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2화
고 마마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냈다.
“공주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소인은 다 공주 마마를 위해 이러는 겁니다. 만약 소인마저 이곳에 와 버렸다면… 궁 안에 공주 마마를 위해 말해 줄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아. 내가 자네를 오해했군.”
운하의 무덤덤한 반응에 고 마마는 오히려 더욱 창피하고 언짢았다. 하지만 얼른 냉정을 되찾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 가지 소식을 전했다.
“공주 마마. 그거 아십니까? 국공부國公府에서 황제 폐하께 공주 마마께서 먼 곳에 가셔서 혼인을 할 수 없으니 파혼을 윤허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지금 임씨 가문은 임 세자의 선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공주 마마, 당장 돌아가지 않으시면 임 세자께서는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실 겁니다. 어쩌면 유씨 가문 둘째 소저나 정씨 가문 넷째 소저와 혼인하실지도 모릅니다. 어떤 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인이 궁에서 나올 때 국공 부인께서 유 소저를 마음에 두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마마께서 궁으로 돌아가시면 임 세자께서는 마마와 혼인하실 겁니다.”
말을 마친 고 마마는 손에 든 손수건을 홱 뿌리치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두 걸음을 내딛자 당시 네 살밖에 안 된, 멍한 얼굴로 바위 위에 앉아 있던 저의 앞에 섰다. 자신은 긴장된 눈빛으로 운하와 고 마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 마마는 자신을 쳐다보더니 ‘아이고’ 하며 말했다.
“이분이 어린 황자이신가요? 정말 선동仙童같이 생기셨습니다……. 쯧쯧, 참 안타깝군요. 황자 전하. 전하도 참… 전하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
그때 자신은 겨우 네 살이었지만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위기감 때문이었는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의미를 이해했다. 이 부귀한 차림의 할망구는 누나가 저를 해하고 이를 통해 궁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으라고 누나를 꼬드기는 것이었다.
자신은 놀란 마음에 입을 삐죽거리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아이구, 요 똥강아지. 울긴 왜 울어?”
운하는 깔깔거리며 저를 품에 안더니 이마에 쪽 뽀뽀를 하며 달랬다.
“자, 누나가 금을 연주해 줄게.”
그리 말하며 여느 때처럼 저를 무릎 위에 앉히고는 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날 자신은 <교령십삼조>의 분위기가 변했음을 느꼈다. 오직 그녀만이 느끼는 진정으로 애달프고 처량한 마음이 이 곡에 묻어났던 것이다.
차분하면서도 섬세하고 부드러운 마음과 생기 넘치는 소녀의 기쁨 같은 격양된 감정이 전조轉調가 일어나자 무겁게 가라앉았다. 화려했던 모든 것은 사라지고 공허함만 남게 된 것이다.
삼사 년간 진실된 사랑을 나누었지만 기다림 끝에 남은 건 구원의 손길을 내민 그가 아니라 그녀를 철저히 내팽개치고 떠나 버린 그였다.
연주가 끝나자 운하는 동생을 품에 안고 가슴이 미어지게 눈물을 흘렸다.
2년 후, 소씨 가문은 억울한 누명을 벗었고 소 미인으로 강등되었던 어머니는 다시 황후로 책봉된 뒤 황릉에 안장됐다. 그리고 남매도 정선제의 명에 따라 도성으로 불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주에서 비적과 맞닥뜨렸던 것이다.
결국 자신은 이마 앞부분에 칼을 맞으며 중상을 입었고 누이는 비적들을 유인하다가 실종되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이미 멍청해 보이는 어린 소녀를 아내로 맞이한 후였다. 소녀는 침상에 엎드려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운하의 시체도 운반되어 궁으로 돌아왔다.
양왕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감정의 기복 없이 아주 세세하게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임 국공은 차분한 모습을 보이며 시선을 살짝 아래로 드리웠다. 입술을 살짝 움찔거렸지만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평온하고 차분한 것 같으면서도 또 모든 것이 뒤집혀 버릴 것만 같은 한없이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늘 운하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귀하디귀한 공주였고 자신은 집안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공부의 세자였다. 자신은 그녀보다 세 살이 많았고 그녀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정혼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들 둘을 보며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라고들 했다.
자신도 그 공주를 아주 좋아했었다. 웃는 얼굴이 그렇게나 아름답고 천진난만한 그녀는 상냥하고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이었다. 당시엔 하루빨리 자라서 혼인해 그녀를 집으로 데려오기를 날마다 바랐었다. 그러면 보고 싶을 때 멀리 있는 궁까지 달려갈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는 울면서 회임 중인 소 황후와 함께 동주에 가서 황릉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녀가 떠날 때 자신은 그녀를 보지도 못했고, 게다가 어쩌면 내심 그 만남이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가 버리면 자신과 그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큰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국공부의 세자이기는 하나 자신도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자신 역시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권세와 재물, 복잡한 인간관계 등등 아주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소년이 점점 성장하면서 당시에 느꼈던 그 혼란스러운 감정도 서서히 묻혔다.
사람의 힘은 유한한데 자신이 책임져야 할 중요한 일들은 너무도 많았다. 이 세상은 이렇게나 잔인하고 냉혹한 곳이었다. 그녀와 이별한 후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점점 더 옅어져만 갔다.
그녀에게 자신은 유일한 존재였지만 자신에게 그녀는 가끔씩 떠오르는 까마득한 기억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그녀를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느꼈던 걱정은 그저 예비부부로서 느끼는 사소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다른 여인과 정식으로 혼사를 맺는 순간이 되어서야 멍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속에서 상실감과 슬픔이 느껴졌고 콧날이 시큰거리며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모든 것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그때야 깨달은 것이다.
사내의 감정이란 늘 무디며 오랜 시간이 걸려 익기에,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된다.
자신은 그녀를 좋아했다.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고 해도 스스로 뭔가를 해 보겠다는 용기가 없었다. 그저 이 감정을 마음속 깊은 곳에 조용히 묻어 두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위로 먼지가 조금씩 쌓이도록 놔두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이 더럽고 혼탁한 세상을 벗어날 수가 없으니 그저 따라야 했다.
나중에 소씨 가문이 억울한 누명을 벗었고 그녀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나 결국 그녀는……. 마치 결말은 원래 이렇게 정해져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가 버리더니 다시는 그 길을 되돌아오지 못했다.
“그때 그것들은 비적 같은 게 아니었소. 정씨가 보낸 사람들이었지.”
양왕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은 정씨와 태자에게 살해당한 것이오.”
임 국공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습니다.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그래.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왜냐하면…….”
양왕은 그리 말하고는 웃는 듯 마는 듯 한 눈빛으로 임 국공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을 정도로 빈정거렸다.
“다들 속으로 훤히 알고 있으니 말이네! 그런데 자네들은 이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을 즐기는군.”
그 말에 임 국공의 품위 있는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이런 이야기를 조금도 듣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진작부터 그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개과천선하면 뭐 하겠는가? 그럼 젊었던 자신이 냉담한 눈으로 방관하며 포기했던 건 대체 뭐가 된단 말인가?
‘이 길을 선택했는데, 이제 와서…….’
임 국공이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본 양왕은 날카로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붉은 입술을 씩 올렸다.
“국공에게 한 가지 말할 게 있는데, 사실 비적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 누님은 죽지 않았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임 국공은 깜짝 놀랐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두 눈을 부릅떴다. 그 눈 속에 희망이 너울거렸다. 그러자 양왕은 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결국엔 세상을 뜨셨지.”
임 국공은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손을 들어 양왕에게 휘둘렀다.
“이런 몹쓸! 내 오늘 널 때려죽일 것이다!”
“이 빌어먹을 늙은이가! 나도 그동안 오래도 참아 줬지!”
이어 마차 안에서 쿵쿵!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으아악!”
임 국공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으나 밖의 사동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계속 마차를 모는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운반되어 온 그 사람이 누님인지 아닌지 난 한눈에 알아봤다!”
양왕의 소름 끼치도록 싸늘한 목소리가 마차 안에 울려 퍼졌다.
공주의 시체가 운반되어 왔다는 소리에 자신은 온몸에 중상을 입었음에도 울며불며 그녀를 보러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정선제는 자신이 난리를 치다가 상처라도 벌어질까 봐 걱정됐는지 직접 저를 안고 운하의 시체를 보러 갔다.
소녀의 시체는 이미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운하는 그의 친누님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직접 자신을 키운, 늘 함께 지내던 친누님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녀를 못 알아보겠는가. 그 시체는 결코 그녀가 아니었다.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며 정선제에게 그녀를 찾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그저 생떼를 쓴다고 생각했고, 정선제는 그리하겠다고 대답했지만 돌아서자마자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겨 버렸다.
“그 후엔 어찌 되었습니까?”
임 국공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결국 더는 참을 수가 없었는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후 내게 힘이 좀 생겨 사람을 시켜 곳곳을 찾아보게 했지. 그리고 결국… 8년 전에 누님을 찾게 됐네.”
양왕이 시선을 위로 향하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임 국공을 쳐다봤다. 그의 매력적인 눈동자가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누님을 찾았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지. 누님이 비적들을 유인하다가 실종됐던 그해에 누님은 결국 비적들에게서 도망쳤지만 중상을 입어 의식불명이 되었네. 누님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어느 산촌의 늙은 홀아비 손에 들어가 있었지…….”
그 말에 임 국공은 몸을 조금 떨었다. 꽃처럼 아리따운 아가씨가 그런 사람의 손에 들어갔으니 어떻게 좋은 꼴을 볼 수 있었겠는가!
“그 늙은 홀아비에게 두 달 동안 갇혀 있다가 그 홀아비가 은화 열 냥의 노름빚을 지게 되자 방법이 없었는지 결국 누님을 빚쟁이에게 넘겼네. 누님은 그 빚쟁이 밑에서 한동안 지내다가 다시 어느 마을의 기루에 팔렸지. 그리고 그곳에서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은 시간을 보내다가 한 권세가를 만나게 됐네.
아름다운 누님이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되자 그 권세가는 누님을 집으로 데려가 첩실로 삼았지. 그제야 누님은 기루에서 벗어나게 되었네. 하지만 결국 난산으로 몸이 망가져 일 년도 못 버티고 세상을 떠나셨지.”
양왕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그의 목소리에선 감정 기복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임 국공은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분노와 독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