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46화 (346/858)

제346화

엽연채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살짝 움켜쥐었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추경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지난번 별장에서의 일이 또 떠올랐다. 그녀는 추경과 죽순을 뽑는 내내 몹시 우울해했다.

그러다 주운환이 오자 그녀는 바로 주운환에게 화를 냈는데, 그때 그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듯한 부분이 있었다. 주운환을 본 그 순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의 입꼬리에 미소가 번진 것이었다. 그리고 주운환은 그녀를 안고 그곳을 떠났다.

추경은 아직까지도 그때의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주운환은 훤칠하고 미끈한 체형에 뛰어난 용모, 늠름하고 멋스러운 풍채를 뽐냈고, 엽연채는 그의 품에 바짝 기대어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친밀하고 다정해 보였다.

추경은 그날부로 일부러 그 일을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살짝 하얘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엽연채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저도 모르게 그때의 장면이 또 떠올랐다. 날카로운 것으로 쿡쿡 쑤셔지는 양 마음이 괴로웠다.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들어 그들을 쳐다보며 대꾸했다.

“오라버니들, 두 분이 저에게 마음 써 주시는 걸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서는 저도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요.”

그러자 추경은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 일은 미뤄서 좋을 게 없다. 미루면 미룰수록 막내이모님은 더욱 걱정스러워하고 괴로워하실 거다. 서둘러 해결하는 편이 낫지. 도성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까 봐 그러는 거라면 너와 막내이모님이 우리와 함께 정성으로 가도 되고.”

엽연채는 순간 멍해졌다.

“그게… 오라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저와 어머니가 어떻게 오라버니들과 함께 정성으로 갈 수 있겠어요.”

“그게 뭐 어때서. 우리 아버지와 조부모님은 이미 모두 돌아가셨다. 그러니 집안의 주인은 바로 우리 어머니이시다. 큰형님이 가업을 물려받으셨는데 형님은 너그러운 분이고 형수님도 아주 온화하고 선량한 분이셔. 너와 작은이모님이 가면 두 분은 환영해 줄 거야. 그런 다음…….”

그녀가 자신에게 시집오게 되면 진정으로 한 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추경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나 엽연채는 재차 거절했다.

“안 돼요!”

이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추경을 쳐다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제 오라버니는 이곳에 있잖아요…….”

“네 오라버니를 걱정해서라고?”

추경은 죽어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저 변명에 불과한 말이었다.

“너 설마…….”

그는 도저히 그다음 말을 하고 싶지 않았고 입도 떨어지지 않아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네 부군이 부부로 지내지 않겠다고 해서 이혼하겠다는 것 아니냐? 네 부군이 널 좋아했다면 널 아내로 맞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거다. 이젠 장원 급제도 했는데 아직도 너에게 대답을 주려고 하지 않고 있다. 왜 그랬겠느냐?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분명히 말하지 못할 게 뭐가 있느냐?”

추경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엽연채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허옇게 질린 얼굴로 돌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는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됐고 세상에서 버려진 것처럼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형님.”

추랑은 엽연채의 표정을 보더니 차마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추경을 잡아당기며 엽연채에게 말했다.

“연채야, 잘 생각해 보렴. 우린 네가 네 부군에게 속지 말았으면 하는 거야. 그럼 우린 이만 돌아가 보마. 그리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우리에게 털어놓으렴. 우리가 힘껏 널 도와줄 테니까.”

그러면서 추경을 끌어당겼다. 추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속에서 화가 치밀었지만 안타까운 마음 역시 들었다.

“연채야…….”

“형님, 우린 이만 가죠!”

추경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추랑에게 끌려 나갔다.

두 사람이 문을 나서자 추랑이 입을 열었다.

“연채에게 생각할 시간을 줘요.”

“연채가 혼자서 깨달을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질질 끌 필요가 있었겠니?”

그리 말하는 추경은 속에서 천불이 났다.

“저희가… 여인이 아닌 걸 탓해야죠, 뭐!”

추랑이 갑자기 그런 말을 하자 추경은 말문이 막혔다.

“저희가 여인이었으면 연채가 무슨 일이든 저희에게 이야기했을 거예요. 이틀 후에 다시 보러 와요. 아니면… 이 일을 막내이모님에게 알려요. 이모님이 연채를 설득하게 하는 거죠.”

“이모님에게 알리면 안 된다.”

추경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바로 추랑의 뜻을 거절했다.

“이모님께서 아시게 되면 주운환의 마음을 꽉 붙잡으라고 연채를 설득하실 거다.”

추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해했다.

“그러고 보니 주 공자가 연채에게 정말 잘해 주네요. 연채 고모와 탐화도 연결해 주지 않았나요? 이혼하고 싶다면 두 사람을 이어 주지 않았겠죠. 정말 이혼할 생각이라면 후에 탐화와 함께 일하기가 아무래도 껄끄러워질 테니까요.”

추경은 순간 멍해졌으나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분명 연채가 부탁했겠지. 연채에게 보상해 주고 싶어서 그리했을 거다.”

추랑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추경의 모습을 보니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수화문에 도착하자 때마침 찬합을 들고 걸어오는 추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두 사람을 보더니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도련님들, 돌아가시는 거예요? 식사 안 하시고요?”

그러자 추랑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둘러댔다.

“집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다음에 하자꾸나.”

“예. 그럼 두 분 살펴가세요.”

“그래.”

추랑의 인사를 받은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추길은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잠시간 지켜보다가 다시 서과원으로 향했다.

궁명헌으로 들어가자 탁자 옆에 앉아 있는 엽연채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인 채라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가씨?”

추길이 그녀 쪽으로 걸어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낮잠을 좀 자야겠구나.”

엽연채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방으로 걸어갔다.

추길은 어리둥절했다.

‘낮잠을 잔다고? 아직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도 안 됐는데?’

엽연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추길은 그녀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엽연채가 침실로 가자 추길은 곧장 서차간으로 갔다. 혜연은 그곳에서 새로 재단해 온 여름옷 위에 수를 놓고 있었다.

추길은 낮은 목소리로 혜연에게 말을 붙였다.

“아가씨께서 왜 저러시지?”

“왜?”

갑작스러운 물음에 혜연은 얼떨떨했다. 혜연은 아까부터 계속 여기서 수를 놓고 있었고, 엽연채는 밖에서 추씨 가문 형제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수를 놓는 데 집중하여 추씨 가문 형제들이 떠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가씨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 지금 낮잠을 주무신대.”

혜연은 고개를 숙인 채 주운환이 요즘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걸 떠올리더니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여쭤봤자 아무 소용없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 * *

그 시각, 어계루.

3층 복도 맨 끝에서 두 번째에 자리한 방. 양왕은 강태공이 낚시를 하는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병풍 뒤에 있는 탑상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주운환은 한쪽에 놓인 태사의에 앉아 나이 든 남자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남자는 육십 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으로,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모습이었다.

노인은 흰 돌을, 주운환은 검은 돌을 집고 대국 중이었는데 바둑판을 보니 흰 돌은 이미 수세에 몰려 반격할 여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노인이 옅은 한숨을 쉬며 주운환을 추켜세웠다.

“운환이의 실력을 보니 정말로 응성에 가게 되면 분명 그곳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게다.”

“스승님, 과찬이십니다.”

그러나 주운환은 냉담한 표정으로 말을 받을 뿐이었다.

“이건 그저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

주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 제자를 제일 높게 평가하는 부분이 바로 실행력과 겸손함이었다. 병서와 병법을 못 외우는 자가 어디 있으며 바둑을 못 놓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그 말고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전장은 바둑판이 아니고 병졸 또한 차가운 바둑돌이 아니었다. 병졸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생사가 걸린 전장에서 주위에 선혈이 낭자한 광경을 보게 되면 공포에 휩싸여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면 분명히 우세였던 상황도 얼마든지 열세로 뒤바뀔 수 있었다. 그곳에서 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하며 다음 판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아침 급보가 왔소.”

창문 밑에서 양왕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풍씨 가문 늙은이도 아들처럼 참수당했다고 하더군. 응성은 함락됐고 풍씨 가문 젊은 장수 둘이 남은 백성들을 데리고 옥안관으로 후퇴했다고 하오.”

주운환은 ‘옥안관’ 세 글자를 듣더니 뼈마디가 선명히 도드라진 손가락을 그러쥐었다.

주 스승은 차갑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던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풍씨 가문은 소씨 가문과 주씨 가문이 몰락하지 않았다면 이 일을 맡지도 못했을 겁니다! 응성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을 텐데 이제 두 야만족이 힘을 합쳐 공격해 오니 말라 썩은 초목이 쓰러지듯 쉽게 무너져 내린 겁니다. 공세에 맞서 한 달가량을 지켜낸 것도 이미 예상 밖의 성과인 셈이죠.”

“운환아, 준비는 되었느냐?”

양왕은 웃는 듯 마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쳐다봤다.

“예.”

주운환은 냉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양왕은 ‘픽’ 가볍게 웃으며 당부했다.

“죽지 말거라.”

“예.”

주운환은 그리 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어계루를 나온 주운환은 평소 무술을 연마하는 장소로 가서 여양, 여한과 함께 한나절 이상 연습했다. 그런 후 집으로 돌아와 보니 시간은 이미 자시子時(밤 11시~새벽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은백색 달빛을 맞으며 난죽거로 걸어갔다. 여양이 열쇠를 꺼내 문을 열자, 문 입구에 서 있던 주운환은 저도 모르게 가까운 곳에 위치한 궁명헌으로 시선이 향했다.

대문 앞엔 어스름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등롱이 걸려 있었는데 바람이 불자 불빛이 깜박거렸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곳으로 걸어가 등롱을 살짝 어루만졌다.

빛을 뿜어내는 등롱에서는 약간의 온기가 느껴졌다. 주운환은 의식하지 못한 채로 차가운 대문 위에 손을 올렸다. 살짝 밀어 보았지만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살며시 한기가 일어 그는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미 난죽거의 문을 열어 놓은 여양은 그가 걸어오자 이렇게 말했다.

“너무 늦어서 마님께서는 이미 주무시나 봅니다. 내일 다시 오시죠!”

그러나 주운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되었다.”

세 사람은 목욕을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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