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9화
추길은 더 이상 머리를 만져 줄 기분이 아니라 엽연채의 뜻대로 아주 간단한 단라계單螺髻를 해 주었다.
엽연채는 작은 화장함을 열더니 그 안에서 연꽃 모양의 유리 보요를 꺼내 머리 위에 꽂았다. 그렇게 그녀의 머리가 완성되었다.
엽연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혜연이 앞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옷을 입혀 줬다.
그러고 나서 추길을 보니 그녀는 축 처져 있었다. 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염려했다.
“추길아, 너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낯빛도 이렇게 하얗고.”
“아…….”
추길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조그만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어제 너무 피곤했나 봐. 저녁에 잠도 제대로 못 잤고.”
“그럼 돌아가서 쉬렴.”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단추를 채웠다.
“청유를 데려오거라. 그 아이도 머리를 잘 만지더구나.”
“예.”
추길은 건성으로 대답한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청유를 포함한 몇몇 여종들이 오른쪽 낭하에서 새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이 보였다. 낭하에는 서너 개의 새장이 걸려 있었고 그 안에는 잘 키운 알록달록한 앵무새가 앉아 있었다.
추길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청유야, 방으로 가 봐. 마님께서 너보고 머리 만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셨어.”
“네?”
청유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녀는 들고 있던 새 모이를 내려놓고는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전에는 엽연채 곁에서 하는 이런 일들을 전부 혜연과 추길이 도맡아 했고, 웬만하면 다른 여종들에게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추길이 와서 엽연채 시중을 들라고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청유가 떠난 후, 추길은 청유가 내려놨던 새 모이를 말없이 집어 들더니 새에게 먹여 줬다.
청유가 방에 들어가 보니 혜연은 앉아 있고 반대로 엽연채는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는 청유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와서 혜연이 머리를 예쁘게 만져 주렴. 아, 아니다. 말괄량이처럼 보이게 사내 머리를 만들어 주거라.”
청유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그건 식은 죽 먹기죠. 사내 머리는 여인 머리보다 훨씬 쉽습니다. 다 해 봤자 몇 가지밖에 안 되거든요.”
청유는 참빗을 집어 들더니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휘감으며 어떻게 머리를 빗고 어떻게 머리카락을 감아야 하는지 설명해 줬다.
밖에 있던 백수, 매화, 소월도 방 안이 시끌벅적하고 즐거워 보이자 그쪽으로 모여들더니 재잘거리며 머리 모양을 분석했다.
잠시 후, 청유는 혜연에게 사내들이 하는 방식으로 머리를 틀어 줬다. 혜연은 얼굴이 작고 동그래, 사내들이 하는 방식으로 머리를 올리니 몇 살은 더 어려 보였다. 지금 그녀는 영락없이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잘생긴 소년이었다.
엽연채와 여종들은 모두 미소를 지었고 엽연채는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뉘 댁 공자님인지 참 훤칠하게 생겼네. 내가 아직 시집가기 전이라면 분명 너에게 시집갔을 게다.”
“하하하하!”
청유와 백수 등의 여종들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혜연은 조그만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그리되면 셋째 나리께서 절 베어 버리실 거예요!’
“자, 다른 머리도 해 보자.”
엽연채가 말했다.
“부군이 자주 하는 반묶음 머리도 해보자. 뒷머리는 풀어 헤쳐야 된다.”
“그것도 식은 죽 먹기죠.”
청유는 그리 말하며 혜연의 머리를 풀었다. 이어 솰솰 빗질을 몇 번 하자 금세 머리가 완성되었다.
이제 엽연채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가 만든 머리는 약간 비뚤어졌지만 그래도 모양은 어느 정도 잡혀 있었다.
엽연채는 두 번 더 연습했고, 연습하면 할수록 모양이 점점 더 예뻐져 그녀는 큰 성취감을 느끼며 기뻐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정오가 되어 주운환이 퇴청했다. 운연거 안으로 들어서자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와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추길은 낭하에 서서 앵무새와 놀아 주고 있었는데 주운환이 돌아온 모습을 보자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낭하에서 내려갔다.
“셋째 나리, 돌아오셨군요.”
주운환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저 냉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성큼성큼 널찍한 뜰을 지나갔다.
머리를 창밖으로 내민 청유가 주운환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에게 알렸다.
“셋째 나리께서 돌아오셨어요!”
이제 막 혜연의 머리를 완벽하게 틀어 올린 엽연채는 주운환이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는 여종들을 재촉했다.
“어서들 숨거라.”
혜연은 눈알을 굴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청유 등을 끌고 침실에서 나갔다. 그들이 소청의 뒷문을 통해 뒤쪽 후조방으로 가는 동안, 주운환은 이미 본채의 섬돌 위에 올라섰다. 그때 엽연채가 조그만 머리를 살짝 기울어뜨린 채로 갑자기 문 뒤에서 나타났다.
엽연채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맑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부군.”
주운환은 그녀가 조그만 머리를 반쯤 내밀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모습을 보니 그저 귀여워 죽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는 몸을 굽히고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습니까?”
엽연채는 눈알을 굴리더니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와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리 와 봐요.”
주운환은 그녀에게 이끌려 침실로 들어갔고 구리 거울 앞에 앉혀졌다.
누르스름한 구리 거울에는 그 누구보다도 재능이 넘치고 풍채가 좋은 절세미남과 아름답고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한 여인의 모습이 비쳤다.
엽연채의 왼손은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자금관紫金冠에 살포시 닿았고 가늘고 긴 오른쪽 손가락으론 관冠 위의 순금 잠자簪子를 살며시 뽑았다. 그러고는 머리에서 관을 내린 다음 머리도 풀어 헤쳤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본 주운환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게 되었다. 아침에 그녀는 그의 옷을 갈아입혀 주지 못했다고 또 그의 머리도 만져 주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방금 전 방 안에 있던 여종들은 아마 그녀에게 머리를 손질하는 법을 가르쳐 줬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주운환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쓱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정면을 보니 거울 안의 아리따운 소녀는 그를 쳐다보고는 빗을 들어 그의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득의양양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방법을 이미 익힌 것 같았다.
주운환은 그리 생각했고 엽연채도 물론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속으로 아주 자신백배했지만, 머리를 빗으면 빗을수록 점차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는 만질수록 점점 더 삐뚤어지더니 결국 오른쪽으로 기울어졌고 아무리 반대 방향으로 힘을 줘 봐도 다시 넘어오지 않았다.
엽연채는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이번 건 빼요.”
주운환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다시 해 보면 되지요.”
“알겠어요.”
엽연채는 기분이 살짝 좋아진 채로 다시 그의 머리카락을 푼 다음 머리를 빗었다. 왼쪽으로 힘을 주면 어찌 되는지 방금 교훈을 얻은 그녀는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힘을 줬다. 그러자 이번에는 머리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엽연채는 제 뜻대로 되지 않고 한쪽으로 기운 모습을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방금 전에는 분명 잘했어요!”
주운환은 이렇게 억울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사랑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얼른 이렇게 말했다.
“머리가 좀 기름져서 빗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다시 한번 해 봐요.”
엽연채는 계속해서 머리를 빗었고 이번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머리를 만졌다. 마침내 머리가 완성됐고, 게다가 아주 완벽한 모양이었다. 엽연채는 순금 잠자로 머리를 고정시키고 나서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번 봐 봐요! 어떤 끈으로 묶는 게 좋을까요?”
“이게 좋겠습니다.”
주운환은 탁자 위를 가리켰고 그곳에는 머리끈 몇 개가 걸려 있었다. 그가 머리를 묶을 때 쓰는 끈인데 집에서는 관을 쓰지 않고 잠자와 머리끈만 사용했다.
엽연채는 연청색 머리끈을 집어 들어 그의 틀어 올린 머리 위에 묶은 다음 뒤편에 있는 새카만 머리칼을 늘어뜨렸다. 우아함이 넘쳐흐르고 잘생긴 그 모습이 엽연채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우리 우선 밥부터 먹읍시다.”
주운환의 말에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입고 있는 옷부터 갈아입어야죠.”
주운환이 관복을 갈아입고 나서야 부부는 함께 반청飯廳(식사하는 곳)으로 갔다.
추길이 커다란 무늬가 조각된 붉은색 커다란 찬합을 가져와 백수와 함께 상을 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밥과 반찬을 하나하나 탁자 위에 올려놨다.
잠시 후, 부부가 막 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혜연과 청유 등이 아직 상을 치우러 오지 않았는데 추길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님, 녹지가 왔습니다.”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거라.”
사실 추길이 전할 필요도 없이 엽연채와 주운환은 이미 녹지가 처소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뜰을 지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녹지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계단 아래에 서서 주운환과 엽연채에게 예를 올렸다.
“나리, 마님.”
엽연채는 뜨뜻미지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께서 보낸 것이냐?”
“예.”
녹지는 고개를 끄덕이곤 얼굴을 들었다. 주운환과 엽연채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존경심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며칠 후면 큰아가씨께서 출가하는 날입니다. 나리, 마님.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런 경사를 어찌 잊겠느냐?”
녹지는 엽연채의 말에 득의양양한 기색을 보이며 빙긋 웃었다.
“저도 그저 상기시켜 드리는 것뿐이에요. 나리와 마님은 귀인이신데, 귀인들은 원래 모든 걸 쉽게 잊으시잖아요.”
주묘서는 곧 출가하여 태자부로 시집가게 된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진씨와 주묘서는 엽연채와 주운환이 자신들이 잘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주묘서가 시집가는 날 핑계를 대고 보러 오지 않을까 봐 염려했다. 그런 일을 미리 방지하고자 일부러 녹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럼 약속하신 겁니다! 그때 가서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녹지는 방긋거리며 예를 올린 후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여종들은 떠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봤고 청유는 퉤 침을 뱉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요? 주씨 가문 여종인 거죠? 저 우쭐거리는 모습 좀 봐요.”
추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태자부에 시집가는 거니까.”
이때, 혜연과 백수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쟁반 위에는 양치를 하기 위한 용품이 있었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양치질을 하고 나서야 소청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