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3화
임 국공은 낯빛이 하얗게 질리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뇌리엔 또다시 궁에서 살던, 황제의 귀하디귀한 적장녀였던 조그만 운하 공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항상 수를 놓은 하얀색 제흉유군을 입고 있었고 가슴 앞쪽엔 기다란 끈이 달린 진홍색 비단 매듭을 달고 다녔다. 머리에는 진주를 상감한 은빛 찬란한 봉숭아꽃 장식의 머리 장식을 꽂았는데, 아래로 늘어뜨린 가느다란 술이 그녀가 머리를 살짝 기울일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려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과 달콤한 그녀의 미소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런 불행을 겪게 됐던 것이다. 그녀는 황제의 적장녀인 공주였는데, 온갖 치욕을 겪고 기루까지 전전하다가 결국 비천한 첩실의 신분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만약 그때 내가 조금만 용기를 냈다면…….’
뭐 별다른 걸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파혼하여 다른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는 걸 거절하고 묵묵히 그녀를 기다려 줬다가 소씨 가문이 억울한 누명을 벗었을 때 직접 두 사람을 데리러 갔다면 결과가 그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마음속으로 이런 가능성을 가정해 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무지 견뎌 낼 수가 없어 이 가능성을 내내 깊이 묻어 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양왕이 그녀가 겪었던 모든 일을 입 밖으로 꺼내 놓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서 붙들고 있던 마지막 지푸라기 하나가 여지없이 사라지며 후회와 죄책감이 물밀 듯이 밀어닥쳐 저를 휩쓸어 버렸다.
하지만 임 국공은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과거에 그리 깨끗하게 포기했던 것처럼 결국엔 다시 이성을 되찾고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의 말씀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어떻게 압니까?”
“하, 믿지 않아도 상관없네.”
양왕이 비웃음을 짓자 임 국공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양왕을 잠시 노려보다가 한마디 했다.
“좋습니다! 운하의 얼굴을 봐서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이 일이 그네를 위해 제가 하는 마지막 일입니다.”
“좋네.”
양왕은 찬 웃음을 흘렸다.
“고맙소, 국공!”
그리 말하고는 발을 걷어 올리더니 마차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마차는 여전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는데 양왕이 갑자기 뛰어내리자 마차를 몰던 사동은 깜짝 놀라서 얼른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휙 고개를 돌려 봤지만 양왕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나리.”
사동은 발을 걷어 올려 임 국공을 살피다가 표정이 확 굳어졌다. 늘 기품이 넘치던 임 국공의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 나리… 괜찮으세요?”
임 국공은 분노로 수염을 푸르르 떨었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한테 얻어맞다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가자! 도성으로 가자꾸나!”
본인이 부리는 사동이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임 국공은 도저히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어 얼른 마차의 발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사동은 멋쩍은 표정을 짓고는 앞으로 돌아가 앉더니 계속해서 마차를 몰았다.
마차 안. 임 국공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에 자신이 태자를 돕지 않고 진실을 말한다면, 자신은 전에 운하와 정을 나눴던 사이이니 어쩌면 늙은 황제가 자신과 양왕이 한편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국공부는 겉으로야 아주 대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황제는 자신을 몹시 꺼렸다. 그러니 이 일은 방법을 생각해 내 적당히 넘겨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임 국공은 운하의 일 때문에 한참 동안 평정심을 되찾지 못했다.
* * *
요 며칠 동안 여러 찻집과 요릿집에선 태자가 주운환을 해치려 했던 일을 두고 말들이 끊이지 않았다.
가장 열띤 토론을 벌이는 곳은 바로 서원과 국자감이었는데, 사람들은 한곳에 모여 앉아 태자의 폐위를 청원했다.
최근 일 년 동안 태자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천자복환령에 이어 묘기화 일이 터졌고, 그로 인해 태자는 태자부에 갇혀 있다가 몇 달 전에서야 전쟁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감금 처분에서 풀려났다.
태자는 오해라고 해명했지만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었다. 그가 아무리 애쓴들 허물을 다 덮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묘기화 일은 정선제조차 부인하지 않았고 이 일 때문에 그를 가둬 놓았으니, 그와 묘기화의 일은 진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묘기화를 몰아붙여 목숨까지 끊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였으니 백성들도 더는 참아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제가 공정하기로 소문난 임 국공, 요공 대사, 낙 환관 이 세 사람을 불러와 필적을 감정한다고 했으니 백성들은 며칠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날 이른 아침, 가슴에 의분이 가득 찬 서생들은 황궁 밖에 둘러앉아 궁 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감정 결과 정말로 태자의 소행으로 드러난다면 즉시 태자의 폐위를 주청할 심산이었다.
주운환은 새벽부터 검붉은색 조복으로 갈아입고 관교官轎를 타고 조정으로 향했고, 엽연채는 맥이 풀린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황궁 안, 눈부시게 화려한 대전 안엔 문무백관들이 좌우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무관인 주운환은 아직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무장들이 서 있는 줄에서 상관수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태자와 풍 측비는 정중앙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풍 측비는 며칠 전보다 훨씬 더 마른 모습이었다. 피골이 상접해 그녀의 네모난 얼굴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고 피부는 누렇게 떠 있어,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느껴졌다.
“황제 폐하 납시오!”
뒤에서 어린 환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전해졌다. 잠시 후, 정선제가 채결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걸어 들어오더니 의자 위에 반듯한 자세로 앉았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아래에 있는 조정 신하들이 만세삼창을 했다.
정선제는 손을 가로젓더니 모두에게 자리에서 일어서라고 했다. 정선제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그는 축 처진 흐릿한 눈으로 아래를 쓱 훑어본 다음, 태자와 풍 측비를 바라보다가 다시 노왕과 장찬에게 시선을 돌렸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폐하. 소신과 정 부윤이 이미 임 국공에게 연락을 해 두었고 낙 환관과 요공 대사는 어제 이미 궁 안에 도착했사옵니다. 두 사람은 지금 폐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노왕이 공수하며 답하자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명했다.
“그럼 안으로 들이거라!”
그러자 눈치가 제일 빠른, 바깥의 어린 환관이 얼른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국공, 낙 환관, 요공 대사는 안으로 드시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보니 세 사람이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임 국공은 당연히 다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사십 대 초반의 그는 위엄 있는 모습에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로 엄숙함이 느껴지는 조복을 입고 있었다.
요공 대사는 일흔 살쯤 되어 보이는 노승으로, 마른 체형에 자비롭고 인자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하얗게 세탁한 낡은 가사袈裟(승려가 장삼 위에 걸쳐 입는 법의法衣)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선장禪杖(승려의 지팡이)을 쥐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아주 정정한 모습이었다.
낙 환관이 나이가 제일 많았는데 그는 이미 팔십의 고령이었다.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인 데다 허리가 굽은 왜소한 체형이라 몹시 허약해 보였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세 사람은 함께 정선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어서 부축하거라.”
정선제가 손을 뻗자 한쪽에 있던 어린 환관이 얼른 낙 환관을 부축해 일으켰다.
“조정에 일이 생겼으니 세 사람이 짐을 위해 필적을 감정하거라. 탁자 그리고 태자와 측비의 서신을 가져오너라.”
정선제가 냉랭한 목소리로 분부했다.
밖에 있던 환관은 얼른 미리 준비해 둔 기다란 탁자를 들고 와 대전 중앙에 내려놓았다. 그림이나 서신 감정을 서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앞에서 의자에 앉으라고 하면 천자의 위엄이 손상될 테니, 대신 부들방석을 가져오게 해 세 사람이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게 했다.
이어 환관은 태자가 전에 썼던 서신을 가지고 왔다. 공정함을 드러내기 위해 이 서신들은 태자부에서 찾아온 것이 아닌 대신들에게서 받은 것을 가져왔다. 전에 태자에게서 받은 그가 직접 쓴 시나 첩자 중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양왕과 주운환의 눈엔 저도 모르게 조롱기가 스쳤다.
‘태자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이렇게나 애를 쓰다니!’
“풍 측비의 서신은요?”
유 재상이 말했다.
“저번에 퇴청한 후 장 대인, 정 부윤이 나와 함께 풍 측비를 심문하러 갔소. 풍 측비가 말하길 그 밀서는 자신의 심복인 시녀가 써 줬다고 하는데 그 시녀는 그저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소. 이 일은 이미 아바마마께 보고를 올렸네.”
조정 신하들은 노왕의 답변을 듣더니 작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다로, 누구도 깊이 파고들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태자가 그 밀서를 작성했는지 여부였다. 태자가 쓴 것이 아니라고 증명되면 풍 측비의 소행임이 틀림없음이 증명되는 셈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임 국공을 포함한 세 사람은 기다란 탁자 앞에 반듯한 자세로 앉았다. 그들의 눈앞엔 갖가지 색깔과 형태의 첩자와 태자가 과거에 보낸 시사詩詞 등이 펼쳐져 있었다.
“진서후, 그 밀서를 가져오너라.”
위에서 정선제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
주운환의 맑은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임 국공과 요공 대사, 낙 환관이 고개를 들어 보니 한 소년이 무장들의 대열에서 걸어 나왔다. 소년은 수를 놓은 검붉은색 포복을 입고 있었는데 미끈하게 쭉 뻗은 체형이 한껏 돋보였다.
소년은 황제에게 공수를 하고 돌아서서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주운환이 돌아서는 찰나, 임 국공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소년은 화려한 외모에 귀티가 흐르며 산뜻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지만 눈초리에선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엄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검붉은색 화려한 조복을 입으니 그의 고귀하고 중후한 분위기를 한층 더 돋보였고,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천천히 걸어오는 그에게선 경건함과 우아함이 느껴졌다.
임 국공은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보더니 넋이 나가 버렸다.
‘이 익숙한 얼굴은……!’
사실 기억 속 그녀의 얼굴은 이미 희미해진 상태였다. 지금 어린 나이에 이름을 날리게 된 눈앞의 이 젊은 후야를 보고 나서야 그녀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다시 선명하고 완벽하게 그려졌다.
머릿속에 갑자기 양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누님이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되자 그 권세가는 누님을 집으로 데려가 첩실로 삼았지. …… 하지만 결국 난산으로 몸이 망가져 일 년도 못 버티고 세상을 떠나셨지.”
그날 자신은 양왕의 말을 듣고 당연히 아이도 난산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난산인 경우 보통 아이도 사산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그 권세가가 바로… 주정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주씨 가문 셋째 아들이 최근 있었던 전쟁에서 이름을 날린 소년 후야라는 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