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0화
진서후부를 나온 녹지는 엽씨 가문과 장명가에도 들렀다. 친척들을 찾아가 주묘서의 혼례일에 일찍 도착해야 하며 안 오면 안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전했다.
녹지는 밖에서 한 바퀴를 활보하고 나서야 주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그때 일상원에서는 진씨와 주묘서는 방 안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 정 마마는 한쪽에 서 있었다. 셋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주묘서의 얼굴이 새빨갰다.
그때 녹지가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묘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온갖 핑계를 대며 안 오면 어떡해?”
“그럴 리 없습니다.”
“마님, 큰아가씨. 걱정 마세요. 이미 밖에 다 퍼진 일인걸요. 그분들은 아가씨의 오라버니와 새언니입니다. 어떻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감히 오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욕을 한바탕 먹을 겁니다.”
정 마마도 미소를 지으며 녹지의 말에 동조했다.
태자는 측비를 맞이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알렸고 의도적으로 주운환과 자신의 관계를 부각했다. 조금이라도 안면을 튼 사람은 전부 초대했으니 주운환 부부는 오고 싶지 않아도 와야만 했다.
* * *
그 시각 양왕부.
평정소축 반청飯廳 안에는 시녀들이 한 줄로 나란히 질서 있게 서 있었고 양왕과 조앵기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양왕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조앵기는 그제야 슬그머니 그를 힐끗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자 그녀는 조금 겁이 났지만 엽연채를 생각하니 그래도 용기가 생겼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양왕을 불렀다.
“전하.”
“왜 그러느냐?”
양왕은 매혹적인 눈으로 싸늘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이틀 뒤에 태자 전하가 측비를 맞이하는데 아주 성대하게 치른다고 해요…….”
조앵기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저, 저도 가고 싶어요…….”
그녀는 분명 양왕이 욕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양왕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허락했다.
“하. 가고 싶으면 가거라!”
“정말요?”
조앵기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도 흔쾌히 허락해 줄 줄이야. 그가 요즘 기분이 꽤 좋은 모양이었다. 조앵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흐뭇해했다.
식사를 마친 조앵기는 씻고 침상으로 달려가 이불 안에서 조그만 수람을 꺼냈다. 안에는 낙자가 가득했다.
그녀는 낙자를 꺼내어 개수를 세어 보았다. 열 개. 하나에 2문文이니 열 개면 20문이었다. 낙자가 이렇게나 쑥쑥 늘어나니 자신은 금방 부유해질 터였다.
‘양왕부를 나가면 매일 낙자를 만들 거야. 그럼 먹을 게 해결될 테니 날마다 연채랑 놀 수 있을 거야.’
어떻게 양왕부를 나갈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조앵기는 이런 꿈을 품고 있었다. 희망이 생기자 그녀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양왕이 안으로 들어와 보니 그녀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침상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날카로운 두 눈에는 어둡고 싸늘한 빛이 스쳤고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집 안에서 몰래 남생이를 키우고 몰래 저런 쓸데없는 것들을 만들며 감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했는데 이제는 날마다 밖으로 쏘다니려고 한다. 그녀의 세계에 자질구레한 것들이 너무 많이 생겨 버렸고 갈수록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편, 조앵기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오늘이 보름날임을 잊었던 것이다.
그녀는 얼른 구르던 동작을 멈추고 얌전히 침상에 누웠다. 그 물건은 침상 구석으로 숨겨 놓고는 쭈뼛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전하.”
* * *
시월 스무날은 주묘서가 출가하는 날이었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시월 열아흐레에 주씨 가문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두 사람은 주묘서의 오라비와 새언니이니 당연히 와서 그녀의 출가를 도와야 했다. 손님들처럼 출가일 당일에 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진씨, 주 백야, 강심설은 일상원에서 내일 일정에 관한 세부사항을 의논하는 중이었다. 백 이낭과 비 이낭, 주종과와 주묘화마저 진씨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와 있었다.
물론 진씨의 속내는 이들과 정말 함께 의논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이제 주묘서가 떵떵거리며 살게 됐으니 당연히 모두 불러와 잘나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게 하려는 것이었다.
“셋째 나리와 셋째 마님이 오셨습니다.”
녹엽이 밖에서 소리쳤다.
활짝 핀 꽃 문양이 들어간 발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걷히자, 주운환과 엽연채가 함께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존귀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진씨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주묘서가 곧 황실로 시집가 귀인이 된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왔구나.”
“아버지, 어머니.”
“아버님, 어머님.”
두 사람이 예를 올렸다.
“하하, 앉거라!”
주 백야는 두 사람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씨는 그들이 자리에 앉는 모습을 쳐다보며 저도 모르게 삼만 냥이나 됐던 엽연채의 혼수가 떠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강심설에게 말했다.
“이따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사람을 시켜 네 큰시누이의 혼수를 그 애의 처소로 옮기게 하거라. 사만 냥이나 되니, 그 무겁고 많은 것들을 언제까지 옮겨야 할지 모르겠구나.”
태자가 측비를 들일 땐 정상적으로 삼서육례를 치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예물은 풍성하게 보냈다.
또 태자는 주묘서를 떠받들어 줄 생각이 있고 그녀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었지만, 측비가 태자비를 넘어서면 안 된다는 규율이 있었다. 그래서 한 단계를 낮추었는데도 무려 이만 팔천 냥의 은화를 보냈다.
진씨는 딸이 태자부에 발을 잘 붙이고 또 혼수품을 바리바리 싣고 성대하게 시집가게 하려고 돈을 꽤 많이 썼다. 태자부에서 보낸 예물을 그대로 주묘서의 혼수로 들려 보내는 건 물론이고, 진씨 본인에게 남아 있던 혼수와 최근 사람들이 주씨 가문으로 보낸 선물도 그러모아 전부 주묘서에게 주었다. 모아 보니 무려 은화 사만 냥가량이 되었다.
한편, 강심설은 주묘서가 혼수로 가져가는 액수를 듣자 짜증이 확 났다. 그녀는 혼수로 겨우 은화 몇 백 냥밖에 못 가져와 엽연채가 가져온 삼만 냥의 혼수에 이미 질투를 느끼고 부아가 치밀었었다. 그런데 자신과 마음이 맞지 않는 시누이가 갑자기 사만 냥이나 되는 혼수를 가져간다고 하니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주묘서를 위해 진씨가 집안 재산을 거덜 낸다는 생각이 드니 당연히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건 원래 자신들 부부의 것이어야 하는데 지금 주묘서의 혼수로 몽땅 줘 버리게 생긴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주씨 가문은 재기에 성공했고, 자신은 여전히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여식이었다. 게다가 이미 시어머니에게 여러 번 미움을 샀고 업신여김을 당했으니 감히 뭐라고 반대할 수는 없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진씨가 강심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강심설은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큰아가씨, 정말 으리으리하네요. 그야말로 십리홍장十里紅粧이겠어요!”
비 이낭이 얼른 주묘서를 추켜세우자 진씨는 속으로 우쭐했다.
“다 태자 전하께서 묘서를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지.”
진씨와 비 이낭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씨는 온종일 비 이낭과 주종과를 경계했고 그들이 주비양의 세자 자리를 빼앗아 갈까 봐 항상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주운환이 출세하였으니 그들에겐 공통의 적이 생긴 셈이고 함께 그에게 대적해야 했다. 게다가 주묘서가 좋은 곳으로 시집가게 됐으니 주종과가 세자 자리에 오르는 건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었으므로 비 이낭은 완전히 단념했다.
진씨와 비 이낭의 갈등은 해결된 셈이었다. 게다가 비 이낭은 주묘서에게 기대 주종과에게 좋은 혼처를 찾아 주고 싶기 때문에 일이 있을 때마다 알랑방귀를 뀌었다.
“그렇죠.”
비 이낭은 미소를 지으며 비위를 살살 맞췄다.
“전에 셋째 마님이 가져온 혼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주 많다고 생각했는데 저희 큰아가씨 혼수가 더 많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무려 삼백예순네 개의 수레에 싣는 거죠? 그야말로 십리홍장이네요.”
“에휴. 물건이 너무 많으니 수레를 늘릴 수밖에.”
진씨는 허허 웃었다. 이보다 더 영광스럽고 의기양양할 수가 없었다.
엽연채는 그들이 잘난 척을 하며 남을 폄하하고 스스로 추켜세우는 모습을 쳐다보며 조용히 있었다. 그저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입꼬리를 쓱 올려 옅은 미소를 짓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게 제일 끔찍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내일 일은 전과 마찬가지로 큰며느리에게 맡길 것이다. 엽씨 너는…….”
진씨는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젊지만 이제 한 집안의 주인마님이 되었으니 너도 일 처리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잠시 후에 네 형님과 함께 사람들이 혼수를 옮기는 걸 지켜보거라!”
“예!”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군, 저희 같이 봐요.”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럼 우선 밥상을 차리거라!”
대화가 얼추 정리된 듯하니 주 백야가 웃으며 말했다.
“녹엽아, 밥상을 차리거라.”
바깥에 있던 녹엽은 대답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서차간을 나와 작은 반청飯廳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상 두 개가 차려져 있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친 후 주묘서의 혼수를 옮길 준비를 했다.
진씨는 방금 전에 강심설에게 이 일을 맡으라고 해 놓고는 또 지금 그곳으로 달려가 본인이 지휘를 하고 있었다. 본인만 달려간 게 아니라 백 이낭 등도 함께 따라오게 했다.
백 이낭 등이 진씨의 뜻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사실 진씨가 방금 전 방 안에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떠들어댄 건 그저 과시하고 싶어서였을 뿐. 속내를 뻔히 아니까 그들도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쳐 줬던 것이었다.
주묘서의 혼수는 원래 전부 옆에 있는 작은 처소에 쌓여 있었는데 지금 하나하나 주묘서의 뜰에 옮겨 놓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주묘서의 처소 밖에 도착했고, 진씨는 막일하는 어멈들이 물건을 옮기는 걸 지휘하고 있었다. 무려 한 시진 정도를 옮기고 나니 갖가지 훌륭한 물건들이 주묘서의 뜰에 잔뜩 쌓이게 되었다. 붉은 칠을 한 상자 위에는 비단으로 묶은 진홍색 꽃이 달려 있었다.
“아유!”
이때, 멀리서 녹색 관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뛰어왔다. 그는 주운환과 엽연채를 보더니 두 눈을 반짝이고는 바로 예를 올렸다.
“소관, 진서후 나리와 진서후 부인을 뵈옵니다.”
“예는 됐네.”
주운환은 무덤덤하게 인사를 받았다.
이 녹색 관복을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주묘서의 출가 준비에 도움을 주라고 주씨 가문으로 파견된 관원이었다. 그는 예부의 의제주사儀制主事인 정6품 소관 오씨였다. 주묘서의 출가가 임박하자 오 주사는 주씨 가문에서 이틀째 묵고 있었다.
오 주사는 주 백야와 진씨에게도 예를 올렸다. 진씨는 가볍게 대답을 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 주사, 식사는 했는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식사는 이미 했습니다.”
오 주사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건…….”
오 주사는 처소를 둘러보다가 안을 가득 채운 갖가지 혼수와 그 위에 묶인 붉은 비단을 보더니 안색이 싹 변했다. 그는 난처해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부인, 이 혼수는 부적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