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그 말에 혜연과 추길은 재난 속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혜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데… 아가씨 수중에는 돈이 없었잖아요!”
“있었어. 태자비 마마께서 하사하신 삼백 냥짜리 은태환 지폐를 그 인신매매범에게 주었거든.”
두 여종은 ‘아!’ 하고 탄식하며 엽연채의 말을 믿었다.
“이 일은…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된다! 죽어도 말해서는 안 돼.”
엽연채가 진지한 얼굴로 입단속하자 추길과 혜연은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장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길은 입술마저 깨물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그 인신매매범들은 감옥에 잡혀 들어간 죽일 놈들인데 아가씨가 그들의 도주를 도왔으니 이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면 관아로부터 추궁을 당할 게 분명했다. 자칫하면 아가씨마저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인신매매범들이 이렇게 달아나 버리면… 또다시 사람을 해칠지도 모르잖아요.”
혜연이 옅은 한숨을 쉬며 염려하자 엽연채가 얼른 무마했다.
“아냐, 꼭 잡힐 거야. 내가 부윤 대인께 슬며시 서신을 보내려고……. 음, 그러니 반드시 잡힐 거야.”
그 말에 혜연이 깜짝 놀라며 얼른 손을 가로저었다.
“저희… 그냥 이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언젠가는 잡히겠죠. 저희는 스스로나 보호하면 돼요.”
엽연채의 눈언저리에 웃음기가 깃들었다. 그녀는 여종들이 자신의 안위에 가장 신경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다 진짜로 인신매매범의 도주를 도운 것도 아니니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그럼 관여하지 말자꾸나.”
그렇게 셋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녹엽이 궁명헌 문을 넘어서더니 방 앞으로 걸어와 말을 전했다.
“셋째 마님, 장씨 가문 대부인과 소저가 오셨습니다.”
“장씨 가문 대부인?”
엽연채가 어리둥절한 투로 물었다.
‘장 대부인이라면 엽이채 아닌가?’
추길과 혜연은 서로를 쳐다봤다.
‘임신했다더니, 여기 와서 또 뭔 짓을 하려고?’
“어디 계시냐?”
엽연채가 물었다.
“일상원에 계십니다. 셋째 마님, 어서 가 보셔요. 주인마님 심기가 상당히 언짢아 보이셨어요.”
녹엽이 재촉하자 엽연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추길과 함께 일상원으로 향했다.
* * *
진씨는 일상원 서차간에 놓인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엽이채는 남산만 한 배를 쑥 내밀고 권의에 앉아 있었으며, 장만만은 어색한 얼굴로 엽이채 옆에 앉아 있었다.
상석의 진씨는 두 사람을 쳐다보더니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 나서야 마음속 분노와 울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진씨는 엽이채가 가장 원망스러웠다. 그녀가 장박원을 꼬셔 달아나지 않았다면 셋째가 어떻게 엽연채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장씨 가문은 지금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감히 밉보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기에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한편, 엽이채는 배를 어루만지며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귀한 장씨 가문의 적자에게 시집간 부인이고 그곳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잘 지내고 있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은 몰락한 주씨 가문에 와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마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녹엽이 발을 걷어 올리며 아뢰었다.
이어 엽연채가 몸에서 열기를 내뿜으며 걸어 들어오더니 진씨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머님, 부르셨습니까?”
진씨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네 여동생이 왔단다. 흠, 그럼 네가 잘 대접해 주거라!”
“예.”
엽연채가 대꾸하자마자 진씨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엽이채는 진씨가 허둥대며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아무리 몰락했기로서니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하는 경우도 있나.’
엽연채는 입을 실룩대는 엽이채를 쳐다보며 자신도 입을 비죽거렸다. 과거의 엽이채였다면 이렇게 대놓고 사람을 멸시하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내성적이었다. 설령 지금 같은 감정을 느끼더라도 가냘픈 자태로 입을 살짝 가린 채 남몰래 멸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의기양양한 모습이 갈수록 손씨를 똑 닮아 가니, 과연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다.
“무슨 일로 왔니?”
엽연채가 그들 맞은편에 놓인 권의에 앉으며 물었다.
“동생이 언니를 보러 오면 안 되나요?”
엽이채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장만만도 미간을 살짝 구겼으나 그래도 침착하게 찾아온 연유를 설명했다.
“연채야, 우리가 널 찾아온 건… 너에게 줄 게 있어서야.”
“아, 그렇군요.”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장만만에게는 아직 호감이 남아 있었다.
“만만 언니, 저에게 뭘 준다는 거예요?”
“언니, 언니 방에 가서 이야기하면 안 돼요?”
엽이채가 홱 끼어들었다.
“여긴 부인의 방이라 좀… 불편해요…….”
그러더니 진씨의 엄한 표정에 놀라기라도 한 양 무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어 동정 어린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보았는데, ‘저런 무서운 시어머니를 모시게 됐으니 정말 안됐다.’ 하는 눈빛이었다.
엽연채는 그 눈길에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호랑이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된통 당하는 바람에 입도 뻥끗 못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니 방에 가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엽이채가 다시 졸랐다. 엽연채는 그녀에게 빙빙 돌려 말하는 것도 귀찮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방으로 가자꾸나.”
엽연채와 장만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방을 나섰고 엽이채는 류아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엽연채와 장만만은 이미 일상원 문 입구에 다다랐는데, 엽이채는 이제 겨우 계단을 내려와 멀리 서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큰언니, 아가씨. 좀 기다려 주세요……!”
추길은 엽이채에게 다가가 발로 한 대 걷어차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서 개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저 정도 개월 수는 물론이고 심지어 칠팔 개월 된 임산부들도 거동이 저리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엽이채는 무슨 자기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자기만 아이를 가진 몸이라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요란을 떨고 있었다.
“추길아, 네가 가서 이채를 데리고 내 거처로 오너라. 난 만만 아가씨랑 먼저 가 볼 테니.”
이렇게 이른 뒤 엽연채는 장만만과 문밖을 나섰고 엽이채는 그 모습을 보더니 낯빛이 어두워졌다.
추길이 엽이채 곁으로 다가가 톡 쏘았다.
“부인, 무슨 병이라도 걸리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 개월 수에 얼마나 잘 걸어 다니는데 왜 부인만 걷는 게 이리 힘드실까요? 무슨 병이라도 걸리신 건 아니겠죠?”
엽이채는 화가 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게 무슨 망발이냐! 난 멀쩡하다. 무슨 병이 걸렸다는 게야!”
“그럼 다른 사람들은 잘만 걸어 다니는데 왜 부인만 거북이 뺨치게 이리 느리게 걸으시는 거예요?”
그 말에 엽이채는 말문이 막혀 버렸고 추길이 밉살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너무 과하게 연기한 것을 내심 후회했다. 엽연채가 가 버렸으니 아이를 가진 귀한 몸이라 조심히 행동하는 모습을 볼 사람도 없게 된 판이었다.
“우리 큰마님께서는 회임한 귀한 몸이니 당연히 조심조심 걸으셔야지.”
류아가 굳은 표정으로 나섰다.
“아, 그럼 천천히 걸으시라고 해. 내가 곁에서 도와드릴게.”
추길은 히죽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그럼 어디 한번 계속 이 속도로 천천히 움직여 봐라!’
엽이채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벌써 힘들어 죽겠는데 계속 느림보처럼 움직이려면 얼마나 더 힘이 들겠는가.
“여기는 연교軟轎도 없니?”
류아의 말에 추길이 눈을 부라리며 딱 잘라 말했다.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주씨 가문은 몰락한 가문이라 가난하지 않습니까! 그리 귀한 게 있을 리가 없죠!”
이때 장만만이 걸어오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새언니, 왜 이렇게 느리게 오는 거예요?”
그 말에 엽이채의 표정이 굳어졌다.
“방금 전에… 다리에 쥐가 났거든요. 그래서 걸음이 느렸던 거예요. 이제 괜찮아졌어요.”
“괜찮아졌으면 어서 가요!”
장만만이 얼른 그녀를 끌어당기며 재촉했다. 장만만은 엽이채가 또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엽이채는 자신의 새언니이며, 이젠 아이까지 가진 몸이었다. 멀리서 추길이 그녀를 조롱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만 참지 못하고 이렇게 돌아와 자기 집안사람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장만만이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자 엽이채도 더 이상 아이 때문에 힘든 척하지 않고 얼른 엽연채의 뒤를 쫓아갔다.
엽이채와 장만만은 서과원을 향해 갈수록 주변이 점점 살풍경으로 변해 가는 걸 느꼈다. 정자도 있기는 했으나 이미 황폐해져 꼴이 말이 아니었고 길게 자란 풀숲 사이로 깊숙이 가려져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스산한 분위기만 감돌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자 장만만의 눈에는 미안한 기색이 더욱 짙어지는 반면, 엽이채와 류아는 고소해하는 눈빛을 띠었다.
엽연채 일행은 마침내 궁명헌에 도착했다. 장만만과 엽이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크고 널찍한 뜰이 눈에 들어왔다. 정면에는 수화문 두 개가 세워져 있었고 본채 네 칸과 구불구불 이어진 회랑이 보였다. 장씨 가문 본채와 중앙에 위치한 뜰보다도 더 널찍했다. 다만 좀 낡고 허름해 보일 따름이었다.
엽이채는 이 모습을 보며 예상보다는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전히 주씨 가문을 깔보며 좋은 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고 속으로 비웃었지만 말이다.
혜연은 엽이채가 배를 쑥 내밀고 걸어오며 뽐내는 꼴을 보더니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앞으로 다가서며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장 대부인, 장 소저, 이쪽으로 오세요.”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 소청의 원탁에 자리했다. 혜연이 이내 차를 내오며 탁자 위에 말린 과일과 간식거리를 차려 놓았다.
“저에게 줄 것이 있어서 찾아온 거라고요?”
엽연채가 먼저 방금 전 일상원에서 했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게 말이지.”
장만만이 소매에서 흰나비와 꽃문양이 들어간 비단 두루주머니 꺼냈다. 그러곤 두루주머니에 달린 비단 끈을 잡아당겨 벌린 후 안에서 노란색 부적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법화사 주지 스님이신 명진대사明眞大師께서 주신 복을 불러오는 부적이야. 연채 야, 네 사주팔자를 여기다 직접 적어 주렴. 내가 내일 이걸 들고 궁으로 들어가 명진대사님께 불경을 읽어 달라고 부탁드릴 거야. 첫 불공 의식을 드린 다음 이 부적을 들고 다시 돌아올게. 이걸 몸에 차고 다니면 재액과 온갖 질병을 물리칠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