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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88화 (88/240)

88화

내 부름에 답하듯 멀리서 반짝반짝 작은 별이 울리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나는 튕기듯 몸을 일으켜 카트의 손잡이를 잡았다.

“고마워 ! 내가 돌아와서 백 번 더 연주해 줄게! 사랑해!"

-꾸꾸꾸!

복실이가 어서 서두르라는 소리를 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카트를 밀며 입구로 돌진했다.

“이블린?”

“벌써 찾았어요?"

내가 보고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튀어나오자 시녀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서둘러 그들에게 짐을 분배했다.

“고고고 ! 갑시다!"

나는 새하얀 망토가 바닥에 닿을 새라 번쩍 머리 위로 쳐들고 내달렸다. 시녀들이 엉겁결에 나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왕관을 품에 안고 나를 따라오던 마리아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헥헥, 뭐가요?"

“ 다, 다른 옷을 가져왔다고, 분명히······.”

지시한 것과 다른 옷을 가져왔다고 질책당할 거란 소리였다. 나는 하하 웃었다.

“어떻게든 되겠죠!"

우리는 머지않아 목표인 왕의 침실에 도착했다. 허겁지겁 달려오는 우리를 보고 피오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이블린?"

“아, 안 늦으려고…….”

내가 숨을 헐떡이며 말하자 피오나가 얼른 옷을 받아 들었다.

정복왕 세트와 전혀 다른 하얀 예장을 보고 잠시 멈칫한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침실부 시녀들에게 눈짓을 했다.

침실부 시녀들이 짐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헐떡이던 동료들이 하나둘 벽에 기댔다. 다이애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끄, 끝난 거예요?"

“아뇨, 이제 시작이죠.”

나는 억지로 숨을 고르며 답했다. 예망대로 잠시 뒤 문이 열리며 피오나가 나타났다.

“폐하께서 모두 안으로 들어오라고 명하셨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벽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하얗게 질린 시녀들이 나를 따라 몸을 똑바로 했다.

“자, 갑시다."

나는 용감하게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 * *

왕의 침실은 공식적인 공간이다.

암살을 막기 위해 왕은 다른 곳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침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대신들의 문안 인시를 받고 하루 일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침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수많은 배불뚝이 아저씨들이 왕의 침대를 둘러싼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블린 하인즈가 국왕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침대 앞으로 다가간 나는 되도록 공손히 절을 올렸다.

평상복 위에 가운을 걸치고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던 왕이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이블린, 짐이 무슨 일로 너를 불렀는지 알겠느냐?"

"송구하오나 제가 너무 불민하여 어떤 이유인지 떠올리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시침을 뚝 떼자 배불독이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성격 급한 누군가가 소리쳤다.

“뻔뻔하긴! 북부에 아부하느라 폐하의 권위를 손상 시켜 놓고 이유를 모르겠다니!”

뭐래, 갖다 붙이기 챔피언이네.

귀를 후벼 파고 싶은 것을 꾹 참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북부에 아부를 하다니요?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스럽습니다.”

“이블린, 저 옷이 무엇인지 아느냐?"

왕이 침실부 시녀들이 들고 있는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나.

"예, 폐하. ‘하얀 태양과 사자가 그려져 있는 북부 전통예장’입니다.“

"왜 저 옷을 가져왔느냐?"

나는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답했다.

“폐하, 저는 의상부의 보고 관리관으로서 지시하신 대로 의상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제게 이유를 물어보셔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지시에 따랐다?"

"예 카탈로그를 보고 북부 전통 예장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뭔가 문제가 있는지요?"

나는 내 멋대로 의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지시에 따랐다고 빡빡 우겼다.

“그럼 카탈로그는 어디에 있느냐?"

“그게······.”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척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바쁘게 뛰어오다가 어딘가에 빠트린 것 같습니다. 명령하시면 지금 당장 찾아보겠습니다."

응, 카탈로그는 없어. 그렇지만 나는 카탈로그 보고 가져온 거야.

내가 대놓고 배를 째자 잠깐 정적이 맴돌았다. 다음 순간 나를 욕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런 고약한!"

“폐하, 저 뻔뻔한 거짓말쟁이를 당장 벌해야 합니다!“

"감히 폐하를 속이려고 들다니!"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왕에게 말했다.

“폐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는지요?"

"카밀라이든.”

왕은 내게 답하는 대신 카밀라를 불렀다.

"네가 대신 말해 보아라. 이블린의 말이 사실이냐?"

"네?"

순간 창백하게 질려서 머뭇거리던 카밀라가 갑자기 눈을 똑바로 뜨고 왕을 쳐다봤다.

“사실입니다, 폐하. 제가 카탈로그를 확인했을 때는 북부 전통 예장을 가져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다른 시녀들은?“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분명 북부 전통 예장을 가져오라는 카탈로그였습니다.”

다이애나는 아예 한술을 더 떴다. 귀엽고 순진한 얼굴로 또랑또랑 거짓말을 하니 나까지 저게 진짜인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의상부 시녀들이 한통속이라는 것을 확인한 왕이 이마를 짚었다. 날 어떻게 처벌할지 골치 아픈 모양이었다.

기회를 노리던 나는 냉큼 입을 열었다.

“폐하, 제가 뭔가 실수를 했다면 당연히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북부에 아부하여 폐하의 권위를 손상시켰다는 누명을 쓰게 되니 너무 억울합니다!"

내가 콕 집어서 지적을 하자 내게 누명을 씌운 아저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발타자르가 무슨 속셈으로 입궁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폐하께 북부의 전통 의상을 권하다니! 이게 대놓고 아부하겠다는 속셈이 아니고 뭐요!"

“아니 , 그게 왜 아부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리고 그가 뭐 라 답하기 전에 왕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폐하, 저는 폐하께서 아스트리아의 진정한 태양이시라고 믿습니다. 폐하께서는 만민의 어버이시며, 모든 땅의 주인이십니다.”

보았느냐. 이게 바로 아부라는 것이다.

나는 몸을 홱 돌려 배불뚝이의 얄미운 배를 찌를 것처럼 가리켰다.

“그런데 저자는 폐하께서 중부와 남부의 태양은 될지언정, 북부의 태양은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불충이 어디 있습니까!"

절절한 아부 뒤엔 중상모략이 따라와야지.

"무, 무슨 소리를!"

“폐하께서 북부의 백성을 가없게 여기시어 어버이의 마음으로 품으시려는데, 그걸 질투해서 초를 치는 비열한 모습을 좀 보십시오! 저런 간신을 내버려 두면 잡풀처럼 자라나 나라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

졸지에 나라를 망하게 할 간신이 된 아저씨가 당황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억울하옵니다. 저 여자의 말에 넘어가 북부의 위험을 가볍게 여기셔서는 안 됩니다!"

“폐하아- 사사건건 남을 모함하는 간신배의 간언에 넘어가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나는 더욱 납작 엎드리며 K-사극으로 쌓아 온 바이브를 뽐냈다. 우리가 번갈아서 폐하, 폐하 울자 왕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만!”

자리에서 떨쳐 일어난 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시간이 됐다 이만 옷을 갈아입어야겠군. 대신들은 모두 퇴실하라.”

나는 번쩍 고개를 들고 왕을 쳐다봤다.

지금 침실에 있는 옷은 ‘하얀 태양과 사자가 그려져 있는 북부 전통 예장'분이었다. 다시 말해 왕은 내 뜻을 따라 주기로 한 것이다.

“폐하!"

"왜? 짐이 북부의 태양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자가 또 있는가?"

무어라 반발하려던 아저씨들은 왕의 말에 움찔해서 입을 다물었다. 특히 나로 인해 간신배로 낙인찍힌 배불뚝이는 안색이 죽은 사람처럼 시퍼렇게 변했다.

"물러가라.”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본 왕이 명령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저씨들이 곧 썰물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이블린, 이리 가까이 와라.”

왕이 나를 향해 까딱까딱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왕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찰싹 입술을 얻어맞았다.

“아야!"

"요 못된 입을 어쩌면 좋을까.”

나는 차마 변명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왕이 내 거짓말을 다 알면서 눈감아 줬기 때문이다. 또다시 내 입술을 찰싹 때린 왕이 위협했다.

"다시는 짐의 앞에서 망령되게 입을 놀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또 거짓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훌쩍이며 고개를 조아렸다. 왕에게 얻어맞은 입술이 벌써 따끔따끔 부어오르는 것 같았다.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왕이 물었다.

“이블린, 짐이 정말 너의 태양이냐?"

“네, 폐하! 폐하께선 저의 하나뿐인 태양이십니다!"

나는 진심으로 답했다. 그러자 왕이 화사하게 웃었다.

“고맙구나. 네가 짐이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네?"

“짐은 아스트리아의 태양, 그리고 북부의 태양이기도 하다. 다른 것보다 그게 가장 우선이지.”

왕은 태양이라는 내 아부가 진짜 마음에 든 모양이다. 어쩌면 아스트리아에도 태양왕이 생기는 것 아닐까.

내게서 시선을 거둔 왕이 명령했다.

”의상부는 이블린과 함께 대기실로 돌아가도록. 중간에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

“예, 폐하.”

“이블린, 피오나가 찾을 때까지 얌전히 대기하고 있어라.“

“······네, 폐하.”

정중히 절을 한 우리는 서둘러 왕의 침실을 벗어났다.

“주, 죽는 줄 알았어요.”

“전 지금도 살아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시녀들이 저마다 심장을 쓸어내리며 불평했다. 다이애나가 내 얼굴을 훔쳐보며 물었다.

“이블린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어요? 전 진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뭐 그냥 전 체질인가 봐요.”

뻔뻔한 내 대답에 시녀들이 아유했다. 그러나 웃고 떠드는 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블린 하인즈!"

복도를 도는 순간, 잔뜩 화가 난 중년 남자가 내 팔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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