럼 뭉개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과해요. 당신 때문에 모두 급하게 사교계에 데뷔하기로 했으니까.”
“어? 저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는데요? 한 번뿐인 소중한 행사잖아요?"
“그걸 아는 사람이······!"
”에이, 저는 다르죠. 전 폐하께서 ‘조만간 무도회를 열 테니 참석해라. 네 데뷔 무도회다.’ 이러셨거든요.”
마리아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기 위해서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이내 그녀는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
”폐하가 그렇게 억지를 부리신다고 해서 고분고분 따를 이유가 뭐가 있어요. 왜 그렇게 끌려 다녀요!"
"저야 뭐, 출신도 미천하고 별 볼 일 없는 공작 부인 이잖아요. 폐하께서 명령하시면 따라야죠.”
생글생글 웃으며 하는 말에 마리아는 괜히 울적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블린만큼 뛰어나면서 관대한 사람을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미천하다고 낮춰 말하는 것을 보니 자신까지 모욕당하는 기분이었다.
“시끄러워요. 뭐라고 해도 최대한 빨리 데뷔해서 당신이랑 같이 싸울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저도요! 벌써 데뷔 날짜도 정했는걸요. 이블린, 그날 꼭 참석해 줄 거죠?"
환하게 웃는 다이애나에 이어서 카밀라도 뽀로통하게 내뱉었다.
"흥, 나도 바로 데뷔할 거거든요. 당신이 사교계에서 1년 선배가 되는 걸 두고 볼 것 같아요?"
이어서 앤과 벨라도 수줍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이블린은 얼떨떨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인데 정말 고마워요. 친구들과 함께 싸운다니 아주 든든하네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마리아가 눈을 치켜떴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뭐죠? 데뷔를 성공적으로 끝냈다고 해서 안심하기는 일러요. 아직 당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요.”
“맞아. 특히 젊은 남자들에게 이미지 최악일걸? 파혼 사건 때문에 엄청 건방지다고, 두고 보자는 사람들 되게 많던데?"
카밀라가 불난 집에 부재 질 하듯 소곤거렸다. 이블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은 대충 대책이 있어서요. 제가고민인 것은 오히려 아가씨들 쪽이에요.”
“대책이 있다고? 진짜로?"
눈을 동그랗게 뜬 카밀라가 캐물었다. 이블린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독서 모임을 열려고요.”
"독서 모임? 농담이지? 모임 시작과 동시에 엄청나게 공격당할 텐데?"
독서 모임 같은 시시한 걸로는 친구들의 파혼으로 분노한 자들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이블린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프로토타입은 완성되었는데, 한번 보러 갈래요?"
“프로토타입? 완성?"
“제가 제일 처음 프리지어 궁을 보고 생각한 건데요, 마침 공작님께 남아도는 저택이 많아서요. 그걸 개조해서 만들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이블린을 따라나선 이들은 ‘용자 아메데오의 대모험'이라는 책 한 권과 함께 개조된 저택에 갇혔다.
책 속에 있는 단서에 따라 안에 있는 물건을 조합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가 없는, 아스트리아 최초의 방탈출 게임의 시작이었다.
마탑에서 심혈을 기울인 온갖 장치에 시달리던 마리아와 친구들은 한 시간 반 만에 저택을 탈출해서 이불 린의 멱살을 잡을 수 있었다.
"당신은 진짜 미쳤어!“
"저, 절대 아가씨들에겐 권하지 마세요. 사교계 공적이 될 거예요.”
“생각 없는 남자들이나 좋아할 거야, 이거.”
겸허한 태도로 친구들의 평기를 듣던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독서 모임 결과가 어떨 것 같아요?"
”······아주 끝내주겠네요.”
마리아의 투덜거림에 이블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