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온씨는 화가 나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동서, 억지 좀 그만 부리게. 어떻게 일만 났다 하면 다 우리 연채에게 갖다 붙이는 건가?”
“제가 틀린 말 했나요?”
손씨는 혀를 쯧쯧 차며 말을 이었다.
“큰아주버님이 감옥살이를 하시게 된 데 연채도 한몫했잖아요. 그리고 그전에 이채가 혼례식을 올리기 위해 혼수를 빌리려고 했을 때도 연채가 난리를 치는 바람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죠. 연초부터 난리를 피워 대더니 연말까지 그럴 모양이죠!”
엽연채가 조롱기 섞인 목소리로 조목조목 반박했다.
“아버지가 어머니 혼수품을 훔쳐 외실에게 갖다 바치지 않았으면 감옥에 들어갈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숙부와 숙모도 노름으로 혼수품을 날려 먹지 않으셨다면 제 혼수품을 어떻게 해 볼 생각도 하실 필요 없었겠죠.
연초부터 난동을 피워 대더니 연말까지 그럴 모양이라고요? 확실히 그렇긴 했죠. 그런데 그 난리를 피운 건 제가 아니라 아버지와 숙부네죠! 형편없는 인간들이 들쑤시고 다니지 않으면 우리도 소란을 피우지 않겠죠! 우리가 조용히 있길 바라시면 방종한 생활을 그만하고 분수에 맞게 사세요!”
엽학문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들의 인격을 모독한다고 생각해 그녀를 꾸중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찰나에 묘기전이 고개를 끄덕이며 엽연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말이 맞다.”
묘기전은 그리 말하며 엽학문을 쳐다봤다.
“고모부님. 고모부님 집안은 늘 이렇습니까? 일이 생기면 그 일을 벌인 사람은 두둔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만 나무랍니까?”
말문이 막힌 엽학문은 내뱉으려던 말을 도로 삼키더니 손씨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말을 못 하면 입이라도 닫고 있거라!”
체면이 깎인 손씨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엽이채와 엽승신도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부 다 오해였음이 밝혀졌으니 그럼 저희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팽씨가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묘씨 가문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자 방 안은 휑해졌다.
엽이채는 소란을 피우던 모친이 창피를 당했으니 여기에 더 있기가 싫어 배를 잡으며 일어섰다.
“할아버지, 늦었으니 저도 가 봐야겠습니다.”
“너희 모두 이만 돌아가 보거라!”
엽학문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가 준비되어 있기는 했지만 이 꼴이 되어 버렸으니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엽영교 일로 아직 화가 나 있었고 손씨가 방금 전에 했던 말도 영 신경이 쓰였다. 손씨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대신 해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두 여종이 선물을 들고 와 혜연과 류아에게 각각 건네주었다.
답례품을 건네받은 혜연은 내용물이 뭔지 슬쩍 쳐다보다가 그만 표정이 확 굳어 버렸다. 자신의 손에 들린 답례품은 무늬가 들어간 장화妝花 옷감과 집안에서 만든 떡 두 상자인데, 그에 반해 류아의 손에 들린 답례품은 항주산 비단에 문방사보文房四寶였다. 집안에서 만든 떡 두 상자만 같게 든 셈이었다.
엽이채는 엽학문이 자신을 더 챙기는 걸 보더니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를 쳐다보았다.
“큰언니, 저 먼저 가 볼게요.”
엽이채가 밖으로 나가자 온씨는 화가 나 눈에 핏발이 섰다. 손녀들이 똑같이 친정집에 월병을 선물하러 왔고 심지어 엽연채가 준비한 선물이 엽이채 것보다 훨씬 비싼 것임에도 엽학문은 답례품을 다르게 주면서 둘을 편애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설명 한마디조차 하지 않고 말이다.
묘씨는 답례품을 보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원래 엽이채의 비위를 맞춰 줄 생각이었다. 지금 엽영교의 혼사에 문제가 생겼으니 딸에겐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더더욱 필요했다. 그러나 비위를 맞춘다 하더라도 티 나지 않게 해야지, 누가 엽학문처럼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쪽의 체면을 깎아내리면서 한단 말인가.
손씨와 엽이채가 완전히 방에서 나가자 묘씨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방금 전 너희들이 계화꽃을 따러 갔을 때 이채가 우리에게 문방사우를 부탁하기에 준비해 준 거란다.”
그러나 엽학문은 도리어 콧방귀를 뀌더니 엽연채를 쳐다보며 냉담하게 질책했다.
“이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친정집을 들락날락하는 너와는 달리 모처럼 한 번 온 것이다. 연채 너도 한 사내의 아내가 되었으니 며느리 노릇을 해야지. 별일 없다고 매일같이 이곳에 들락날락하지 말고 너희 집에서 시부모님이나 잘 모시고 지내거라.”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되받아쳤다.
“할아버지, 집안이 평안하고 저희 어머니가 잘 계시면 저도 굳이 이곳에 드나들려고 하겠습니까?”
그 말에 엽학문의 험상궂은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엽연채는 예를 올린 후 온씨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안녕당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영귀원으로 향했다. 처소로 돌아온 온씨는 귀비의에 앉아 한탄했다. 그녀의 두 눈은 불그스레해져 있었다.
“이게 다 내가 변변치 않아서다. 어미가 부족해 늘 네가 억울한 일을 겪게 만드는구나.”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달랬다.
“전 늘 어머니가 걱정될 뿐이에요.”
온씨도 딸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미채와 함께 별장에 가서 한동안 그곳에 머물러야겠다. 내가 보고 싶거든 너도 별장에 와서 나를 보면 되잖니.”
엽연채는 그 말을 듣고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요. 어느 별장으로 가시려고요?”
“네 혼수로 딸려 보낸 별장은 어떠니? 그곳은 네 별장이니 네가 오고 싶으면 아무 때나 올 수 있잖니. 거기 말고 딴 데에 머무르면 또 소인배들이 아버님 앞에 쪼르르 달려가 네가 걸핏하면 친정집에 온다고 고자질할 것이다.”
온씨는 옅은 한숨을 쉬며 이리 말했다.
“그럼 언제 가시려고요?”
“음, 채비를 해야 하니 사흘 후로 하자꾸나! 그곳에 가서 좀 지내다가 중추절이 되면 돌아와야겠다. 시간이 늦었으니 너도 어서 돌아가 보거라.”
이에 엽연채는 답례품을 들고 혜연, 추길과 함께 문을 나섰다. 온씨는 처소 밖 계단에 서서 엽연채의 뒷모습이 뜰 입구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숫가를 따라 걸어가던 엽연채는 계향 정자에 앉아 있는 엽영교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고모, 괜찮아요?”
엽영교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괜찮아.”
“그럼 고모 혼례식은요?”
엽연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이미 내년으로 미루었잖아?”
엽영교는 힘없이 미소 짓고는 대화를 일단락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지금은 마음이 너무 심란해.”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지금 그녀에겐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엽연채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엽영교에게 인사를 건넨 후 자리를 떴고, 금세 수화문에 도착해 여종들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추길은 엽씨 가문에서 받은 답례품을 짐을 싣는 칸에 집어 던진 후 냉랭한 목소리로 엽학문을 헐뜯었다.
“후야도 참 너무하셔요. 모두 앞에서 편애하시고!”
“원래 그런 분이시잖아. 어쩜 그리 볼썽사나운 일은 다 저지르시는 건지 원. 게다가 앞으로도 계속 그러실걸.”
혜연의 대꾸에 추길은 미간을 찌푸렸다. 엽연채가 주씨 가문으로 시집간 그날부터 이런 모욕을 당할 거라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었다.
엽연채는 마차의 발을 걷어 올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도 이런 무력감 앞에서는 더없이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노력한대도 결국 자신의 계급을 바꾸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평생 이렇게 모욕당하며 살게 될 것이었다.
마차가 이각쯤 달려 정국백부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궁명헌으로 돌아온 엽연채는 식사를 한 뒤 화본을 잠깐 보다가 목욕하고 잠이 들었다. 다들 수다를 떨 기분이 아닌지라 저녁 내내 궁명헌은 고요했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아침 식사를 한 뒤 탑상에 앉아 서책을 읽고 있었다. 이때, 녹엽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셋째 마님, 사돈 마님과 엽 소저께서 오셨습니다. 사돈 마님께서는 지금 일상원에 계십니다.”
그리 고하는 녹엽의 뒤에서 열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저가 걸어 나왔다. 엽미채였다.
“큰언니.”
“미채야?”
엽연채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별장에 갈 준비를 하는 게 아니었어?”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께 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겨서요.”
엽미채는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서 큰언니 집에 오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인데?”
“지난번에 큰언니 시어머니께서 저희 어머니께 주 대소저의 혼처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셨잖아요?”
엽미채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랬지.”
엽연채는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쪽머리를 만진 후 자신이 일상복을 입고 있으며 깔끔한 차림새임을 확인하더니 엽미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엽미채가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어제 큰언니가 떠난 후에 한 부인께서 저희 가문에 오셔서는 주 대소저가 마음에 드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저희 어머니께 이야기를 전달해 달라고 하셨죠.”
함께 듣고 있던 추길과 혜연은 어리둥절해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그분 눈에 든 거래요?”
“지난 유월 할머니 생신 축하연에서 보셨대.”
“그렇게 오래 전에요? 그런데 왜 이제서야 이야기를 꺼내신 거래요?”
혜연이 놀라 묻자 엽미채도 잘 모른다고 대꾸했다.
“잠시 후에 어머니께서 이야기해 주실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엽연채 일행은 일상원에 도착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녹엽이 한발 먼저 걸어가 안쪽 발을 걷어 올렸다.
엽연채가 엽미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서차간에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가 주렴을 걷으니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진씨는 손자 주학해를 안고 탑상에 앉아 있었고 온씨는 오른쪽에 놓인 권의에 앉아 있었다. 강심설과 백 이낭은 좌우 의자에 자리했다.
“어머님.”
엽연채는 먼저 진씨에게 인사를 올리고 온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오셨어요.”
“그래!”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자기 옆에 앉으라고 권했다. 엽연채와 엽미채가 곁에 앉자 온씨는 진씨를 쳐다보며 물었다.
“안사돈, 어째 큰소저와 둘째 소저가 보이지 않네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씨는 백 이낭의 처소에 있었다. 갑자기 녹지가 온씨의 방문 소식을 전해 급히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기에,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아직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진씨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두 녀석은 밖으로 놀러 나갔습니다. 오늘 안사돈께서 방문하실 줄은 몰라 녀석들이 실례를 범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