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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40화 (40/240)

40화

응, 화났네 엄청나게 화났어. 그래도 달라진 외형 때문인지 전처럼 살벌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세스.”

일부러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니 세스가 멈칫했다. 나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같이 구경하러 가요. 제 백화점 보여 드릴게요.”

"······."

한숨을 쉰 세스가 내 손을 잡았다.

"귀여워서 화도 못 내게 하지.”

"화난 것 아니라면서요?"

“당신에게 화난 건 아니니까."

“우우, 비겁한 변명입니다."

입을 삐죽이며 항의하자 세스가 웃었다. 이렇게 쉽게 풀린 걸 보면 많이 화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안심한 나는 세스의 팔짱을 끼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

마커스는 글로리아나 백화점의 총책임자였다.

젊은 시절, 의류점의 점원이었던 그는 시대의 변화를 빠르게 감지했다.

‘앞으로는 기성복의 수요가 더 늘어날 거다. 그것도 한 가게에서 옷뿐만 아니라 다른 물건들을 함께 살 수 있는 시대가 올 거야.’

마커스는 자신의 눈을 믿고 가게를 차렸다. 그리고 완벽하게 망했다.

너무 심하게 망해서 남들의 비웃음을 살 정도였다. 그런데 소문을 들은 한 귀부인이 그를 찾아왔다.

“내가 만들고 싶은 가게에 당신이 꼭 필요해요.”

귀부인은 바로 엘마이어 공작 부인이었다. 원래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였던 그녀는 고향과 비슷한 형태의 가게를 만들고 싶어 했다.

카스티야 왕국은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한 거리 안에서 모자와 구두, 옷 등을 편하게 살 수 있었다.

반면 아스트리아 왕국은 모자를 사려면 A거리로, 목도리를 사려면 B거리로 가야 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은 피곤하니까, 커다란 가게 안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공작 부인에게 고용된 마커스는 전보다 조심스럽게 가게를 운영했다. 각각의 의류 상점을 키우고, 성장하면 합치는 식으로 규모를 늘려 나간 것이다.

결국 25년의 노력 끝에 마커스는 자신이 꿈꾸던 가게, 글로리아나 백화점을 완성할 수 있었다.

“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다고?"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죽은 공작 부인의 유산 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면서 백화점에도 새로운 주인이 생긴 것이다.

소식을 들은 마커스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불안감 이었다. 새로운 주인이 평생을 바쳐 만든 백화점을 망가트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보통 사람들은 마커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를 선택한 공작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공작 부인의 갑작스러운 축음이 아니었다면 투자를 계속 받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주인에 대해 알아본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이블린 하인즈.

아직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가씨. 몸이 약해 어릴 때부터 시골에서 자랐고, 그 영향으로 허영심이 많고 사치스럽다는 소문이 있었다.

귀족적인 부티크에 익숙해진 아가씨가 백화점을 어떻게 평가할까.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돈에 눈이 멀어 남에게 팔아 버리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으로 꿍꿍 앓던 중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직원이 소리쳤다

“새, 새 주인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마커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락도 없이 들이 닥친 것에 당황했지만, 귀족이란 원래 남의 사정을 봐주는 이들이 아니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당장 영업 중단하고 손님들을 돌려보내게 모든 직원을 정문에 대기시키고!"

“예? 새 주인님은 벌써 안으로 들어오셨는데요?"

”뭐?”

“지금 매장 안을 둘러보고 계십니다.”

놀란 마커스는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1층으로 내려갔다.

새 주인님. 이블린의 모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듣던 대로 특이한 분홍색 머리에 햇빛 한 점 받지 않은 것 같은 하얀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이블린은 다른 손님과 마찬가지로 물건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천연덕스러운 태도였지만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함께 있는 남자들 때문에 평범하지 않은 티가 났다.

마커스는 이블린의 뒤를 따르는 두 명의 남자를 살 폈다. 오랫동안 장서를 해 온 그는 쓱 보기만 해도 상대의 신분과 직업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 큼은 감이 오질 않았다.

‘한 명은 기사인 게 확실한데, 다른 한 명은 뭐지?'

마커스는 검은 머리의 남자를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지만 검을 차고 있지는 않았다. 지적인 분위기로 봐서는 학자 같기도 했으나 얼굴 이 너무 곱상했다.

시선을 느낀 남자가 힐끗 마커스를 돌아봤다. 지옥의 밑바닥처럼 새카만 눈이 그를 응시했다.

“억!"

마커스는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몸이 급하게 뒤로 물러나려는 것을 다리가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괜찮으세요?"

모지를 구경하던 이블린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그러자 검은 머리의 남자가 그녀를 막았다.

“수상한 자야. 가까이 가지 마."

알 수 없는 공포에 얼어붙었던 마커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귀족에게 수상하다는 의심을 샀다간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아픔도 잊고 벌떡 일어난 그는 깊게 절을 했다.

"추태를 부려 죄송합니다, 주인님. 저는 백화점의 총 책임자인 마커스라고 합니다.”

“혁, 저 들켰나요?"

이블린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커다란 눈이 왕 방울만 해져서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불경한 생각을 떨쳐 낸 마커스가 말했다.

“주인님께서 방문하시기만을 기다렸기에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아부 섞인 말에 검은 머리 남자가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반면 이블린은 무척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방해하지 않고 잠시만 둘러보고 가려고 했는데 오히려 놀라게 만들었네요. 넘어질 때 다치진 않았나요?"

“아주 멀쩡합니다. 부디 재게 주인님을 안내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그럼 안내를 부탁할게요. 그런데 주인님 말고 다른 걸로 불러 줬으면 좋겠어요. 좀 낯설어서요.”

이블린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마커스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 그러겠습니다. 아가씨."

이때까지만 해도 마커스는 이블린을 평범한 귀족 아가씨라고 생각했다. 소문과 다르게 상냥해 보였지만, 온화한 모습을 연기하는 귀족도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선입견은 산산이 부서졌다.

"상품에 가격표를 붙인 게 마커스 씨의 아이디어라고요? 정말 대단해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이블린은 마커스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과를 콕 집어서 칭찬했고.

“상품을 만지고 살핀 뒤에도 사지 않을 권리가 오히려 구매를 늘릴 수도 있는 거죠. 전 아주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 데 전시품과 판매품을 분리하는 건 어떨까요?"

그의 의견에 동의해 주면서 좀 더 생각할 문제를 던져 주기도 했으며.

"여지들이 쇼핑하는 동안 남자들을 보관하는 장소를 위층에 따로 만든 게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아이들의 놀이 공간은 쇼핑 공간과 함께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쇼핑하는 틈틈이 아이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짚어 주기도 했다.

마커스는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느꼈다. 괴짜 취급당하던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자신과 같은 곳을 보고, 더 나온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 평생 바라던 소원이 갑자기 이뤄진 것만 같았다.

마커스는 새로운 주인에게 잘 보이겠다는 계산도, 귀족을 상대하고 있다는 긴장감도 잊었다. 그저 이블린과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대화에 푹 빠진 그는 점점 흉흉해지는 남자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주군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을 느낀 기사만 헛기침을 연발했다.

꿈결 같은 시간은 금방 끝나 버렸다.

백화점을 모두 둘러본 이블린은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회식비를 투척한 후 사라졌다. 거금을 부리고 미련 없이 떠나는 카리스마에 직원들은 모두 넋을 잃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지만 멋진 분이셨어요.”

“그래.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아서 다행이야."

반면 마커스는 엄마 잃은 아이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이블린이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주인님은 또 언제 오실까?"

난데없이 주인님 앓이를 시작한 마커스를 보고 고개를 저은 직원들이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 * *

“아이고, 발바닥이야.”

마차로 돌아온 나는 픽 옆으로 쓰러졌다. 쉴 새 없이 걸어 다닌 탓에 발바닥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무리 하지 말라고 했잖아."

맞은편에 앉은 세스가 내 발을 잡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당황한 나는 발을 빼려고 했다.

“이 정도는 조금만 쉬면 나아져요."

“가만히 있어. 내버려 두면 내일은 몸살이 나서 꿍꿍 앓게 될 테니까."

내 신발을 벗겨 낸 그가 발을 꾹꾹 주무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곧 시원함이 느껴졌다.

편안한 얼굴로 축 늘어진 나를 보고 세스가 웃었다.

"발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돌아다니다니.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엄청나게요. 제 예상보다 훨씬 좋았어요.”

무엇보다 전생의 백화점과 거의 비슷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물건에 가격표를 부착하는 것은 물론. 반품과 A/S를 해 주고, 1 년에 두 차례씩 세일을 통해 재고를 정리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확실히 총책임자의 수완이 대단한 것 같더군.”

“그렇죠? 마커스 씨는 천재예요. 혼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 거잖아요.”

“그자는 당신을 천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세스의 말에 갑자기 창피해졌다. 진짜 천재 앞에서 얄팍한 전생의 경험으로 아는 척 떠든 것이 후회스러웠다.

"저야 완성품을 보고 이래라저래라 한 거고요. 진짜 대단한 건 마커스 씨죠.”

내 말에 세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약혼녀가 다른 남자를 칭송하는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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