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4화
“건량이 있긴 하지만 양이 충분치 않네. 다들 굶주려 있는데 어떻게 적에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이 설산을 넘어가 쉴 곳을 찾고 먹을 것도 찾아야 하네. 언동아!”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언동이 말을 차며 앞으로 나왔다.
“예, 전하.”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쉴 만한 곳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거라.”
“그건…….”
언동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남아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 여기서 더 사람을 나눠 정찰을 했다가 만에 하나라도 도성에서 보낸 추격자들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양왕을 보호할 병력이 부족해질 것이었다.
“전하, 저희들은 건량을 먹지 않아도 되옵니다. 마초馬草만 먹어도 되옵…….”
그런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왕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도성 밖으로 나온 후로 내 명령이 명령 같지 않은 것이냐?”
“아니옵니다!”
언동은 소스라치며 그럴 리 없다고 당장에 부정했다.
“소인은 응당 전하의 명에 따를 것이옵니다.”
“그럼 어서 가지 않고 뭐 하느냐?”
“예.”
냉랭한 독촉에 언동은 별수 없이 몸을 돌렸다. 현재 남아 있는 사람은 열다섯 명뿐이었다. 언동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섯 명을 차출한 후 흩어져서 묵을 만한 곳을 수색했다.
양왕은 다섯 명만 데려간 그를 쳐다보다가 자신의 품속에 기댄 그녀가 펄펄 끓는 물처럼 열이 오른 것을 다시금 느끼자 초조한 마음이 들어 표정이 더욱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
대략 반 시진이 흐르자 마침내 준마를 타고 돌아오는 언동의 모습이 보였다.
“전하, 여기서 20리 정도만 더 가면 작은 산촌이 나옵니다.”
“그래.”
양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의 배를 참과 동시에 말채찍을 후려치고 앞으로 돌진했다.
그렇게 또 반 시진이 흐르자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그때쯤 저 멀리 희미한 빛을 발하는 등불이 몇 개 보였다. 태산 밖에 위치한 작은 산촌에는 세어 보니 대략 스무 가구 정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양왕과 주 선생은 함께 마을로 들어갔고 언동을 포함한 십여 명의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둔했다. 양왕과 주 선생은 한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이 집은 언동이 먼저 알아본 곳으로 과부가 사는 집이었다. 집주인은 나이 든 할멈인데,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고 나중에 슬하의 딸이 마을 밖으로 시집을 간 후로 혼자 남게 된 처지였다.
“뉘시오?”
집 안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 끼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더니 칠순을 넘겼을 법한 할멈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오래된 두꺼운 솜옷을 입은 할멈은 두 사내를 보고는 어리둥절했다. 청년 한 사람과 노인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건장한 체격의 청년은 얼핏 봐도 그린 듯한 얼굴을 갖고 있으나 얼굴색이 영 까매 좋지 않았고 품 안에는 웬 사람도 한 명 안고 있었다.
두 사내는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보단 행색이 더 나았고 보아하니 도성에서 온 사람들 같았다.
“안녕하시오.”
주 선생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지나가던 과객들인데 오늘 하룻밤만 이곳에서 묵을 수 있을까 합니다.”
할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낯선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려 했다.
“그… 당신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오?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데 어쩌다 이런 두메산골까지 오게 된 게요?”
“우리는 원래 도시와 관아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장사가… 에휴. 아무튼 큰 손해를 보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게 됐지 뭡니까. 귀향길에 앞에 있는 설산에 들어섰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는데, 우연히 이곳에 등불이 켜져 있는 걸 보게 됐죠. 하룻밤만 묵고 싶습니다. 이 애들은 내 아들과 며느리예요.”
할멈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 영감은 인자하고 선량해 보였고 청년의 품 안에 있는 사람은 얼굴을 반쯤 내밀고 있었는데 젊은 처녀가 틀림없었다. 한데 이 처녀는 얼굴이 불그스레한 것이 어디가 아픈 모양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약해진 할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와요.”
“아유,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주 선생은 아주 기뻐하며 연신 인사를 했다.
그들은 할멈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흙벽돌로 지은 초라한 초가집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조그만 응접실이 보였고 좌우 양쪽으로 작은 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방은 밖에 있는 초막草幕(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이어 조그마하게 지은 막집)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쪽으로 와요.”
할멈은 손짓을 하며 그들을 오른쪽에 위치한 방으로 들였다.
“내 딸이 출가하기 전에 지내던 방인데 여기서 하룻밤 묵어요.”
“네, 고맙습니다.”
주 선생은 그리 말하며 소매 안쪽에서 작은 은각銀角 하나를 꺼냈다. 그는 그녀의 손에 그 5전짜리 은각을 쥐여 줬다.
“아이… 참 괜찮은데.”
할멈은 두어 번 사양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돈을 받아 들었다. 이 5전짜리 은각은 마을 사람들이 한 달 내내 일해도 벌 수 없는 큰돈이었다. 그러니 이 연로한 할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할멈은 뛸 듯이 기뻐하며 이렇게 자기를 소개했다.
“난 성이 위씨이니 위 할멈이라고 부르면 돼요.”
한편 양왕은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조앵기를 항炕(침상형 입식 난방 장치) 위에 올려놨는데, 항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위 할멈은 돈을 받더니 친절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그녀는 알아서 얼른 땔감을 가져오더니 방 안의 항에 불을 때 주었다.
조앵기는 침상 위에 눕더니 낡은 이불을 목까지 덮었다. 그리고 항이 데워지자 그제야 고른 숨을 쉬었다. 원래도 작았던 그녀의 얼굴은 도성 밖으로 나온 뒤 반쪽이 되어 더욱 가여워 보였다.
양왕은 어두운 얼굴로 침상 옆에 앉았다.
안으로 들어온 주 선생은 조앵기의 불그스름한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언제부터 이런 것이옵니까?”
“오후부터 그랬네. 정말 짐이 되는 여인이다.”
양왕이 불만을 토하자 주 선생은 앞으로 다가가 조앵기의 맥을 짚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열이 나는 것뿐이옵니다. 하지만 열이 내리지 않으면 각혈을 할 수도 있겠사옵니다. 전하, 노부老夫(늙은 사내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가 위 할멈에게 약을 좀 찾아봐 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그리 말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고 양왕은 침상 곁에 앉아 주 선생이 위 할멈과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며늘아기가 병이 났는데 이 마을에 낭중郎中이 있습니까? 낭중에게 가 약을 좀 구해 주십사 부탁하고 싶은데요.”
“예, 그럴게요.”
“사실… 우리가 빚을 진 상태라 빚쟁이들이 찾아올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러니 잠시 후에 낭중을 찾아가면 우리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시구려.”
그는 그리 말하며 몇 가지 약을 알려 줬다.
“알겠어요. 내가 병이 나서 약을 구하러 왔다고 말하면 돼요. 참, 솥 안에 찐빵이 있으니 편하게 먹어요.”
문이 여닫히는 소리와 함께 위 할멈은 밖으로 나갔고, 주 선생은 녹두가루와 팥가루 등을 섞어 만든 찐빵이 든 작은 쟁반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양왕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찐빵을 찢어 조앵기의 입에 넣어 줬다. 그런데 조앵기가 이내 양왕의 몸에 퉤 하고 찐빵을 뱉는 게 아닌가. 그러자 양왕의 표정이 삽시간에 음산해졌다.
“이 고얀 것. 내 앞에서 음식을 가리는 것이냐!”
그는 그리 말하며 그릇을 집어 던졌고 주 선생은 옅은 한숨을 쉬며 그런 그를 만류했다.
“전하, 병이 나서 정신이 온전치 않아 그런 것이니 우선 약부터 먹인 후 다시 말씀하시지요.”
잠시 후, 위 할멈이 돌아오자 주 선생은 얼른 약을 건네받더니 주방에 가서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이각이 흐르고 마침내 약이 다 달여졌다.
양왕은 조앵기를 움켜잡아 일으키더니 그녀의 입을 억지로 벌려 약을 쏟아부었다.
“웁… 커헉… 윽……!”
조앵기는 약이 너무 써서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그 약은 거침없이 그녀의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게 그녀는 몽롱한 상태로 약 한 대접을 전부 마시게 되었다.
약그릇을 비운 양왕은 다시 그녀를 침상 위로 던져 버렸다.
“캑캑……!”
병이 나 정신이 멀쩡하지 못한 조앵기는 기침을 하다가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이불을 감싸 안은 채 눈물을 흘리며 중얼중얼했다.
“토…….”
“토?”
양왕은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토라니 무슨 말이냐?”
그러고는 조앵기에게 다가가자 웅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토자포! 토자포…….”
양왕은 표정이 음랭하게 변하더니 그녀의 옷깃을 움켜잡으며 짜증을 냈다.
“이 고얀 것! 아파서 다 죽어 가는 것이 머릿속에는 온통 토자포 생각뿐이구나! 토자포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이냐?”
그는 그리 말하며 그녀를 침상 위로 밀쳐 버렸고 조앵기는 서러움에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한편, 문 앞에 서 있던 위 할멈은 노성을 듣고 깜짝 놀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내를 때리는 건가? 이걸 어쩌지?’
위 할멈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앞으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이보게, 젊은 양반. 내가 자네 아내에게 음식을 좀 먹여 보겠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한쪽에 놓인 나무 탁자 위에 찐빵 몇 개를 올려놨다. 그러고는 찐빵을 잘게 찢어 그릇에 넣더니 뜨거운 물을 부어 그 안에 담가 놨다.
잠시 후, 그녀가 조앵기에게 그걸 먹이려고 하자 양왕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 내가 하겠습니다! 그러니 나가 보세요.”
위 할멈은 얼음처럼 차가운 그의 말투에 깜짝 놀라더니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아, 알겠네.”
그녀는 불린 찐빵이 들어 있는 그릇을 나무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주 선생은 이마에 난 식은땀을 닦더니 얼른 위 할멈의 뒤를 따르며 변명을 했다.
“우리 아들이 성격이 좀 그래요! 에휴, 쟤가 성격이 억세고 또… 크흠, 화를 잘 내서…….”
“아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위 할멈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주 선생을 쳐다보더니 동질감을 느낀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 딸도 그렇다우. 자식들은 참… 어떨 땐 부모 속을 너무 썩인다니까……. 에휴. 그쪽이나 나나 매한가지지 뭐.”
농촌의 흙집들은 대개 벽이 얇은지라 양왕은 방 안에서 위 할멈과 주 선생이 나누는 ‘자식 키우며 느끼는 소회’를 들을 수 있었다. 수려한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지나 싶더니, 양왕은 위 할멈이 담가 놓은 찐빵을 창문 밖으로 쏟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