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한껏 꾸민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뜬 남자가 말했다.
“내 생각보다 더 근사한걸.”
“헉, 공작님?"
낯익은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 낯선 미남은 바로 세스였던 것이다. 항상 단정하게 빗어 넘기던 앞머리 지금은 이마를 살짝 덮고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도 검게 변해서 차분 하고 지적인 느낌을 풍겼다.
몸에 딱 맞는 정장 대신 가벼운 외출복을 입은 세스는 놀라울 정도로 어려 보였다. 암흑가를 주름잡던 보스가 갑자기 성당오빠로 변신한 느낌이랄까.
‘진짜 잘생겼다.'
평소의 세스는 카리스마 때문에 잘생김이 덜 느껴졌는데, 지금은 청초함이 더해져서 보는 것만으로 넋을 잃을 것 같았다. 한마디로 정말 내 취향이셨다.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봤어요."
내 진심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세스가 가볍게 웃었다.
"눈에 띄지 않으려면 평범한 모습이 좋으니까."
어디가 평범한지 모르겠지만 세스 나름대로는 보호색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는 옷차림에 한껏 힘을 준 나를 보고 미안한 듯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예쁘게 꾸밀 줄 알았다면 나도 좀 더 신경 쓸걸 그랬어.”
“아, 아뇨. 전 지금이 딱 좋아요.”
여기서 더 신경 썼다간 내가 위험한 짐승으로 변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
“다행이군. 이제 갈까?"
내 흑심을 눈치채지 못한 세스가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옷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나는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세스는 평범한 외출을 위해 아무 문장도 없는 마차를 준비했다. 물론 겉으로만 평범할 뿐, 보통 마차보다 몇 배로 크고 약간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나는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처음 보는 풍경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왕국의 수도는 내 예상보다 화려하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생활수준도 높은지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묘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전생엔 나도 저런 사람들 중 하나였는데.’
애써 추억을 떨쳐 낸 나는 세스를 돌아봤다. 잘생긴 얼굴을 보자 절로 기분이 상쾌해졌다.
"공작님.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당산의 기분이 좋아질 만한 곳."
뜻밖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외출 자체가 처음이다 보니 짚이는 곳이 전혀 없었다.
‘카페나 영화관? 아니, 영화는 없을 테니까 연극을
보러 가려나?'
어디로 가서 뭘 하든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때, 세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비, 당신 숙제를 같이해 주는 대신 내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한 것 기억해?"
“네, 기억해요.”
전에 없이 심각한 분위기에 나도 진지하게 답했다.
살짝 굳어진 세스의 얼굴을 보니 굉장히 어려운 일을 부탁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세스가 원하는 거라면 꼭 들어주고 싶었다.
"빨리 말해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 테니까요.”
재촉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스가 말했다.
“나를 공작님이 아니라 세스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어.”
“네?”
“오늘만이라도 좋아. 싫으면 거절해도 돼.”
“싫은 건 아닌데요.”
비장한 태도에 비해 너무 간단한 부탁이라서 당황한 것뿐이었다.
“제가 그렇게 부르면 너무 건방져 보이지 않을까요?"
“전혀.“
"그럼 세스."
대뜸 이름을 부르자 세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눈치를 보며 물었다.
"역시 건방지죠? 하지 말까요?"
“아니 ,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달라서.”
세스는 처음 보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것을 보면 밀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그동안 이름 불러 줄 사람이 없었겠다.’
어머니는 어릴 때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사고로 죽고. 아버지 는 세스를 싫어한다고 했으니까. 나머지 사람들은 공작님이나 전하로만 불렀을 테고.
“그럼 앞으로도 세스라고 부를까요?"
조심스레 묻자 세스의 귀 끝이 더 빨개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세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장난기가 생긴 나는 슬그머니 덧붙였다.
“그런데 남들 앞에선 그렇게 부르면 안 되겠죠? 아이고, 어쩔 수 없네. 습관이 되면 안 되니까 그냥 공작님이라고 불러야겠다.”
“내 약혼녀가 날 이름으로 부르겠다는데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지?"
진심으로 울컥하는 세스를 보니 더 이상 장난을 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진지하게 그를 불렀다.
“세스."
”······.“
날카롭게 날이 선 눈매가 갑자기 느슨해졌다. 그 변화에 수줍어진 나는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절 구하러 와 준 것도, 제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준 것도. 그리고 제 편이 되어 준 것도요.”
“내가 당신 편인 건 당연한 일이잖아"
여보세요, 거기 경찰서죠. 누가 계속 제 심장을 폭행하는데 혼인 신고 되나요?
“이비?"
나도 모르게 음흉한 표정을 지은 것 같았다.
“앗, 그게······ 공작님이 제 편이라니 기뻐서요.”
“세스.”
“네, 세스가 제 편이라니 정말 기뻐서요.”
벌써 호칭 관리에 들어가는 세스가 귀엽게 느껴졌다. 혁 내가 세스를 귀엽다고 생각하다니? 드디어 미쳤구나!
"주인님 , 도착했습니다."
그때. 평범한 마부로 위장한 선배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화제가 필요했던 나는 얼른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원처럼 꾸며진 부지 위에 삼 층 높이의 건물이 서있었다. 웬만한 저택보다 더 큰 크기였다.
고풍스러운 벽엔 ‘글로리 아나 백화점'이라고 새겨진 황금색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나는 이곳에도 백화점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세스가 내 감상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마음에 들어?"
물론 쇼핑을 하면 기분 전환이야 되겠지만. 그냥 세스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편이 더 즐거울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데려와 준 성의를 무시하고 싶진 않아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와, 좋네요. 이재 저기 들어가서 제가 갖고 싶은 거 다살까요?"
“사지 않고 그냥 가져와도 돼 . 저기 있는 건 전부 당신 거니까."
“네?"
어리동절한 내 표정에 세스가 작게 웃었다.
"역시 모르고 있었군 어머니가 당신에게 물려준 유산 중에 가게들도 있었지? 그중 하나야.”
"어······."
갑작스러운 말에 혼란이 왔다. 눈을 깜빡이던 나는 조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혹시 저 백화점이 제 거라는 뜻이에요?"
"응.“
“왜죠?"
"당신이 저곳의 주인이니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 감사합니다.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백화점을 바라봤다. 너무 실감이 안 나서 기분이 이상했다.
눈을 떼지 못하는 내게 세스가 물었다.
"보러 가고 싶지 않아?"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던 나는 간신히 참았다.
“아뇨, 여기서 본 걸로 충분해요."
”폐하가 신경 쓰여서?"
그렇게 핵심을 콕 찌르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폐하께서도 제가 유산을 받은 건 이해하실 거예요. 안 받으면 대역이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걸 진짜 제 것인 것처럼 구는 건······.”
”싫어하실 거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세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은 폐하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아무런 욕심도 부리지 않겠다는 거겠지?"
"네, 은혜를 갚겠다는 사람이 재물에 눈을 돌리면 안 되니까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애썼다. 비록 내 영혼은 탁하지만 그래도 세스를 돕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니까.
“하지만, 이비. 권력자의 입장에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제일 수상한 법이거든."
“네?"
"욕심을 외면하는 사람은 야망이 있다는 뜻이니까. 당신이 더 큰 것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어라, 뭐야. 반박할 수가 없다?
그동안 잘한다고 애쓴 것이 삽질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머리가 텅비는 것 같았다.
“그럼 어떡하죠?"
"적당히 욕심을 부려야지”
뭐든 적당히가 제일 어려운 법이다. 고민하는 나를 본 세스가 덧붙였다.
“사고 싶은 건 다 사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갖고 싶다고 나한테 말하면 돼.”
“그게 적당한 거예요?"
“아주 보통이지."
왜 거짓말인 거 같지? 하지만 귀족에겐 그게 보통일 수도 있으니 선뜻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주는 건 다 받아도 돼. 다른 사람이 주는 건 거절하고."
"폐하께서 주시는 건요?“
“정중하게 사양해야지."
어, 어떡하지 하필 오늘 받아 버렸는데.
머뭇거리던 나는 오늘 왕에게 반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세스의 미간에 살짝 금이 갔다.
"절대 배지 말라고 명령하셨다고?”
“······네, 그래도 돌려드려야겠죠?"
눈치를 보며 묻자 세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건 선물이 아니라 당신이 노력해서 얻은 상이니까 돌려드리지 않아도 돼."
“정말요?"
나는 활짝 웃었다. 이대로 목숨 하나를 날려 버리는 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세스가 나를 따라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군 범인을 찾아서."
“범인이요?"
"누가 당신 손에 겁도 없이 반지를 끼웠을지 꽤 궁금했거든.”
”······혹시 화나셨어요?"
“내가? 아닌데?"
싱긋 웃는 세스의 얼굴이 스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