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45화 (345/858)

제345화

풍 노장군이 응성에 도착한 후 거의 매일같이 응성에서 온 서찰이 황제의 서안 위로 날아들었다. 전장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서노와 남쪽 이민족에게 패하여 줄행랑을 치는 일이 다반사이니, 당연히 그들을 몰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적잖은 병사와 군마를 잃게 되었다.

조정의 분위기는 더없이 무거웠다.

요 며칠 엽연채가 보니 주운환은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녀는 하루 종일 창틀에 몸을 기댄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늘 정오가 되어서야 마침내 제때에 퇴청하는 주운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가 궁명헌으로 들어오자 엽연채는 얼른 그에게 뛰어갔다.

“공자, 요즘 어떻게 된 거예요? 집에 자주 돌아오지 않던데요?”

“바빴습니다.”

주운환은 그리 대꾸하며 엽연채의 침실로 들어가 화장대 옆에 놓인 작은 수납장 앞에서 멈추었다. 그는 수납장 자물쇠를 열어 뒤적이다가 검은 천으로 싼 보따리 하나를 꺼냈다. 전에 그가 이곳에 남겨 둔 물건이었다.

“양왕 전하를 뵈러 가는 거예요?”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따리를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엽연채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 그를 쫓아가며 말했다.

“저도 갈래요.”

“안 됩니다.”

주운환이 딱 잘라 거절하자 엽연채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졸라댔다.

“저도 데려가요! 데려가 줘요!”

그러면서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주운환은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응시하자 반짝거리는 그 모습에 가슴이 설레었고 마음이 녹아내렸지만,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안 됩니다. 소저는 집에 계십시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더니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는 싸늘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니 억울해 죽을 것만 같았다.

“날 한편으로 끌어들여 함께 반역을 꾀하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나는 못 데려간다는 거야?”

한쪽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혜연은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건 좋은 일이 아닌가! 어째서 꼭 나들이를 못 가게 된 것처럼 실망한단 말인가?

혜연은 이어 하늘을 향해 절을 올리며 생각했다.

‘아가씨를 데려가시지 않아서 정말 천만다행이다!’

앞으로는 그런 무섭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혜연은 생각했다.

“아가씨, 저희 어서 방으로 돌아가 수를 놓아요!”

혜연은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끌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엽연채는 입을 삐죽 내밀며 톡 쏘았다.

“난 집에서 수나 놓고 싶지 않단 말이다!”

하지만 엽연채는 결국 혜연에게 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엽연채는 새로 재단한 옷 몇 벌을 살펴보았는데, 그중 세 벌은 주운환의 것이었다. 그녀는 항주 비단으로 만든 연한 남색 도포를 집어 들더니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수나 놓자꾸나!”

요 며칠 집안은 지극히 평온했다. 진씨의 생일 축하연이 있은 후, 그녀와 주묘서는 병이 났다며 하루 종일 일상원에 틀어박혀 있었고 자식들이 조석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조차 마다했다.

덕분에 엽연채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 * *

오월 초나흗날은 주묘화의 생일이었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이 모양 이 꼴인데 누가 그녀에게 생일잔치를 열어 주겠는가? 그저 백 이낭이 그녀를 데리고 밖에 나가 하루 논 것으로 생일을 축하한 셈 쳤다.

이튿날, 오월 초닷샛날. 황제는 응성 일 때문에 용주 경기를 볼 기분이 아니라 이날 천수하天水河로 가지 않았다. 백성들도 응성 일에 관심은 있었지만 그쪽 상황을 모르는지라 평년처럼 떠들썩하게 정양절을 보냈다.

엽연채는 마음이 울적해 구경하러 가지 않았고, 주묘서는 얼굴을 들고 밖에 나갈 수가 없어 가지 않았다. 당연히 주묘화도 외출하지 않았다.

오월 초열흘날, 막 아침 식사를 마친 엽연채는 혜연과 함께 나한상에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추길이 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사촌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아!”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가 오셨구나.”

자수틀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 보니 추길이 추경과 함께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추경이 추랑과 함께 술을 들고 궁명헌으로 들어오니 엽연채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들을 맞이하러 나오고 있었다. 소매의 통이 좁은 아름답고 화려한 월화군을 입은 그녀는 맑고 아름다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고 두 눈동자는 반짝거렸다.

추경은 그 모습을 보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넘쳐흘러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다정히 불렀다.

“연채야.”

엽연채가 다가가 보니 추경과 추랑은 각자 작은 술 단지 하나를 들고 있었다. 엽연채는 보자마자 그녀의 별장에서 담근 새로운 대나무주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새 술이 완성된 거예요?”

“그래!”

추랑이 헤헤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대나무를 좋아하는 걸 아니 제일 먼저 이리로 가져온 거란다. 너 주려고 천 리 길도 마다치 않은 거지.”

엽연채는 ‘흥’ 하고는 새초롬하게 대꾸했다.

“천 리 길도 마다치 않았다고요? 몇 리나 된다고요.”

장난 섞인 핀잔에 추랑은 하하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만큼 우리 둘째 형님의 마음이 간절했단 소리지. 반 시진 정도면 올 수 있는 거리라지만, 형님에겐 천 리 길처럼 머나먼 길이었거든.”

“도련님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추길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파초나무 아래의 돌 탁자 쪽으로 안내했다.

“저는 주방에 가서 술안주를 가져오겠습니다.”

추길은 재빨리 사라졌고, 엽연채와 추경 형제는 탁자 쪽으로 걸어가 돌의자에 앉았다.

진작에 방 안으로 들어간 혜연은 벽옥 술잔과 술 주전자를 가져와 탁자 위에 하나하나 내려놓더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번에도 작은 화로가 필요하신가요?”

그러자 엽연채가 냉큼 말했다.

“아니! 요 며칠 동안 더워 죽을 뻔했다! 이번엔 꼭 차갑게 마시고 말 거야.”

“그럼 차갑게 마시렴.”

추경은 그녀를 쳐다보며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올려진 광택이 도는 청록색 술 주전자와 술잔을 쳐다보며 말했다.

“주전자와 술잔이 아주 보기 좋구나.”

“그럼요. 새 대나무주이니 당연히 녹색이 어울리죠.”

혜연이 이리 대꾸하는 차에 추길이 주방에서 술안주를 들고 왔다. 오리 혀와 고추를 넣은 닭발, 매괴고玫瑰糕였다.

추랑은 새 대나무주를 벽옥 술 주전자에 따른 후 이어 탁자 위에 놓인 술잔 다섯 개를 채웠다. 혜연도 앉혀 함께 몇 잔을 마셨다.

엽연채가 말했다.

“오라버니들, 이따가 여기서 같이 식사해요. 추길아, 가서 식사 준비를 하거라.”

추길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후 자리를 떴고, 혜연은 엽연채와 추씨 가문 형제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는 자수를 마저 놓으러 방으로 돌아갔다.

“식사를 이렇게 빨리 준비한다고? 들어 보니 네 부군은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지나야 퇴청을 한다던데, 돌아오면 못해도 오시가 절반은 지났을 거다. 지금 준비해 두면 밥과 반찬이 다 식을 거 아니니.”

추랑의 만류에 엽연채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요즘 바빠서 집에 거의 오지 않아요.”

추경은 두 눈을 살짝 깜빡였고 추랑은 저도 모르게 생각에 잠겼다.

‘사촌 매부가 하는 걸 보니 정말로 연채와 헤어질 생각인 것 같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 연채를 이리 홀대할 수가 있겠어.’

추경이 화제를 바꾸었다.

“아까 우리가 집에서 출발하려는데 막내이모님께서 요즘 네가 이모님을 뵈러 오지 않는다고 하시더라.”

그 말에 엽연채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도 물론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지난번 어머니가 의원을 불러왔던 일 때문에 난감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온종일 자신의 배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면, 정말이지 생각만으로도 영 난처하고 거북했다.

“요즘 집안에 일이 많았어요. 그래서 며칠 전에서야 정양절 선물을 보냈죠.”

엽연채가 적당히 핑계를 대자 추경이 이리 대꾸했다.

“지금 비록 막내이모님이 아주 부귀한 삶을 누리시는 건 아니지만, 모든 게 안정되었고 균이도 안분지족하며 지내고 있으니 넌 걱정할 것 없단다.”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더 이상 망설일 필요도 없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리도 최선을 다해 너를 도울 것이다.”

추경은 그리 덧붙이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이혼을 실행에 옮기기에 앞서 해결해야 할 것은 이제 무엇도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엽연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정말로 부탁할 일이 생기면 주저 않고 부탁드릴게요.”

추랑은 추경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형님, 돌려 말하지 마세요. 할 말이 있으면 정확히 이야기해요.”

그러자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오라버니, 저에게 할 말이 있어요?”

가슴이 조마조마한 추경은 옅은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작년에 우리가 네 아버지를 감옥에 집어넣은 후, 네가 우리 집에 와서 후원을 거닐지 않았니?”

“음… 그랬던 것 같네요.”

엽연채는 그 일을 잊고 있었다.

추경이 이어서 말했다.

“그날 내가 처음으로 직접 네게 음식을 만들어 주었지.”

“아, 기억나요.”

엽연채는 하하 웃으며 맛본 음식을 떠올렸다.

“그날 오라버니가 죽순초육사를 만들어 주었죠. 맛있었어요.”

추경은 손으로 눈을 가리며 생각했다.

‘먹는 것만 기억하다니.’

“점심밥을 먹기 전에 네가 추길이, 혜연이와 함께 화원에서 거닐면서 한 말이 있잖아.”

“제가 무슨 말을 했었는데요?”

엽연채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잊어버렸구나. 하긴 그건 너희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대화였을 테니까. 기억 못 하는 것도 당연하지.”

추경은 헛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날 너희들은 네 혼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단다. 네가 추길이에게 네 부군이 널 원하지 않으니 이혼할 거라고 이야기했지.”

엽연채는 깜짝 놀랐고 특히 ‘네 부군이 너를 원하지 않으니’라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신이 이런 말을 밖에서 했단 말인가? 하긴 추경이 말했듯 그건 별 생각 없이 주고받은 대화였으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이상치 않았다.

“너희들이 화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나와 추랑은 마침 대나무 뒤에서 술을 옮기고 있었다. 일부러 엿들은 건 정말 아니란다.”

추경이 그녀에게 사과의 뜻으로 읍했다.

“아… 괜찮아요.”

엽연채는 그가 잘못한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또 그가 어쩌다 자신의 비밀을 듣게 된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어쩐지 속으로 좀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연채야, 우린 한 가족이니 솔직히 말해도 된다.”

추랑이 끼어들었다.

“전에는 막내이모님이 네 아버지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처지였으니 너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미뤄 두고 있었겠지. 하지만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됐으니 너도 망설일 필요 없다. 이혼하면 그만이야. 네 부군이 너를 원하지 않는 거니 합의하기도 더 좋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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