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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3화 (13/240)

13화

고민하던 나는 침대 옆의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시녀를 부르는 용도라는 건 알고 있지만 실제로 사용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잠시 후에 나타난 시녀는 ‘뭐야, 너 따위가 날 부른 거야?’하는 얼굴을 했다.

왜요. 제가 신분 세탁하고 왕궁에 들어온 사람 같나요?

‘하지만 지금의 나는 손님이지!'

그것도 왕이 직접 초대한 특급 손님이다.

나는 시녀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물었다.

“지금 공작님이 어디 계신지 아세요?"

시녀는 고작 그런 걸로 날 불렀나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내 말을 무시하긴 힘들었는지 무뚝뚝하게 답했다.

“접객실에 머물고 계십니다.”

다행히 세스가 날 버리고 가진 않은 모양이다. 나는 안도감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공작님께 제가 깨어났다고 전해 주실래요?"

“폐하께서 이미 알리셨습니다. 굳이 다시 전해 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어, 그렇군요.”

멍하게 고개를 끄떡이던 나는 문독 기분 나쁜 시선을 느꼈다. 시녀가 대놓고 비웃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앗, 지금이 혹시 내가 상처받을 타이밍인가?’

하지만 오랜 방치에 익숙한 내게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세스는 날 고용하자마자 허허벌판의 저택에 한 달이나 처박아 뒀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처럼 몇 시간 내버려 두는 정도는 아주 귀여운 수준이다.

‘어디 있는지 알아냈으니 내가 직접 찾아가도 되고.’

저택에 있을 땐 세스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얌전히 기다렸다. 하지만 뻔히 아는 지금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스캔했다. 내가 걸친 것은 얇은 잠옷이었고, 입고 왔던 드레스와 구두는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결국 심술궂은 시녀에게 부탁해야 했다.

“제가 지금 당장 나가야 하는데 입고 온 옷이 없어졌어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없으면 아무거나 갖다 주세요. 당장 입을 수 있기 만하면 돼요.”

“그러죠.”

무뚝뚝하게 말한 시녀가 홱 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나는 목을 빼고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한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설렁줄을 다시 당겼지만 이번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뭐지? 날 엿 먹이려는 것치고는 너무 적극적인데?'

왕에게 이르기만 해도 난처해질 텐데, 뭘 믿고 이러는지 알수가 없었다.

‘누가 날 못 나가게 하라고 했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옷이 없다고 못 나가는 건 아니니까.”

주섬주섬 방을 뒤진 나는 목욕용 가운을 찾아 잠옷 위에 걸쳤다. 실내용 슬리퍼도 야무지게 신은 다음 씩씩하게 방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복도를 뛰어다니며 문을 보이는 족족 열어젖혔다.

“공작님!“

“어디야!”

“나와!”

“여기냐!”

하지만 열어 본 방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뭔가 예감이 안 좋은데.’

나는 즉시 기척을 죽였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세스가 같은 충에 없다는 건 분명했다. 더 찾으려면 아래층을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왠지 지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가서 살피자 난간 아래로 머리꼭지가 보였다. 칼을 찬 기사가 둘이나 서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호다닥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러면 들키지 않고 나갈 수가 없잖아.’

사실 들켜 봤자 별일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내가 나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심각하다. 잘 못하면 끌려가서 방에 갇힐 수도 있었다.

고민하던 나는 원래의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파트 2층보다 조금 높은 것 같았다.

‘어떻게 잘 뛰어내리면 될 것 같은데.’

운동화가 있으면 충격을 완화해 줄 텐데 미끌미끌한 슬리퍼라 고민이 됐다. 나는 슬금슬금 장문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다리를 최대한 아래로 뻗은 다음에 손을 놓으면 별로 안 높을 거야.’

다행히 나는 어린애처럼 몸이 가벼웠다. 하도 오래 굶으면서 산 탓이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크게 다칠 것 같진 않았다.

“읏챠!”

예상대로 아주 쉽게 창문에 매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있는 힘껏 다리를 뻗어도 땅이 저 아래에 있었다.

‘눈 딱 감고 뛰어내려? 아니면 다시 방으로 올라가?'

고민하며 몸을 꿈지럭거리는 순간이었다.

“이비!"

”으악!”

천둥 같은 목소리에 놀라서 손에 힘이 빠졌다. 몸이 뚝 떨어지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덥석 받아 안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급히 뛰어왔는지 머리가 살짝 헝클어진 세스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언제 오셨어요?"

"······."

"아, 오해하지 마세요. 자살 시도가 아니라 탈출 중 이었거든요.”

나는 열심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나를 노려보던 세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살 시도라고 오해하진 않았어.”

그럼 왜화를 내는 거야?

멀뚱히 쳐다보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약혼녀가 이 층 창문에 매달려 있는 걸 보면 보통 다 놀라겠지.”

“그렇게 위험하진 않았는데요. 위아래 다 살펴보고 뛰어내리려고 한 거예요.”

“······다음엔 뛰어내리지 말고 나를 불러.”

“네 ? 부르면 오실 거예요?”

깜짝 놀라서 묻자 세스가 낮게 웃었다.

“아내가 부르면 당연히 와야지.”

“진짜요?”

오오, 이렇게 좋은 사장님이 있다니. 왕국의 앞날이 아주 밝다.

감탄하는 사이, 나를 내려놓은 세스가 겉옷을 벗어 입혀 주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코트를 꽁꽁 여몄다. 목욕 가운만 입고 있자니 좀 추웠던 것이다. 세스가 입고 있을 때는 반코트였는데 내가 입으니 이불 같았다.

“이거 진짜 가볍고 따뜻하네요. 근데 공작님은 안 추우세요?"

"난 원래 추위를 안 타.”

세스가 코트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며 말했다. 나도 손발이 있는데. 그의 눈엔 내가 단추도 못 잠그는 어린애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음, 아냐 말썽 부리는 개처럼 보일지도.’

강아지가 2층에서 뛰어내리면 주인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세스가 화낸 것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로 했다

‘역시 잘생긴 걸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니까.'

코트를 벗은 세스는 늘씬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이 잘 빠진 허리와 긴 다리를 강조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조금 궁금해질 정 다.

내 흐뭇함을 눈치채지 못한 세스가 이제 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별생각 없이 손을 잡고 걷자 실내용 슬리퍼에서 뽀작뽀작 소리가 났다.

내 발을 쳐다본 세스가 다시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익숙하게 몸을 꿈질대며 편한 자세를 잡았다.

“그래서 왜 이 충에서 뛰어내린 거지?"

······아직 추궁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사장님의 집요함에 한탄하며 순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탈출해서 공작님에게 가려고 한 거예요.”

나는 내가 겪은 일을 모조리 털어놨다. 왕에게 들은 이야기는 물론, 심술궂은 시녀의 행동도 일러바쳤다. 세스는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우리는 정원에 도착했다.

꽃과 조각상으로 꾸며진 화사한 공간에 검은 옷의 남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미묘하게 칙칙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들의 옆에 선 말까지 전부 검은 색이었다

반대쪽에선 한 무리의 여자들이 대치중이었다. 나는 그녀들 속에서 내게 심술을 부렸던 시녀를 발견했다.

세스를 본 남자들이 소리 없이 예를 올렸다. 그리고 여지들 속에서 나이 지긋한 부인이 달려 나왔다.

"공작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백합 궁은 남자가 들 올 수 없는 곳임을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기사들을 들이시다니요!"

"피오나, 내 약혼녀가 창문에서 떨어졌습니다.”

무어라 따지던 부인이 세스의 말에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세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시녀가 오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었다가 손이 미끄러졌다고 합니다.”

나는 얼른 아픈 척하며 세스의 품에 기댔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부인이 시녀를 돌아봤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시선에 시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게 보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정말 송구합니다. 아가씨의 상태는…….”

“신께서 도우셨는지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불안해하고 있어서 제가 데려가서 돌봐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이만 물러간다고 전해 주십시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나 세스는 뒤도 안 돌아보고 마차로 향했다. 남자들이 다급하게 따라오는 부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엉겁결에 마차에 탄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대로 가도 되는 거예요?"

“돼.”

단호하게 말한 세스가 마차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마차가 출발했다. 나는 반대쪽 창문으로 밖을 보려 했지만 커튼에 가려서 거의 안 보였다. 기웃기웃하던 나는 결국 포기하고 세스를 바라봤다.

“아까 그 시녀요. 많이 혼날까요?”

“걱정돼?"

"솔직히 좀 혼나길 바랐는데요. 너무 심하게 벌을 받는건 좀 그래요.”

“시녀장인 피오나는 꽤 엄한 편이지. 쫓겨나진 않겠지만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혼날 거야."

“어머, 어떡해.”

나는 얼른 입을 가렸으나 세스의 날카로운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비, 입을 가려도 눈이 웃고 있잖아.”

”에잇, 이런 건 대충 좀 넘어가요.”

눈치 없는 사장님을 구박하고 있는데 , 갑자기 마차가 느려졌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창문 가까이 따라 붙었다 나와 함께 노예 상인을 두들겨 댔던 선배님이었다.

“주군, 정체 모를 자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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