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명진대사께서는 대제에서 유명한 고승高僧이시잖아요. 평소에는 사찰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수행하시다가 일 년에 딱 한 번 출타하시는데, 그때마다 궁에 들어가 태후 마마께 불경을 읽어 드리신다고 해요.
복을 불러오는 이 부적도 주지 스님이 직접 쓰신 건데, 백 장밖에 없어서 황실 일가에만 드렸대요. 저희 만만 아가씨께서는 황후 마마의 예비 며느리이니 황후 마마께서 특별히 선물로 하나 주신 거죠.”
곁에서 엽이채가 거만한 표정으로 설명하자 장만만은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엽이채가 저를 황후 마마의 예비 며느리라고 칭한 게 조금 법도에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긴 했다. 어쨌든 자신은 그래 봤자 측비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러나 측비도 품계로는 정2품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반면 추길과 혜연은 그 모습을 보며 아주 꼴값을 떤다고 내심 혀를 찼다. 추길과 혜연이 전에 장만만에게 가졌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장만만과 엽이채는 이제 올케와 시누이 사이이니 장만만은 엽이채를 도울 것이었다. 서로 입장이 다르니 추길과 혜연이 장만만에게 갖고 있던 호감 또한 조금은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추길과 혜연은 장만만이 별 탈 없이 태자에게 시집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엽이채가 장만만의 혼사를 들먹이며 또다시 우쭐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역겨워서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채야, 우리가 한집안 사람이기는 하지만 황후 마마의 며느리라고 부르는 건… 좀 아니잖니! 위로 태자비 마마도 계시잖아.”
엽연채의 말에 무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만만의 얼굴이 확 굳었다. 표정에서 불쾌함과 수치심과 분노, 억울함이 노골적으로 전해졌다.
“어쨌든… 황송하게도 황후 마마가 날 예쁘게 봐 주셔서 이걸 내게 주신 거야.”
장만만은 체면을 세우기 위해 얼른 황후가 자신을 예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고는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너에게 이걸 주고 싶어. 재액과 온갖 질병을 막아 준다고 하니 너에게 선물할게.”
방금 전 엽연채가 뱉은 말에 기분이 상하고 짜증이 났지만, 장박원이 엽연채에게 잘못한 일을 생각하니 역시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이 부적을 엽연채에게 선물로 주려는 것이었다.
“연채야, 어서 여기에 이름과 팔자를 적어. 내가 궁으로 가지고 들어가면 대사께서 불경을 외우고 첫 불공 의식을 드릴 거야. 그런 다음에 내가 다시 너에게 전해 줄게.”
“그래요. 우리 만만 아가씨께서 큰언니를 이렇게 걱정한다니까요.”
엽이채가 장만만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면서 마치 은혜를 베푸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높은 곳에 서서 남을 내려다보는 우월감 같은 걸 느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반면 엽연채의 시선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에 가려진 눈동자에는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장만만은 태자 측비로 간택되지 못한다. 이쪽에서 귀띔을 해 주려 해도 듣지 않으려 하니 자신도 더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복을 가져다준다는 이 부적을 더더욱 받을 수 없었다.
이 부적은 복을 상징하는 물건이며 본래 장만만의 것이니, 자신이 받게 되면 이후에 문제가 복잡해질 터였다. 황후가 장만만이 간택에서 떨어진 탓을 엽이채에게 돌린다 하더라도 그때 가서 장만만은 분명 이 부적을 떠올릴 것이었다.
그럼 이 부적이 가져다줄 복을 이쪽에서 빼앗아 간 모양이라며 자신을 원망할 게 분명했다. 심하면 장씨 가문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탓하며 원망할 수도 있다.
‘이 부적은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
생각을 정리한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만 언니, 언니의 호의는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전 이미 서운사에서 써 준 부적을 갖고 있거든요. 그러니 이건 사양할게요. 부적을 두 개나 갖고 있으면 서로의 기운을 잡아먹지 않겠어요?”
“연채 너… 지금 내 호의를 거절하는 거니?”
장만만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나도 알아, 네가 우리 가문을 원망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되어 버렸잖아.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야.”
그 말에 엽이채의 낯빛이 어두워졌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또 이 이야기를 꺼내다니, 지금 나를 탓하고 있는 건가? 제 발 저린 엽이채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참견했다.
“누가 아니래요. 이건 만만 아가씨의 호의예요. 언니가 받지 않으면 아가씨가 얼마나 미안해하겠어요. 언니 때문에 아가씨께서 제대로 먹고 자지도 못하는데, 언니는 모르죠? 어떻게 아가씨의 성의를 이렇게 짓밟을 수가 있어요.”
장만만은 진씨의 굳은 표정을 떠올리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네가 힘들게 지내고 있다는 거 나도 알아…….”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
“전 잘 지내고 있어요.”
“혼인하고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아직…….”
그 말을 하더니 장만만의 시선이 엽연채의 배로 향했다.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잖아. 그래서 이 부적을 너에게 주려는 거야. 난 네가 잘 지내길 바라.”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엽이채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그녀를 비웃더니 봉긋 솟은 자기 배를 어루만졌다.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이렇게 운이 좋은 건 아니었다.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는 데다가 아이도 이렇게 빨리 들어서다니.
그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엽연채는 싸늘한 눈빛으로 엽이채를 흘겨보더니 장만만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아까보다 더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이 복을 가져다주는 부적은 언니가 가져야 할 복이에요. 황후 마마께서 언니에게 하사하신 건데 저한테 주면 되겠어요?”
장만만은 순간 멍해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부적을 꽉 쥐었다.
“지금 언니가 가져야 할 복을 저에게 주겠다는 거예요?”
엽연채가 진중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어? 내 복을…….”
장만만은 깜짝 놀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엽연채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장만만은 망설였다.
“난…….”
그녀는 본래 자신은 귀인의 사람이 될 테니 이미 복은 충분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의 말을 듣고 나니 속으로 좀 걱정이 됐다. 뒤에 있던 여종도 그녀의 옷을 잡아당겼다. 선물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엽연채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만만 언니, 언니의 마음을 안 것만으로 충분해요. 우리 사이에 이럴 필요 없어요.”
“하지만…….”
장만만도 이젠 선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자신이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으려니 체면이 서지 않았다.
엽연채가 눈치껏 상황을 정리했다.
“언니야 저에게 복을 나눠 주는 것을 개의치 않겠죠. 하지만 황후 마마께서 언니에게 하사하신 거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면 마마께서 언니가 마마를 업신여긴다고 오해하실 수도 있어요.”
엽연채가 이렇게 멍석을 깔아주자 장만만은 그제야 멋쩍어하며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네 말이 맞다. 어쨌든 마마께서 하사하신 거니까……. 내가 순간 정신이 어떻게 됐나 봐. 마마께서 주신 것을 선물할 생각을 했다니.”
그러나 엽이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엽연채가 장만만이 ‘하사한’ 물건을 받지 않으면 그녀가 그럭저럭 잘 사는 것처럼 보였다. 원하던 대로 한껏 우월감을 느낄 수가 없게 된 셈이었다.
“아가씨, 외출한 지 꽤 지났으니 이제 돌아가 봐야 해요.”
기분이 영 찝찝해진 엽이채가 말했다.
“그래요.”
장만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복을 가져다주는 그 부적을 도로 두루주머니 안에 넣어 몸에 딱 붙였다. 이건 자신에게 들어온 복인데 하마터면 남에게 선물할 뻔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기 낯부끄러웠던 장만만은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엽연채도 일어서더니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추길아, 장 대부인과 장 소저를 배웅해 드리거라.”
“두 분, 이쪽입니다.”
추길이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엽이채는 또 배를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회임한 지 얼마 안 돼 배가 많이 부른 것도 아닌데 거동이 대단히 힘든 양 끝까지 연기하는 그녀였다.
“큰언니, 만만 아가씨께서 태자 전하께 시집을 가면 언니도 자주 보러 와요!”
엽이채의 이 말에 장만만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오늘 태자부에 들렸다가 이제 막 돌아온 참인데, 뭘 얼마나 자주 방문해야 한다고.
혜연은 두 사람을 수화문까지 바래다준 후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혜연이 돌아가자 장만만은 엽이채를 쏘아보더니, 그녀는 신경 쓰지도 않고 혼자서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작은 걸상을 밟고 마차 위에 올랐다. 엽이채는 그 모습을 보며 분통이 터져 주먹을 꽉 쥐었다. 엽연채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부적을 선물하라고 부추긴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장만만은 장박원이 혼례식을 피해 도망쳤던 일로 엽연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그녀에게 보상해 줄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엽이채는 심기가 영 불편했는데, 마침 장만만이 황후에게서 부적을 얻었던 것이다.
엽연채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하는 엽이채는 엽연채가 분명 그 부적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엽연채에게 부적을 선물하라고 장만만을 부추긴 것이다. 엽연채가 부적을 사양하면 장만만의 성의를 짓밟았다고 몰아갈 셈이었다.
지난번 할머니 묘씨의 생일 연회 때, 장만만의 태자 측비 간택에 관해 엽연채가 ‘세상사에는 늘 변수가 있는 법.’이라고 말해 장만만의 마음속에 응어리가 생긴 참이었다. 이 상황에서 엽연채가 부적까지 거절하면 장만만은 더 이상 엽연채에게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장만만을 데리고 부적을 선물하러 가면 엽연채 앞에서 떵떵거리며 과시할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그런데 엽연채는 부적을 거절하면서 뜻밖에도 장만만이 꺼림칙해할 만한 이유를 댔고 그 바람에 이쪽이 대단히 큰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큰마님, 마차에 오르시죠!”
류아가 엽이채를 쳐다보며 쭈뼛쭈뼛 권했다.
“그래.”
엽이채는 입술을 깨물더니 류아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정국백부 측문을 나선 마차가 장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수화문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여종은 마차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그쪽으로 걸어갔다.
“넷째 아가씨, 오셨습니까? 아, 큰마님과 함께 외출하셨었군요! 주인마님 거처에 밥상을 차려 두었습니다.”
장만만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쪽으로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