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6화
체면을 중시하는 대제는 대국의 면모를 보여 주기 위해 타국이 보내오는 선물의 곱절만큼을 답례품으로 줬다. 하나 이제 국고는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대제는 체면 때문에 예전의 습관과 관례대로 답례품을 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답례품을 곱절로 주고 싶지 않다고 해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쉽지가 않았다. 그랬다가는 옹졸해 보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참아 왔는데, 엽연채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니 대제의 체면이 확 살게 되었다.
정선제는 엽연채를 쳐다보며 저도 모르게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과연 인물이로구나! 하지만 바둑 실력이 아니라 말재간이 뛰어날 뿐!’
북연 사람들은 엽연채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북림과 동안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들어 대들보를 보거나 고개를 숙이고 코를 매만졌다. 그들 또한 조공한 양보다 곱절로 많은 답례품을 받으며 이득을 챙겨 오지 않았는가.
호나타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씩씩 성을 냈다.
“이! 우리가 어찌……!”
‘정말 영악한 사람이다! 이런 방법으로 바둑 대결을 피하려고 하다니!’
“북연이 지금까지 우리 대제에게 보낸 선물이나 우호의 증표라고 하는 것들은 정말 별것도 아니거든요. 다만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유지해 온 겁니다.”
엽연채가 말했다.
“다만 북연에서 그렇게 성의를 보이겠다고 하니 우리 대제도 모른 척할 수 없겠네요. 대신 이리하면 어떨까요. 제 부군이 북연의 쌀을 좋아하니 공주 마마께서 지시면 쌀 십만 말을 서남쪽으로 보내 주시는 겁니다!”
엽연채가 대결을 수락하겠다고 하자 호나타는 곧장 ‘좋아요!’ 하고 응했다. 대답을 하고 나서야 엽연채가 뭐라고 말했는지 이해했다.
“나타야!”
호막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이미 호나타가 대답을 한 뒤였다.
정선제와 태자 등은 그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지면 쌀 십만 말을 보내겠다니, 설마 엽연채는 구덩이를 파 놓고 북연이 빠지기를 기다렸던 걸까? 게다가 자기 남편에게 보내는 식량이라고 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아내인가!
단번에 쌀 십만 말을 내기의 대가로 꺼냈는데 이 정도면 당분간 군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정선제는 미칠 듯이 기뻤다. 지금 군량과 군수품 문제로 골치를 썩여 머리카락이 다 빠질 지경이었고, 북연에게 이를 빌리려면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정말로 입을 열게 되면 체면이 땅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대제의 약점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었다.
갖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엽연채가 고작 몇 마디 말로 군량 문제를 해결할 묘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갚을 필요도 없었다.
정선제는 크게 흥분했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 승리의 대가는 구미가 확 당겼지만, 결국 이겨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아마 자신이 있어서겠지!’
정선제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는 대제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대제가 생각한 것은 당연히 북연도 생각했다. 다들 바보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물리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북연은 가까스로 기를 펴게 됐는데 갑자기 대결하지 않겠다고 물러서면 그들은 크게 망신을 당하게 되며, 지금 자리에 모인 다른 나라들에도 크게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호나타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고 호막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뒤에 있던 북연 사신들은 모두 매서운 눈빛으로 호나타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중 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 공주…….”
“공주 마마께서는 대연大燕의 황녀시죠.”
엽연채는 비웃으며 입을 뗐다. 이렇게 ‘대연의 황녀’를 들고 나오니 그 노인도 차마 호나타의 말을 번복할 수 없었다.
“하하. 확실히 대결엔 걸린 게 있어야 흥이 나죠.”
호막이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고 그렇게 이 대결은 승낙한 셈이 되었다.
“오라버니…….”
호나타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호막을 쳐다봤다. 그녀도 너무 충동적이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호막은 동생을 노려보고는 얼른 대응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미인의 말투를 보니 분명 바둑의 고수인 게 틀림없었다. 그 유곡요보다 더 뛰어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곡요보다 뛰어나다고 해도 호나타를 이길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호나타는 유곡요를 손쉽게 이겨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막은 신중한 사람이라 이런 모험은 추호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호나타의 바둑 후배인 해주가 대국에 나선다면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대결에 응한 호나타를 갑자기 해주로 바꿔 버리면 북연 공주의 신분인 호나타는 체면이 깎이게 된다. 게다가 대제에서 응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호막이 계책을 생각하는 사이, 대제의 신하들도 귓속말로 속삭이고 있었다.
이때, 채결이 정선제의 귀에 대고 말했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은 작년 양왕 전하 생신 축하연에서 유곡요를 이긴 적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냐?”
정선제는 흥분해서 두 눈을 번쩍 떴다.
“정말 유곡요를 이겼다고 해도 북연 공주를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리 끼어든 태자비의 냉랭한 목소리에는 조롱기가 살짝 담겨 있었다.
정선제는 표정이 확 굳어지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쓱 쳐다봤다. 태자비는 깜짝 놀랐지만 이미 할 말을 생각해 놓았기에 얼른 이렇게 이었다.
“어쨌든 이 북연 공주의 실력은 진짜입니다. 그러니 너무 큰 기대는 품지 마시지요. 아니면 나중에 아바마마께서 실망하실 겁니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태자비 말이 일리가 있군. 방심하면 안 되지.”
정선제는 기분이 좀 언짢았지만 그래도 작게나마 희망을 품고 있었다. 설령 진다고 해도 북연으로부터 쌀을 못 받는 게 다이니 말이다. 물론 창피하기도 하겠지만.
정선제는 속으로 안절부절못했고 대제의 신하들도 같은 심정이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엽연채에게 기대를 걸었다.
“황제 폐하.”
이때, 호막이 미소를 지으며 공수했다.
정선제는 눈을 깜빡였다. 그 사이 무슨 계책이라도 생각해 냈다는 말인가? 하지만 체면 불고하고 대결을 무른다면 모를까, 이제 와서 무슨 계책이 있겠는가.
“저희 북연의 해주라는 아이가 나타의 바둑 후배인데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 아이도 바둑 대결을 통해 한 수 배우고 싶다고 하옵니다.”
호막의 말에 정선제는 조소를 내비쳤다.
“대결에 응하겠다고 한 사람은 북연 공주였네. 북연 황실은 어찌 신용을 지키지 않는가?”
호막은 화내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는 결코 신용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희 공주가 대결을 벌이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사옵니다. 해주도 참여하게 하려는 것이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장찬은 화를 내며 버럭 호통을 쳤다.
“두 사람이 같이 하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대제 사람 한 명을 상대하겠다는 겁니까?”
그 말에 대제의 신하들은 전부 북연 사람들에게 비웃음 섞인 냉소를 지었고, 북림과 동안의 사신들마저 조롱하는 눈빛으로 북연 사람들을 쓱 쳐다봤다.
‘저런 모자란 것들. 본인들이 멍청해서 대결에 응한 것이니 끝까지 해야지!’
“저희 북연 사람들이 어찌 그런 뻔뻔한 짓을 하겠습니까.”
호막은 그럴듯하게 구실을 댔다.
“이 아이들은 바둑 기술을 연마하려고 이곳에 온 건데 제대로 대결 한번 펼쳐 보지 못한다면 큰 아쉬움이 남을 겁니다. 게다가 한 판만 두면 너무 단조로울 테니 이리하는 건 어떠신지요. 총 세 판을 두고 삼판이승제를 적용하는 겁니다. 마침 나타의 바둑 선후배가 함께 이곳에 왔습니다. 이 세 명의 아이들이 대제의 여성 기사 세 명과 겨루게 하는 겁니다.”
이 말이 나오자 대전 안에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북연 사람들은 미소를 보였고 정선제와 조정 신하들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분한 마음에 호막을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곡요가 대제 제일의 기사이자 최고의 재녀라는 명성은 가짜가 아니었다. 그녀의 바둑 실력은 정말로 뛰어났다. 다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
하지만 대제를 대표할 최고의 여성 바둑꾼은 북연 사람에게 상대가 안 된 유곡요뿐이었다. 엽연채는 뜻밖의 인물일 뿐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어디에서 실력이 뛰어난 여성 바둑꾼을 한 명 더 찾아온다는 말인가?
“북연도 참 뻔뻔하군요.”
참다못한 예부상서 여지가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저희가 왜 뻔뻔하다는 겁니까?”
호막은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대제에서 승리에 대한 대가를 바란다고 하니 저희 북연에서는 그걸 주겠다고 했습니다. 대결 상대로 나타를 원한다고 하기에 저희는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뭐가 뻔뻔하다는 것이죠?”
“이런……!”
여지는 표정이 확 어두워졌으나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서 대결에 참가할 사람을 결정하시죠.”
호막은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정말이지 대단한 미인이었다. 다만 꾀가 많은 사람인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린 엽연채의 눈빛에 조롱기가 스쳤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랐다.
정선제는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인들의 대결이자 내기 바둑이지만 이 일은 서남쪽 전쟁과 대제의 운명과 연관되어 있으니 당연히 소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정선제는 내각 신하들을 전부 불러 모아 서재에 가서 의논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 북연 사람들은 미소를 띤 채 차분하고 느긋하게 한쪽에 앉아 있었다. 흔히 있는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는 듯이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제의 황제가 조정 신하들을 데리고 의논하러 간다면 좀스러워 보일 뿐만 아니라 기세도 눌릴 것이다.
정선제는 초조한 마음에 얼굴 근육이 달달 떨렸지만, 그래도 입을 굳게 닫고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옆에 있던 정 황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에게는 세 명이 있지만 저희 쪽엔 여성 바둑꾼이 아주 적습니다. 엽연채는 당연히 출전할 테고 유곡요 또한 출전해야 합니다. 지금 한 명을 더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엽연채의 실력은 어떠한지 아직 모르고, 유곡요는 지기는 했지만 저 공주와 해주라는 아이에게 진 것뿐입니다. 그 예인이라는 아이와 붙으면 이길지도 모릅니다. 엽연채도 운이 좋아 이기면 저희가 이기게 되는 겁니다. 그럼 한 사람은…….”
“설마 대충 머릿수만 채우자는 말이오?”
정선제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유곡요와 엽연채가 반드시 이길 거라고 어떻게 확신한다는 말이오? 둘 중에 하나라도 지면 우린 지는 것이오.”
정 황후는 입을 오므렸다. 어차피 이런 일은 아무리 상의를 해 봤자 아무도 승패를 단정 지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