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이거 세스 이야기지? 뭐라고 동조하기 어려웠던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폐하, 제가 하나만 여쭤봐도-아니, 제가 폐하께 질문을 올리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나를 보고 왕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말하는 법도 제대로 못 배웠느냐?"
“죄, 죄송합니다. 아니, 황송합니다."
궁정 예법을 다 배우기도 전에 부르셨잖아요. 난 진짜 억울하다.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자 왕이 짧게 혀를 찼다.
“됐다. 너한테 예법 따위 기대한 적도 없으니 그냥 편하게 말해라.”
“앗, 감사합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뭐지?"
“아, 저, 혹시 폐하께서는 공작님과 혈연관계신가요?"
남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닮은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거 물어봐도 되겠지? 슬그머니 눈치를 보자 왕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녀석이 정말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은 모양이군.”
“······예.”
“굳이 따지자면 세스의 아버지는 내 오촌 아저씨고, 세스의 어머니는 내 고모의 딸이지.”
어, 그럼 촌수가 어떻게 되는 거지?
머릿속으로 복잡한 가계도를 그려 보던 나는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괜히 조상들이 8촌 내에선 결혼을 못 하게 한 게 아니었어. 족보가 아주 콩가루가 되잖아.
“내 조카지만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녀석이 야."
한숨을 쉰 왕이 전과 다른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본론은 이제부터라는 분위기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너는 왜 세스가 부인을 구하는지 아느냐?"
“아뇨.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는 말만 들었어요."
“궁금하지 도 않고?"
“궁금하지만 제가 알아도 되나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왕이 허허 웃었다. 그러고는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라리사 모어 때문이다.”
당연히 그게 누군지 내가 알 리가 없었다.
“유명한 사람인가요?”
“······.“
내 상식 없음에 당황하던 왕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설명했다.
“세스의 약혼녀였지만, 내 동생과 바람을 피워 결혼 한 망종이지.“
“헉, 엄청난 사람이군요.”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세스에게 약혼녀가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그녀가 바람을 피운 것은 더 놀라웠다.
라리사 씨, 목숨이 아홉 개는 되는 걸까.
내겐 절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바람피운 것을 걸렸을 때 세스가 보낼 눈빛을 상상하자 내장이 다 얼어붙는 것 같았다. 부르르 몸을 떤 나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목숨을 걸고 바람을 피우다니, 어떤 면에선 존경스러울 정도네요.”
내 감탄에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한 왕이 덧붙였다.
“오해할 것 같아 말해 두지만 세스가 그녀를 좋아한 건 아니다.”
“정략결혼이었나요?"
"누가 유모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겠느냐.”
그럼 뭐지? 어리둥절한 내 얼굴에 왕은 순순히 답을 말해 주었다.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었다. 선대 공작은 축은 아내와 닮았다는 이유로 라리사 모어를 양녀로 들였고, 나중엔 며느리로 삼으려 했지.”
뭐야, 그 미친 시아버지는.
“하지만 라리사 모어는 공작 부인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세스와 약혼을 하자마자 내 동생을 노려 왕자비가 됐으니까.”
“야망이 큰 사람이었네요.”
목숨을 걸고 신분 상승이라니 진짜 열정적이구나. 칭찬 같은 내 말이 거슬렸는지 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문제는 그녀가 곧 이혼을 할 거라는 사실이지.”
"엥?“
이게 무슨 소리지. 꿈을 이웠는데 왜 이혼을 해?
“이혼하려는 이유가 있나요?"
“이유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아닌데 중요한 것 같은데.
지그시 쳐다보자 왕은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선왕께서 내 동생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라리사 모어도 백작 부인으로 강등됐고, 왕비 자리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지.”
아, 그럼 라리사 모어의 최종 목적은 왕비가 되는 거였구나. 그게 안 되니까 이혼하려는 거고?
“중요한 건 그 여자가 이혼 후 공작가로 돌아올 거라는 거다. 선대 공작의 양녀이니 친정으로 오겠다고 우기면 막기가 어렵다.”
“오…….”
날 버렸던 약혼녀와 한집에서 동거해요♡라니.
사람들이 신이 나서 팝콘을 씹겠군. 물론 세스의 입장에선 난처하고 싫은 일이겠지.
“그냥 강제로 내쫓으면 안 되나요?"
“여론이 나빠질 뿐만 아니라 선대 공작이 움직일 수 도 있다. 그가 그녀의 편을 들며 날뛰면 굉장히 곤란해져.”
선대 공작이라면 세스의 아버지?
“고분 아직 살아 계셨어요?"
왕의 표정이 아주 미묘해졌다. 천하의 패륜아를 보는 얼굴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공작님이 작위를 물려받으셨으니까 이미 돌아가선 줄 알고.”
“멀쩡하게 살아 있다. 영지에 틀어박혀 칩거 중이지 만.”
“아하. 그렇구나. 살아 계셔서 다행이네요.”
"······."
그만두자. 뭐라고 변명해도 어색한 상황이다. 왕도 난감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급하게 세스의 부인을 구하게 된 거다.”
“그렇게 된 거군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했던 반용이 아니었는지 왕의 표정이 영 떨떠름했다. 나는 얼른 양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와, 정말 알고 싶던 내용이었어요. 감사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이 내 뺨을 꼬집었다. 왜 때문이죠.
“너와 있으면 도무지 진지해질 수가 없구나.”
“사람이 꼭 진지하게 살 필요는······아야!"
한참이나 나를 응징하던 왕은 내 볼이 붉어지자 그제야 손을 뺐다. 나는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 쥐며 울상을 지었다. 얼굴만 세스와 닮은 게 아니었어. 괴롭히기 좋아하는 것도 아주 똑같다. 이래서 관상이 중요한 모양이다.
그때 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세스에게 아내를 구하라고 명령한 것은, 라리사 모어가 그에게 접근조차 못 하게 막고 싶었기 때문 이다."
"아.”
확실히 왕의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다. 만약 세스가 좋은 가문 출신의 아가씨와 결혼했다면 정말 그렇게 됐을 거다.
“그런데 별 볼 일 없는 저를 데려와서 실망하셨겠네요.”
"흥, 실망까진 아니고.”
왕이 뭔가에 찔린 사람처럼 헛기침을 했다. 사실을 말한 건데 왜 저런 반응이지.
“제가 속국 노예 출신이라서 그쪽이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우습게 보고 밀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런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라리사 모어라면 널 없애 버리려고 들겠지. 그게 더 쉽고 편하니까.”
“헉, 진짜요?"
깜짝 놀라는 나를 본 왕이 피식 웃었다.
“고작 그런 것에 놀라다니, 사교계에 나갔다간 기절 하겠구나.”
“······.”
사교계가 무도회에서 친목을 다지는 곳 아니었어?
사실 천하제일 무도회 열고 적의 파로 목욕하는 그런 곳이었던 거야?
“그렇게 겁먹을 것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세스가 널 지켜 줄 테니까. 오늘도 자신의 팔을 걸고 너를 지켜 냈지 않느냐.”
왕의 목소리엔 한숨이 섞여 있었다. 눈치를 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의 말씀대로라면 전 공작님의 방패잖아요. 그럼 제가 공작님을 지켜 드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니, 세스가 널 데려온 건 내 명령으로 자리를 채울 사람이 필요했을 분, 너를 방패로 삼을 생각은 없었을 거다."
어라 방금 심장이 따끔했다.
왕이 내게 화를 낸 것도 아니고 상처받을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역류성 식도염인가?'
나는 뜨끔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나를 반히 쳐다보던 왕이 말했다.
“이블린 그란 지금의 너는 세스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그건 알고 있겠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는 시무룩해졌다. 은혜를 갚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었다니.
풀이 축은 나를 보고 흠흠 헛기침을 한 왕이 덧붙였다.
“하지만 내 시녀가 된다면 세스의 방패가 될 수 있다.”
"네? 어떻게요?"
"왕의 시녀는 곧 왕의 사람이라는 듯이니까.”
그녀의 말에 의하면 왕족의 시녀는 굉장히 명예로운 자리란다 하는 일도 일상적인 시중과 왕의 말상대 정도라고 했다. 신분 높은 집안의 여식들이 권력자에게 눈도장을 찍는 곳이랄까.
“내 시녀라는 이유로 힘을 실어 줄 수도 있으니, 라리사 모어와의 싸움에서 밀리지도 않을 거다. 네 신분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할 테지.”
이래도 안 넘어올 거냐는 왕의 눈빛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공작님께 먼저 여쭤봐도 되나요?”
겸업을 하려면 우선 사장님께 허락을 받아야겠지.
내 소심한 부탁에 하하 웃은 왕은 하루를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건방지다고 한 대 쥐어박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그러운 태도였다.
"네 몸이 퍽 약해서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하더구나.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누워 있어라.”
할 말을 마친 왕은 그대로 훌쩍 떠나 버렸다.
홀로 남은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일단 하루는 벌었네.’
새로 알게 된 정보가 너무 많아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왕의 조카인 세스.
그의 전 약혼녀이자. 곧 이혼녀가 될 라리사 모어.
라리사 모어를 몹시 싫어하는 왕.
라리사모어의 편을 들어 줄 것 같은 선대 공작.
생각보다 복잡한 관계에 머리가 아팠다.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왕의 말에 거짓은 없겠지만, 모든 걸 솔직히 밝힌 건 아닐 테니까.
그래서 세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이놈의 사장님이 올 생각을 안 했다.
‘아직 내가 깨어난 걸 모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