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15화 (415/858)

제415화

정선제와 태자는 그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북연과 북림, 동안 사람들은 두 눈을 살짝 깜빡이며 유곡요를 쳐다봤다.

“아. 저 소저는 방금 전 청휘원에서 우리에게 졌던 사람이잖아?”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전부 그쪽을 쳐다보니 검은 옷의 소녀가 보였다.

그녀가 ‘우리에게 졌던 사람’이라는 말을 꺼내자 정선제와 대제의 신하들은 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새파랗게 질리기를 반복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머!”

호나타도 깜짝 놀라 소리치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저였군요! 전 그저 평범한 대제의 여식인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호나타가 실망감을 감추지 않자 유곡요는 사정없이 따귀를 얻어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 역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너무도 창피한 나머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방금 일어섰는데 바로 자리에 앉으면 기가 꺾인 것처럼 보일 것 같아 어쩔 줄을 몰랐다.

정선제와 대제의 공훈 귀족, 신하들도 거북하고 난감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호나타가 유곡요를 쳐다보며 말했다.

“소저가 바로 대제 최고의 재녀이자 제일의 여성 바둑꾼…….”

“아닙니다!”

이때, 누군가가 아리따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호나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를 따라가 보니 곱고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는 아름다운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소저가 아니라 접니다!”

호나타는 입꼬리를 삐죽거렸고, 정선제와 태자, 조정의 신하들은 말문이 막혔다.

“하하하!”

그 자리에서 양왕만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조앵기는 조그만 깃발을 흔들며 신이 난 듯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연채! 연채!”

정선제는 입꼬리를 샐룩거렸다. 사실 그도 유곡요가 대제 제일의 재녀도 아니고 최고의 여성 바둑꾼도 아니라며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대제의 여인들 중 확실히 유곡요의 바둑 실력이 가장 뛰어났으니, 그녀가 대제 제일의 여성 바둑꾼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자신도 누군가가 나서 주기를 바랐지만 그러려면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 했다. 실력이 없으면 또 저들에게 비웃음만 당하지 않겠는가?

정선제는 차마 이 상황을 지켜볼 수가 없어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태자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엽연채가 사리에 밝은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실은 이렇게 어리석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면 대제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엽이채와 포기는 코웃음을 쳤다.

‘저 빌어먹을 계집애가, 스스로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서자 놈이 지금 티끌만 한 공을 세웠다고 자기도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감히 주제넘게 나서다니! 과연 어떤 불똥이 떨어질지 궁금하네!’

“확실히 대제 최고이기는 하군.”

누군가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름 아닌 북연 태자 호막의 목소리였다. 탁자에 앉아 있는 그는 엽연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그대는 대제 제일의 미인 아닌가? 하하하.”

그 말에 북림과 동안 사람들은 모두 큰 소리로 따라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사양하고는 자신만만한 말투로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대제 제일의 여성 바둑꾼이라고 했습니다.”

호나타는 얼굴을 쳐들고 엽연채를 쳐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농담하지 마시오. 그쪽이 대제 제일의 재녀이자 최고의 여성 바둑꾼이라고?”

“왜 저면 안 됩니까?”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제가 대제 최고의 여성 바둑꾼임을 밝혔는데, 그 사실이 공주마마께서 맞다고 하면 맞는 것이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 됩니까?”

호나타는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이건 억지가 아닌가? 하하.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건가? 분명 대제 최고의 재녀이자 여성 바둑꾼이 졌네. 체면이 상하는 게 두려워 인정하지 않는 거겠지.”

“그건 북연의 생각일 뿐이지요. 우리는 최고의 재녀와 제일의 여성 바둑꾼을 딱히 누구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방금 전에 유 재상의 적장손녀를 찾으셨죠. 그래서 그 적장손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뭐 잘못됐나요? 하지만 그분은 대제 최고가 아닙니다! 그렇죠? 초 부인.”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유곡요를 쳐다봤다.

유곡요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지금 누군가가 나서서 자신에게 멍석을 깔아 주니 당연히 기쁜 일이었다. 자신이 대제 제일의 재녀이자 최고의 바둑꾼이 아니라고 하면 북연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깎이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자신이 미워하는 엽연채가 나섰으니, 응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응하고 싶지 않아도 응해야만 했으니, 유곡요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 백관의 우두머리인 유 재상의 적장손녀입니다. 저분의 말이 맞습니다.”

호나타는 두 눈을 부릅뜨더니 가소롭다는 듯 엽연채만 쳐다보며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대제 제일의 재녀이자 최고의 여성 바둑꾼이면 우리 바둑 실력을 한번 겨뤄 봐요. 정말 당신이 맞는지 한번 봐야겠어요.”

그러자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제가 왜 공주 마마와 겨뤄야 하죠?”

“당신이 대제 제일의 재녀이자 최고의 여성 바둑꾼이라는 걸 증명하려면 나와 겨뤄야 하니까요.”

“대제 제일의 재녀는 그렇게 값싸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공주마마께서 겨루고 싶다고 겨룰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절 어찌 보시는 겁니까?”

호나타의 도발에도 엽연채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저……!”

호나타는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다.

‘저런 뻔뻔한! 억지를 부려도 유분수지. 대제가 막무가내로 구는구나!’

호나타는 대제를 콱콱 밟아 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들은 대제가 항상 자신들을 업신여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해지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오랜 노력 끝에 북연은 풍요로워졌고, 더는 대제가 거들먹거리며 잘난 척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북연은 문관을 중시하고 무관을 경시하는 나라라 뛰어난 군인이 없고, 또 나라를 더욱 부강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현재의 평화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제와 전쟁을 벌여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라가 부강해졌으니 더 이상 나약하게 울분을 참고 싶지만은 않았다. 전쟁으로 맞붙을 수 없다면 다른 부분에서 이기면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요 몇 년 동안 매번 대제와 갖가지 것들을 겨루려고 했다.

그래서 매년 만수절에 씨름이나 경마, 금琴이나 서예, 그림 실력을 겨뤄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러 해를 겨뤄 왔지만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특히 몇 년 전 북연에서 가장 유명한 금 연주자가 대제에 와서 금 연주 실력을 겨뤘는데, 대제의 묘 공자 실력이 비할 데 없을 정도로 아주 뛰어났다. 쌍사금雙思琴 연주가 아주 훌륭해 뭇 새들이 그 위를 선회할 정도였고, 북연의 금사는 참패를 당했다.

북연의 사자들도 머리 위를 선회하는 새들을 바라보며 놀라서 얼이 빠졌고, 그때부터 그들은 더는 대제와 겨룰 면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북연이 어찌 그에 굴복해 분노를 삼킬 수 있겠는가!

호나타는 어릴 때부터 바둑 두기를 좋아해 북연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棋士에게 십여 년간 바둑을 배웠다. 그런데 북연이 대제에 겁을 먹고 몇 년 동안 겨룰 엄두를 못 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후로 그녀는 설욕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녀는 준비를 꽤나 철저히 했고 사람을 시켜 대제의 기사들을 알아보기까지 했다. 들어 보니 기사들은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도 양왕과 임국공이 최고의 기사라고 했다. 그에 호나타는 그들의 기보를 손에 넣었는데, 북연에는 그들을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호나타는 여성 기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알아보니 유 재상의 적장손녀 유곡요가 대제 제일의 재녀이자 최고의 여성 바둑꾼이라고 했다.

유곡요의 기보도 손에 넣었는데, 보니 그녀를 이기는 정도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북연 황제, 태자에게 여성 바둑꾼으로서 바둑 대결을 하겠다고 진언했다.

호나타는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같은 스승에게 배운 여후배 예인과 해주를 함께 데리고 왔다. 두 사람은 바둑 실력이 아주 뛰어났다.

특히 제일 어린 후배인 해주는 스승의 여식인데, 어릴 때부터 바둑을 두는 환경에서 자란 덕인지 천부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이해력도 아주 특출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그녀와 예인보다 바둑 실력이 훨씬 훌륭했다. 유곡요가 열 명 넘게 와도 이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들은 실제로 힘을 합쳐 유곡요를 처참히 박살 냈고 이제는 대제까지 꼴사납고 난처한 지경으로 몰아붙였다. 호나타와 북연 사람들은 생각할수록 통쾌했다.

그렇게 한참 득의양양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튀어나와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리며 유곡요가 대제 최고의 바둑꾼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이었다. 거짓말까지 동원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호나타 일행은 이미 대제 최고의 여성 바둑꾼을 이겼고, 북림과 동안이 이를 눈에 새겼으며 모두들 대제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북연은 오랫동안 모욕을 참아 왔으니 울분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대로 토해 내야만 했다. 이렇게 목구멍에 생선 가시가 걸린 양 토해 내다 말고 다시 삼킬 이유가 없었다. 대제가 완전히 승복해서 직접 ‘우리가 졌소.’라는 말을 꺼내게 해야 했다.

그런데 대제는 생판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지금 북연이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은 호나타와의 바둑 대결에 응하지 않을 성싶었다.

호나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도발했다.

“어떻게 된 거죠? 기백이 넘치던 대제가 이렇게 담력이 없다니요.”

그녀는 눈알을 굴리더니 또 이렇게도 제안했다.

“저희가 지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오늘 드린 선물의 두 배 정도면 어떻습니까? 아니, 앞으로도 북연에서 보내는 물건은 모두 배로 드리지요.”

엽연채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지고서도 이득을 취하려고 하시네요?”

이어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북연에서 보내는 선물에 우리 대제는 언제나 답례품을 곱절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배라고 하셨나요? 그럼 우리 대제는 답례품을 또 평소 드리는 답례품의 배로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실상 바둑 대결을 핑계로 이득을 취하려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대전 안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가 정선제와 조정 신하들이 일제히 하하하 떠들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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