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손씨는 흥이 올랐지만 겉으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희야말로 기화가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영교를 이리 노엽게 했는지 묻고 싶군요!”
팽씨는 역정을 내더니 엽영교를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영교, 네가 말해 보거라. 어쨌든 시집오는 건 너이지 않으냐. 네가 그렇게 불만이면 이 혼사는 없던 일로 하자꾸나!”
그 말에 엽영교의 표정이 확 굳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엽학문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번 엽영교가 혼사를 물리겠다고 수선을 피웠을 때 그도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엽영교를 노려보며 노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게 네가 벌인 짓의 결과다.”
그러더니 묘씨에게로 고개를 돌려 그녀도 탓했다.
“그저 영교가 철없이 행동한 것뿐인데, 당신이 이 사소한 일로 야단법석을 떨어 일을 이 꼴로 만들었소.”
“잠시만요. 저도 큰새언니와 조카에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묘씨는 그리 말하며 전 마마를 쳐다봤다. 그러자 전 마마는 얼른 침실로 가더니 뭔가를 들고 걸어와 묘씨에게 건넸다. 꼬깃꼬깃 접힌 하얀 서찰이었다.
묘씨는 서찰을 집어 들며 말했다.
“저한텐 딸 하나뿐이니 이 아이를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공연장으로 가 보았죠. 발길을 돌리려는데 누군가가 저와 부딪치더니 이 서찰을 제 손에 쥐여 줬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멍한 표정을 짓더니 그 서찰을 넘겨다보았다. 종이 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묘기화가 밖에 있는 좋은 집에 미인을 숨겨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용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손씨와 엽이채만은 이내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엽영교는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려는 이런 게 있다는 사실을 전연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묘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황씨는 이내 역정을 냈다.
“어떤 죽일 놈이 저희 둘째 도련님을 모함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겁니까?”
묘기전도 버럭 호통을 쳤다.
“영교야, 설마 겨우 이것 때문에 우리 기화의 뒷조사를 했다는 말이냐?”
낯빛이 새파랗게 질린 팽씨가 ‘픽’ 하고 비웃더니 묘씨를 닦아세웠다.
“이 서찰을 건넨 사람이 누굽니까? 출처도 알 수 없는 이런 서찰 한 장 때문에 시비도 가리지 않고 이 많은 일을 벌였다는 겁니까?”
“전 딸이 하나뿐이니 조심하고 또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결코 근거 없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묘씨는 그리 말하며 손에 든 서찰을 항탁 위에 휙 내던졌다.
“게다가 조사하지 않아도 이 서찰을 누가 썼는지 명백했습니다. 보세요. 어디서 많이 본 필체 같지 않습니까?”
묘씨는 그리 말하며 묘기화를 쳐다봤다. 그러자 묘기화의 잘생긴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묘씨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묘기화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야말로 알고 싶구나. 우리 영교가 그리 마음에 안 들더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 서찰은 바로 묘기화 본인이 쓴 것이며 사람을 구해 묘씨의 손에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아이고, 이 썩을 놈아!”
팽씨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묘기화에게 삿대질을 하며 야단쳤다.
“밤낮으로 못된 짓거리만 하고 다니는구나. 말썽부리지 말고 좀 조용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냐?”
묘씨는 전에 엽영교가 그를 위해 혼례식을 미뤄 달라고 간청했던 일이 떠올라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네가 정말로 밖에 딴사람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아야겠다. 그래서 줄곧 혼례식 날짜를 미루며 혼인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냐?”
“그럴 리가요!”
팽씨는 대번에 부정한 다음, 노기 띤 소리로 묘기화를 추궁했다.
“또 무슨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게냐?”
엽영교는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고, 엽연채는 냉담한 얼굴로 묘기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묘기화의 준수한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웅얼거렸다.
“전 혼인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변경 지역으로 가고 싶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 영교에게 혼사를 미뤄 달라고 했는데 영교가 거절했어요.
됐습니다. 애초에 제가 잘못한 겁니다. 며칠 전에 길에서 우연히 영교를 만나 전통극을 보러 공연장에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영교와 말다툼을 했고 전 화가 나서 가 버렸죠…….”
“이건 기화 네가 잘못한 거다. 말다툼 좀 했다고 화가 나서 가 버리다니.”
엽승강이 미간을 찌푸리며 훈계했다. 그는 속으로 묘기화의 좁은 도량에 혀를 쯧쯧 찼다.
“겨우 그런 일 때문에 이런 것이냐?”
묘씨가 성난 목소리로 추궁하자 묘기화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데 이러는 건 아니다 싶어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귀빈실에 있던 영교가 저도 큰형님처럼 밖에서 따로 여인을 두고 있는 것 같다지 뭡니까. 그런 거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까지 듣고 말았습니다.
마침 저도 혼인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튿날 길에서 고모님을 뵀던 겁니다. 그래서 그 김에 아예 고모님께 서찰을 건넸던 거죠. 그럼 고모님이 이 혼사를 무르실 테니까요.”
그러자 손씨가 쯧쯧 혀를 찼다.
“이건 영교 아가씨께서 잘못한 거네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가 있어요?”
온씨는 참지 못하고 손씨를 힐난했다.
“아니, 동서는 어쩜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영교 아가씨는 그저 홧김에 몇 마디 했을 뿐이야. 기화가 이리 행동하는 게 너무한 거지.”
“됐다. 너희 둘 뭘 그리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게냐! 그저 어린 것들이 말다툼 좀 한 것뿐이다.”
엽학문이 얼른 두 사람을 조용히 시키더니 엽영교를 쏘아보며 질책했다.
“이게 다 영교 네가 소란을 피워서 그런 거다.”
엽영교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너무도 억울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반박했다.
“지금 절 탓하시는 거예요? 누가 오라버니보고 계속 혼례식을 미루라고 했나요? 또 누가 극장에서 애정 어린 눈빛으로 무대 위의 화단을 뚫어지게 쳐다보라고 했나요? 아주 그곳에 둥지를 틀었던데 제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묘씨 가문 사람들은 조용히 있었다. 보아하니 그들도 속으로 찔린 게 틀림없었다.
잠시 후, 황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영교야, 우리 둘째 도련님이 사화詞話와 작곡으로 집안을 일으키셨잖니. 그러니 연극 감상을 즐기실 수밖에 없단다. 안 그러면 어디서 영감을 얻을 수 있겠니. 이 부분에 있어선 너무 깐깐하게 따지고 들지 말자꾸나. 네가 좀 너그럽게 봐주렴!”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도 억울해하는 엽영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묘씨는 말을 잇지 못하는 딸의 모습을 보더니 입을 씰쭉거리며 묘기화를 쳐다봤다.
“제가 보기에 기화는 우리 영교보다 작곡에 더욱 마음을 쏟는 것 같네요.”
“고모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황씨가 당장에 반박했다.
“저희 눈에는 금 연주와 작곡이 유희라지만 둘째 도련님께는 일입니다.”
“그래, 사내대장부에게 일이 우선이지.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말이오? 아녀자의 좁은 소견으로 어찌 알겠어!”
엽학문은 황씨의 말에 동조하며 심히 언짢은 얼굴로 묘씨를 흘겨봤다.
“고모님께서 이 혼사를 원치 않으신다면 이쯤에서 그만두시죠.”
황씨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좀 거만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저희 둘째 용모와 재능이면 좋다고 매달릴 사람들이 밖에 줄을 섰을 겁니다.”
그 말에 묘씨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이 조카가 커 오는 과정을 지켜봤는데, 재능과 성격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훌륭했고, 딸의 시어머니가 될 팽씨도 시원시원하고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묘씨는 배알이 뒤틀려 묘기화를 쳐다보며 이리 말했다.
“기화가 이리 온갖 궁리를 다 하고 있으니 이 아이 뜻대로 해 주죠. 기화야, 변경 지역에 갔다 오너라. 혼례식은 내년으로 미루자꾸나!”
엽학문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결사반대했다.
“혼례식 날짜는 이미 정해져 있소. 지금 이렇게 이야기도 확실하게 나눴으니 마음 놓고 혼례식 준비나 하시오! 연기는 무슨!”
“안 됩니다!”
묘씨 역시 죽어도 타협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녀는 팽씨를 쳐다보며 추궁했다.
“새언니가 말씀 좀 해 보시죠? 애초에 기화가 혼례식 날짜를 미루겠다고 해서 이런 사달이 난 거 아닙니까? 지금 저 아이 뜻을 안 따라 줬다가 나중에 우리 영교를 원망하면 어찌합니까? 아님 조카에게 다른 좋은 배필을 구하라고 하시든가요!”
팽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묘씨의 단호한 태도를 보더니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가 딸을 아끼는 마음 못지않게 저희도 조카딸을 아낍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시죠!”
엽학문은 성질이 뻗쳐 낯빛이 어두워지고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혼례식 날짜를 미루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쪽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었다.
‘최근 집안에 소란이 일어나 이미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상황인데 혼례식 날짜마저 미뤄지다니. 정말이지 이놈의 집구석은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구나!’
“둘째야, 어서 영교에게 사과하거라.”
이때 묘기전이 냉랭한 목소리로 일렀다. 묘기화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엽영교 앞으로 걸어가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혔다.
“미안하다, 영교야. 내가 잘못했다.”
그 말에 엽영교는 억울해 더욱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묘기화가 길쭉한 몸을 자기 앞에서 굽히고 새까만 머리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그녀는 생각했다. 생각했다.
‘늘 냉담하고 거만하게 행동해 온 사람이 어디 이렇게 다른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여 봤겠어.’
그녀는 차마 계속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입을 삐죽거리더니 짧게 대꾸했다.
“됐어요.”
그러고선 눈물을 닦으며 뛰쳐나갔다.
“영교야…….”
묘씨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사내대장부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다른 집안 사내들도 다 그렇지 않나요?”
이때 황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교 소저는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아 이런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겠죠.”
엽학문은 일이 이미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그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의 전체적인 국면을 고려하지 않는 묘씨와 엽영교 때문에 언짢아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황씨의 말에 동조했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그러자 손씨가 ‘킥’ 냉소를 흘리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영교 아가씨가 연채와 어울리기를 가장 좋아하시잖아요. 얼마 전에 공연장에도 연채와 함께 갔던 거죠? 생각할 것도 없네요. 분명 또 연채가 아가씨를 꼬드겨 이 소란을 피운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