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악!”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남자가 움켜쥔 팔이 당장 부러질 것 같았다.
“무슨! 이블린을 놓아줘요!"
다이애나가 용감하게 덤벼들었지만 남자가 세게 밀쳐 바닥에 쓰러졌다.
“아버지! 뭐 하시는 거예요!"
그때 마리아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아니, 이 영감탱이가 마리아 아빠였어?
“닥쳐라! 일이 엉망이 되어 가는데도 가만히 손을 놓고 있다니! 이 우둔한 것!"
"······!"
마리아의 눈이 상처받은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안되겠어, 이 영감탱이를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나는 즉시 한 걸음을 옮겨 무게 중심을 바꾼 다음 잡힌 팔을 한 바퀴 돌려서 빼냈다. 전생에 배운 호신술이었다.
“마리아, 미안해요!"
사과와 동시에 폴짝 뛰어오른 나는 영감탱이에게 자손 파괴 킥을 날렸다. 이미 아들딸도 다 봤으니 나를 원 망하지 마라!
내 킥이 마치 빨려 들어가듯 목표에 꽂혔다.
퍽-!
“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른 영감탱이가 그대로 침몰했다.
카밀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카탈로그 바꾼 것도 당신이지?"
"약자를 공격하다니! 반성하세요!"
다이애나도 영감탱이를 찰싹찰싹 때리며 공격했다. 앤과 벨라까지 한 손 거들었다.
“이, 이것들이!"
자손이 파괴된 충격에서 벗어난 영감탱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를 공격하던 이들이 거칠게 밀려나는 순간이었다. 박이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영감탱이가 갑자기 풀썩 쓰러졌다.
고운 금발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마리아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두 손으로 들고 있던 의자를 옆으로 내던진 그녀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말했다.
"마무리는 확실하게 해요. 알겠어요?"
”······네.”
우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탱이가 살아 있는지 걱정이 된 나는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부활 주문을 작게 중얼거렸다.
"해, 해치웠나?"
맥을 짚어 보자 다행히 영감탱이는 잘 살아 있었다. 마리아가 패륜을 저지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니, 의자로 친 시점에서 이미 패륜인 건가.
“걱정하지 말아요. 누가 쳤는지 못 봤을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쓸데없이 냉정한 마리아였다. 나는 착잡한 눈으로 기절한 영감탱이를 바라봤다.
’이런 인간이 후작이란 말이지. 나라 꼴 참 잘 돌아간다.’
마리아가 적극적으로 나선 순간부터 이번 일이 후작과 관계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걸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지금쯤 저쪽도 난리 났겠군.’
북부를 괴롭힐 계획을 1부터 10까지 다 짜 놨는데 내가 대뜸 핀을 엎어 버린 상황이었다.
후작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나를 공격한 걸 보면 다른 이들도 다시 판을 뒤집으려고 수작을 부릴 것이다.
‘응 기회 안 줘 못 뒤집게 관짝에 못 박아 버릴 거야.'
나는 끙차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요즘은 어째 잠시도 쉴 틈이 없는 것 같았다.
"다이애나, 혹시 통신소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마도구 중에는 전화처럼 멀리 떨어진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물건이 있었다. 이걸 통신구라고 하는데. 통신구가 설치되어 있는 곳을 통신소라고 불렀다.
나는 오늘 이 문명의 이기를 한 번 써 볼 참이었다.
* * *
"왕실 보고 관리관이신 이블린 하인즈 님이시죠?"
"네!"
“신원 확인되셨습니다. 연결 이후는 통신료가 부과 됩니다. 10분에 1골드이니 사용하실 때 주의해 주세요.”
왠지 피곤에 찌든 안내인의 음성을 들으며 나는 얼른 통신구 앞에 앉았다.
통신구는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의 수정 구슬이었다. 이 정도 크기면 상대의 얼굴을 비추는 것도 가능 할 것 같은데, 음성만 전달된다니 좀 이상했다.
안내인이 설명해 준 대로 통신구를 조작하자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리지어 궁의 연락병인 휴버트입니다.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안녕하세요, 휴버트 씨. 저는 프리지어 궁의 별채에 사는 이블린 하인즈예요.”
-헉! 아가씨! 무슨 일이 생기셨습니까?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서요. 지금 총관 할아버지와 통화할 수 있을까요?"
세스는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믿을 것은 총관 할아버지밖에 없었다.
-지금 즉시 연결하겠습니다!
잠시 후, 중후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네. 할아버지 좀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만약 제 인생과 개인 재산을 전부 담보로 잡으면 돈을 얼마나 빌릴 수 있을까요?"
-······아가씨?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아무래도 안 좋은 상상을 하는 것 같아서 급하게 덧붙였다.
“제가 사람을 좀 쳤는데요. 그걸 수습해야 해서요.”
-혹시 죽이셨습니까?
“아뇨, 멀쩡히 살아 있어요.”
나는 내가 때린 사람이 프림로즈 후작이라는 것과 내가 왜 그를 치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서 북부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면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제 신용으로 전부 빌리는 게 가능할까요?”
-한 시간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지금 당장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처음 사용해 본 통신구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 * *
북부의 변경백, 우르스 발타자르는 지쳐 있었다.
계속되는 가뭄과 끝없는 몬스터들의 습격.
노인들은 굶어 죽어 가고` 젊은이들은 싸우다 팔다리를 잃었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살아간다기보다는 죽어 가는 것에 가까운 나날들.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겹다고 생각할 때쯤에 위대한 존재를 섬기는 대무녀가 말했다.
“이제 고통은 끝났습니다. 우르스, 우리의 인도자여.”
대무녀는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가락을 들어 남쪽을 가리켰다.
“수도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할 샛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고통에 구원이라는 것이 있을까?
의문을 품으면서도 우르스는 수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것 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수도에서 그는 구원이 아닌 멸시에 가득한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북부의 야만인들이 왔다!"
“저 덩치 좀 봐 피부색은 또 왜 저렇게 검지?"
“생고기를 씹어 먹는다는 게 사실일까?"
오랜 가뭄에 지쳐 도움을 구하러 온 상황이 그들을 한없는 약자로 만들었다. 모욕에 분노해 검자루를 움켜쥐는 사람은 있어도, 뽑아 드는 자는 없었다.
자부심 가득한 북부의 전사들이 입술을 깨물 때마다 우르스의 가슴은 찢어졌다.
‘이곳에 구원은 없다 신성한 맹약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일지도 모른다.’
왕이 그들을 수호하는 한 북부는 영원한 방패가 되어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약. 그것이 깨어진다면 그들 또한 살기 위해 검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아트레유, 바스티안을 데리고 여기 남아라.”
우르스는 최악을 생각하고 두 아들을 뒤에 남겼다.
“내가 궁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동생과 함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북으로 귀환해라.”
과묵한 큰아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수도의 멸시를 느낄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혹시 위험한 거야?"
아직 어린 바스티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우르스는 아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인생의 어느 순간도 위험하지 않은 때는 없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북부의 아들로서 자부심을 잃지 마라.”
유언 같은 말을 남긴 그는 왕을 만나기 위해 궁으로 떠났다.
* * *
왕궁은 화려하지만 음침하게 썩어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웃는 얼굴로 침을 뱉었고, 보이지 않는 칼로 상대를 찌르려 했다.
두 이들을 여기 데려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들 정도였다. 자포자기한 우르스조차 울컥울컥 치미는 회를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던 시종이 왕의 부름을 알렸을 때는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모든 게 끝나 간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알현실 안은 어두웠다. 채색창에서 떨어지는 오색의 빛 외에는 어떤 조명도 없었다.
괴롭힘 당하는 것에 익숙해진 우르스는 시종이 거짓말을 했나 의심했다. 눈앞의 옥좌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발타자르 변경백.”
그런데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좌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 하얀 그림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원을 그리는 하얀 왕관은 태양을 의미했다. 흰옷에 수놓아진 황금색 사자는 과거의 약속을 상징했다.
북부의 오래된 맹약으로 온몸을 둘러싼 왕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폐하!”
우르스는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수도에서 느꼈던 온갖 굴욕과 분노가 모조리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왕이 자애롭고 공평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짐은 아스트리아의 주인이자 북부의 주 . 만백성의 어버이이자 북부의 어버이이다. 너는 짐을 북부의 태양으로 인정하느냐?"
“폐하께선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는 명백한 북부의 주인이자 태양이십니다. 신 우르스 발타자르! 폐하께 온 마음을 다해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우르스의 맹세에 왕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짐 역시 그대의 충성에 보답할 것을 약속한다.”
감격한 우르스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손을 뻗은 왕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우르스여, 이제 그대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말해라. 그게 무엇이든 어버이인 짐이 들어줄 것이다.”
그 순간 우르스는 생각했다. 대무녀가 말한 구원은 왕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구원의 샛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 모든 것을 때려 부수며 등장했다.
* * *
대영주 회의.
각 지방을 대표하는 영주들이 왕을 모시고 중요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
오늘은 북부의 지원 문제가 걸려 있어 더욱 엄숙해 질 예정인 이곳에 뜻밖의 인물이 등장했다.
“엘마이어 공작가의 대표인 이블린 하인즈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문을 지키던 기사는 갑자기 나타난 분홍 머리의 뽀송뽀송한 아가씨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