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5화
위 할멈의 꾀죄죄한 모습이 떠오른 그는 다시 뜨거운 물로 그릇을 한 번 데웠다. 그러고는 자신이 직접 찐빵을 찢어 그릇 안에 담갔고, 안에서 풀어지는 찐빵을 쳐다보며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그가 전에 먹었던 음식들은 전부 진귀한 것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진귀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도 한동안 건량을 먹기는 했지만 찐빵을 물에 풀어 먹는 방법은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먹이지 않으면 그녀가 굶어 죽을 것 같으니 지금은 이렇게 해서 먹일 수밖에 없었다.
조앵기는 예상외로 이 찐빵을 받아먹었다. 방금 전 너무 쓴 약을 먹어 괴로웠기 때문인지 이 풀어진 찐빵이 그런대로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하나 몇 숟가락 받아먹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벽 쪽으로 돌아눕더니 더는 먹지 않았다.
양왕은 싸늘한 눈으로 조앵기를 쓱 쳐다보더니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아직 해시亥時(밤 9시~11시) 일각밖에 되지 않았지만 농촌 사람들은 등불을 켜 두는 게 아까워 일찍 잠이 들었다. 위 할멈도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촌부의 초가집인 이 집은 크기가 작아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방이 하나씩밖에 없는데 하나는 주인인 할멈이, 나머지 하나는 양왕과 조앵기가 차지했으니 주 선생은 주방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부뚜막은 좀 전에 물을 데웠던지라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솥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길쭉한 널빤지를 몇 개 깔아 놓으니 항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어 사람이 누워 잘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주 선생이 잘 준비를 하는데 양왕이 그를 찾아 주방에 들어서더니 오늘 받았던 서신을 꺼냈다.
“도성에서 온 서신에 운환과 비적 떼 일이 해결되었다고 쓰여 있네.”
“아!”
주 선생은 그 서신을 건네받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해낼 줄 알았습니다. 이제 운환과 연락을 해야 할까요?”
양왕은 도성에 자신의 비밀 연락원을 심어 놓아 그에게 서신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운환은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비장의 패이기 때문에 주 선생과 언동 형제를 제외하고는 도성에 있는 비밀 연락원조차 그와 주운환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주운환과 비적 떼 사이의 일은 하도 떠들썩하게 퍼져 도성 사람들 모두 그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 서신에도 그 내용이 적혀 있었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네.”
양왕이 싸늘한 눈빛을 번득였다.
“무슨 일이옵니까?”
주 선생이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짓자 양왕은 음산하고도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여러 증거들이 충분히 확보되었지만 동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황제는 분명 사람을 시켜 운환이와 비적의 관계를 조사하게 했을 거네. 서신에는 대전에서 비적들이 운환이가 그 홍씨의 외손자라고 외쳤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네. 그렇게 그쪽으로 유도했던 거고 황제는 정말로 의심스러워져 그 부분을 조사했지.”
“하지만 이미 이 일은 다 끝난 것 아닙니까?”
“아니, 끝나지 않았네.”
그리 말하는 양왕의 매력적인 눈동자에는 차디찬 빛이 어른거렸다.
“운환이는 상황을 모르고 있으니 끝났다고 생각할 거네! 하지만 난 이 일이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네. 어쩌면… 처음부터 최종 목적은 운환이를 비적 떼와 엮어 모함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빌어먹을 황제가 운환이의 출생을 조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네. 그리하여 운환이가 누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거나 ‘위조’하려는 게지.”
“예?”
그렇게는 상상도 못 했던 주 선생은 낯빛이 확 변했다.
“저희는 사정을 알고 있으니 이쪽으로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운환이는 사정을 모르니 미처 예상치 못할 것이옵니다. 만약 황제 폐하가 운환의 출생을 조사한다면…….”
그러자 양왕의 눈빛이 더욱 얼어붙었고, 이어 그는 붉은 입술을 위로 올리며 냉혹한 웃음을 지었다.
“분명 감동할 거네. 아주 감동하겠지. 그리고 심한 죄책감을 느낄 거네. 하지만 죄책감을 느낀 후에는 운환이가 분명 나와 한패라고 생각하겠지. 그럼 그 애를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네!
천하와 백성을 위해 ‘대의멸친大義滅親’하겠지. 방법을 강구해 비밀리에 운환이를 살해할 거다, 이 말일세. 그리고 그 아이를 살해한 후에는 또 가슴이 찢어지게 한바탕 통곡을 하겠지.”
주 선생은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하하 소리 내 조소했다.
“폐하라면 그러고도 남죠.”
“언젠가는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
양왕 역시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일을 막아야 하네.”
“하지만 저희는 사람이 부족하옵니다. 도성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장애물로 가득하죠. 차라리 운환이의 출생을 본인에게 알려 주는 건 어떨까요?”
양왕은 침묵하다가 끝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되네.”
주 선생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지금 어찌하고 싶으신 것이옵니까?”
“우선 박주에 가서 그 사람들을 기용한 다음 사주에 가서 운환이를 조사하는 걸 막을 것이네.”
양왕이 말한 ‘그 사람들’은 바로 소 황후가 남긴 자들이었다. 그들은 소 황후에게 충성을 다하는 소씨 가문 군사들로 숫자는 천 명밖에 되지 않지만 정예 부대였다.
하지만 정예 부대라는 것도 이미 20년 전의 일이었고,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지금은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주 선생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른 의견을 꺼냈다.
“운환이에게 서신을 보내 병사들을 파견하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병사들을 이동하는 건 곤란하네.”
양왕이 재차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운환이의 병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다음에 도성으로 돌아가게 되면 너무 늦어. 빌어먹을 황제의 몸이 그때까지 병마를 견뎌 내진 못할 거네. 더는 기다릴 수 없네! 한 달 안에 반드시 도성으로 돌아가야 하니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지금 도성에 서신을 보내면 움직일 수 있을 거네.”
“예.”
주 선생은 대답하며 흥분 섞인 어두운 눈빛을 번득였고, 양왕이 항에서 내려오자 다시 제 생각을 꺼냈다.
“전하, 왕비 마마는 이곳에 남겨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위 할멈에게 돈을 더 주며 보살펴 주라고 하면 되옵니다.”
그러자 양왕의 낯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
“그건 안 되네.”
주 선생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전하, 왕비 마마는…….”
양왕은 픽 하고 냉소를 짓더니 매력적인 눈을 깜빡거리며 말허리를 끊었다.
“그것들이 내게 어리석은 여편네를 선물했으니 내 다시 그것들에게 돌려줄 것이다! 내 반평생의 치욕을 이리 쉽게 내버리면 내 체면이 어찌 되겠느냐?”
양왕은 그리 말하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주 선생은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 그의 말이 지당했다. 원수가 자신에게 쓰레기와 다름없는 쓸모없는 것들을 잔뜩 선물했는데, 그걸 몰래 버려 버린다면 어찌 체면이 서겠는가? 버리려면 그들 앞에 버려야 했다.
주방을 나온 양왕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에는 희미한 등잔불이 켜져 있었고 조앵기는 잠이 든 후였다. 양왕은 겉옷을 벗고 침상에 오르더니 둘둘 말아 놓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여전히 열이 나고 있어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는 입꼬리를 위로 올리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고, 쏙 안긴 그녀가 순간 작은 난로처럼 느껴졌다.
양왕은 코웃음을 치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 아주 따뜻하네. 과연 항炕답다.”
“토자포…….”
조앵기는 그의 품속에서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양왕은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양왕은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주 선생과 함께 자기 수하들을 찾아갔다.
양왕이 다시 위 할멈의 집으로 돌아와 보니 조앵기는 언제 깼는지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침상 위에 앉아 두 손으로 찐빵 하나를 뜯어먹고 있었다. 하지만 찐빵을 뜯으면서도 눈물을 떨구었고 입도 삐죽거리며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그랬다. 조앵기는 이 식사가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배가 너무 고팠기에 일단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걸로는 도저히 성에 안 차 저도 모르게 손으로 찐빵을 만지작거렸다. 토끼 귀라도 만들어 낼 듯이 말이다.
그때 양왕이 안으로 들어오자 조앵기는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찐빵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지만, 손으로 잘 움켜잡더니 고개를 숙인 채 계속해서 찐빵을 뜯었다.
양왕은 그녀가 알은체도 하지 않자 어두운 표정으로 혼을 냈다.
“찐빵조차 제대로 못 먹는 것이냐? 부스러기가 이불 위에 다 떨어져 있는데 저녁에는 어떻게 자려는 것이냐?”
조앵기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손에 들고 있던 찐빵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뺨이 한껏 부푼 채로 고개를 숙여 이불 위에 떨어져 있는 부스러기를 손으로 주웠다.
양왕의 말과 달리 부스러기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고, 작은 것들이 조금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몸이 너무 피곤했고 춥기도 해서 이 항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하여 이곳에서 찐빵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부스러기를 치우고는 항의 가장자리로 기어가 그릇을 들고 물을 마셨다. 그런데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그릇마저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어리석은 여편네가!”
양왕은 버럭 화를 내며 성큼성큼 침상 곁으로 걸어가더니 그녀를 세게 끌어당겼다.
“윽!”
조앵기는 퍽 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양왕은 그녀의 얼굴에 묻은 찐빵 부스러기를 보고는 얼굴을 닦아 줬다. 조앵기는 괴로워서 두 눈을 질끈 감았고 그가 얼굴을 다 닦자마자 둘둘 말아 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고얀 것!”
양왕은 그녀가 자신을 상대도 하지 않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조앵기는 여전히 이불 속에 웅크린 채 두 눈만 내놓고 조그만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전하, 전 아픈 몸이에요……. 너무 가엾잖아요. 그러니 저에게 모질게 굴지 마세요! 저한테 좀 잘해 주세요…….”
그러나 양왕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쓱 보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 조앵기는 떠나는 그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더욱 몸을 작게 웅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