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808화 (808/858)

제808화

여지는 결국 털썩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폐하를 뵙게 해 주시오! 폐하께서 만나 주지 않으신다면 여기서 일어서지 않겠소!”

기해의 얼굴이 굳었다.

“대인, 그리하셔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유 재상도 양왕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함께 무릎을 꿇었다.

“황제를 뵙게 해 주십시오.”

뒤에 선 진무와 상서들도 잇따라 무릎을 꿇었다.

기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급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좋습니다! 내일이 선황제 폐하의 기일이니 폐하께서는 내일부터 이레 동안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선황제 폐하를 위해 불경을 읽고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토록 절실하니 함께 축원을 올리시지요.”

꿇어앉은 채 기도나 올리라니! 여지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중신들의 단체 항의이고 간언이거늘……! 여지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쓰러져 버렸다.

기해가 돌아서서 가려 하는데 산꼭대기에서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왔다.

주운환이 드디어 입을 열며 그쪽을 가리켰다.

“저건 무슨 소리입니까? 저기, 왜 연기가 나는 겁니까?”

기해와 수풍, 유 재상을 비롯한 전원이 깜짝 놀랐다. 주운환이 보는 쪽으로 고개를 향하니 산꼭대기 어딘가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니, 저게 뭐요?”

깜짝 놀란 진무가 말했다.

“불이 난 것 같습니다.”

대꾸하는 주운환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놀란 기해가 바로 선을 그었다.

“불이라니요. 저건, 저건 법화사 사람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식사 준비? 본왕이 기억하기로 법화사 승려들의 점심시간은 오시 일각입니다. 벌써 미시未時(오후 1시~3시)가 다 되었는데 어찌 지금 연기가 난다는 말입니까?”

주운환이 바로 반박해 오니 기해는 짜증이 났지만 웃어넘겼다.

“네, 소인이 순간 잘못 기억했습니다. 경내에 승려들이 선황제 폐하를 위한 물건들을 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선황제 폐하의 기일은 내일 아닙니까. 제사를 올리는 것도 물건을 태우는 것도 내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을 피우다니,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할 말이 바닥난 기해는 도리어 화를 냈다.

“그건 요명대사가 시키신 일이니 대사의 뜻이 있겠지요.”

“아, 그렇다면 무엇을 태우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주운환이 번번이 말꼬리를 잡으니 기해는 악에 받쳐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진서왕이 알……! 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운환 뒤에 있던 여양이 앞으로 달려들어 기해의 얼굴을 때렸다. 기해는 철푸덕 땅바닥에 쓰러졌다.

“아악……! 무슨 짓입니까? 반역입니다! 반역이야!”

기해는 부들부들 떨며 주운환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숨을 멈춘 그때, 수풍이 소리쳤다.

“진서왕!”

산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금위군들의 시선이 모두 이곳을 향했다. 가까이 있던 병사들은 성큼 다가와 칼자루에 손을 대고 있었다.

“쳇, 어떻게 된 물건이 전하에게 불경하게! 고작 사품 내관 주제에. 나도 사품 호위 무사이니 같은 등급인데 한 대 때린다고 어떻게 되겠어?”

여양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유 재상, 주 선생 등은 놀라 경황이 없었다. 같은 등급 둘이 몸싸움을 한다? 아니, 같은 사품이라도 기해는 황제 곁에 있는 사람이다! 재상 가문에선 그 집 문지기도 칠품 관리라고 하지 않는가! 하물며 황제다! 개도 주인을 봐 가며 때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화가 난 수풍이 입을 열었다.

“전하, 기해의 태도가 불경하긴 하지만 폐하를 대신해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해는 황제의 얼굴을 대신하고 있는 거다!

주운환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그렇다면 더욱 맞아야지요! 아랫사람이 이렇게 행동하도록 폐하가 내버려두시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 감히 폐하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다니. 본왕은 당장 폐하를 뵈어야 하겠습니다!”

주운환은 더 이상 그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가 무력을 써서라도 이곳을 돌파할 기세를 보이자 기해는 체면과 통증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전하……! 소인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는 지금 요명대사와 물건을 태우며 내일 있을 제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쿨럭쿨럭.”

주운환이 차갑게 웃었다.

“그렇다면 말해 보십시오. 뭘 태운 겁니까?”

기해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둘러댔다.

“향을 올리고, 선황제 폐하 생전의 옷이나… 뭐 그런…….”

“허튼소리! 선황제 폐하의 옷은 출상할 때 이미 관에 넣어 두었는데 그걸 꺼내 태운다는 말입니까?”

기해의 얼굴색이 달라졌다.

“아니, 소인이 헛갈렸습니다. 저건… 지전을 태우는 것입니다! 지전… 아아악……!”

기해의 몸이 다시 붕 떴다. 이번에는 주운환의 발길질에 걷어차여 기해는 계단 곁의 돌기둥에 부딪혔다. ‘퍽’ 하는 큰 소리와 함께 기해가 울컥 피를 토했다.

“진서왕! 뭐 하는 짓입니까?”

수풍이 크게 소리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유 재상과 사람들은 섬뜩한 빛에 눈이 부셨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더욱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뭐 하는 거냐고요? 그 말은 내가 기해에게 묻고 싶은 말입니다!”

주운환의 눈빛은 수풍을 비롯한 금위군이 들고 있는 검보다 더욱 번쩍였다.

“기해의 말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습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기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저 산이 몹시도 수상합니다. 선황제 폐하의 제사를 망치더라도 저 산을 제대로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아니, 당신……!”

기해는 대경실색했지만 일어서지도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사월 열이틀 전에는 누구도 산을 올라서는 안 된다고 명하셨습니다! 전하는 지금 감히 황명을 어기려는… 쿨럭……!”

“진서왕, 그만 돌아가십시오!”

수풍이 검을 쥐고 한 걸음씩 다가섰다.

주운환의 눈빛이 번쩍이더니 입가에 잔혹한 웃음이 스쳤다. 수풍이 가까이 오는 그 순간, 그는 살짝 몸을 숙이더니 팔꿈치로 수풍의 배를 가격했다. 사람들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수풍은 이미 저만치 나가떨어져 있었다.

“아이고, 진서왕! 아니……!”

유 재상과 다른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정말로 무력을 쓰다니! 간이 너무 큰 것 아닌가!

주변 금위군들은 금세 얼굴이 변해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하나 거의 동시에 주변 풀숲에서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대신 일행들이 놀라서 벌벌 떨며 돌아보니 주변 풀숲에 경위영 병사들이 몰려나와 있는 게 아닌가! 앞에 선 사람들은 활을 들고 뒤에 선 사람들은 장검을 쥐고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진서왕, 뭐 하는 겁니까?”

유 재상이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주운환, 감히 사병을 일으켜 황제를 공격하다니!”

수풍이 소리쳤다. 그는 벌써 입가의 피를 닦고 앞으로 박차고 나왔다.

“반역이다! 반역이야!”

오봉이 뒤에서 소리치며 주변을 주시했다. 그는 황제가 4만 명은 족히 되는 사람들을 이끌고 궁을 나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딜 간 거지?

“본왕은 이미 기해가 폐태자의 잔당과 내통해 산에서 폐하를 해하려 한다는 밀서를 받았습니다! 믿지 않았었지만 지금 모두 명백해졌습니다! 기해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고 여러 번 번복하면서 폐하를 뵙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을 보십시오! 이자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고 폐하의 안위가 위험에 처한 것이 분명합니다!”

주운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뭐라고?”

“뭐라고요?”

유 재상을 비롯한 모두가 깜짝 놀랐다.

수풍도 화들짝 놀랐지만, 황제가 출궁 전 이미 자신에게 여러 번 일러두었음을 재차 떠올렸다. 설령 기해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 해도 그 또한 황제의 뜻일 것이다! 게다가 황제는 벌써부터 진서왕을 불신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헛소리!”

수풍의 일갈에 금위군의 칼끝이 모두 주운환을 향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주운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작 이 조무래기들뿐입니까? 폐하께서 데리고 가신 4만 병마는 어디 있습니까? 금군 통령은요? 어째서 모두 보이지 않지요? 폐하께서도 사라진 것 아닙니까? 언동을 불러 주십시오!”

수풍 또한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언동 통령은 당연히 폐하의 곁을 지키고 있겠지요! 진서왕, 한순간의 충동으로 대역죄를 범하지 마십시오! 기다리시면 제가 직접 산에 올라가 여쭙겠습니다!”

“본왕이 직접 가서 여쭙겠습니다. 또 폐하께 위험이 닥쳤으니 본왕이 구출해야 합니다! 본왕이 틀렸다면 관직과 작위를 내놓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 죽음으로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누구든 본왕을 막으려 한다면 그 시체를 밟고 갈 것이니 길을 비키십시오!”

그러고는 앞장서서 수풍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여한은 주운환의 정예군 천 명과 함께 돌격해서 금위군과 싸움을 벌였다.

법화사 아래 산자락은 금세 혼란에 휩싸였다. 주운환의 친위군과 금위군이 한데 붙어 전투를 벌였다. 유 재상을 비롯한 문신들은 기함하고는 뒷걸음질 쳐 가장자리에 웅크렸다.

금위군은 지난 일 년 동안 언동 형제에게 훈련을 받은 용맹한 군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용맹해도 응성이라는 살육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정예군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수만이었던 금위군은 다 어디 갔는지 고작 수천에 불과했고, 전투에 참여한 것은 겨우 2천 남짓이었다. 그들은 주운환의 친위대에게 곧 제압당했다.

주운환은 수풍에게 중상을 입히고 산으로 올라갔다.

누군들 행동하기 전에 퇴로를 확보해 두려 하는 법. 양왕 같은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양왕은 벌써 자신들 사이의 퇴로를 끊었다.

양왕에게 되돌릴 생각이 있었다면 분명 기해에게 말을 남겨 두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여기 온다면 주요와 아이들을 바쳐 제사를 지내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하니 원만하게 상황을 마무리 지으라고 기해에게 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양왕은 그러지 않았다. 기해는 양왕의 황당한 짓을 감춰 주느라 급급했다. 양왕이 퇴로를 확보해 두었다면 자신도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운환은 단숨에 산꼭대기까지 달려갔다. 유 재상과 여지 등도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쫓아 올라갔다. 단숨에 산꼭대기까지 내달렸더니 수명이 반은 줄어든 것 같았다!

산 정상에 도착하자 한 무리의 승려들이 바삐 움직이며 물을 길어 감은전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유 재상 등은 하얗게 질렸다. 정말 불이 난 것이다! 그것도 감은전이라니! 거기는 황제와 황후가 머무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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