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포기와 온남아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목을 쭉 내밀고 밖을 쳐다봤다. 그러자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잘생긴 공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단출한 연청색 도포를 입은 그는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화려하고 수려한 용모를 뽐내고 있었고 맑고 깨끗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포기와 온남아는 주운환을 쳐다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이 바로 엽연채의 서자 남편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생겼을 수가 있지? 이렇게 생겼는데 왜 저번에 데려오지 않았던 거지?’
포기의 낯빛은 어둡게 변했으나 그에게 가 있는 시선을 거두기는 못내 아쉬웠다. 반면 온남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괜찮네. 이런 얼굴이면 적어도 체면은 서겠구나!’라고 만족스러워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인사를 올린 후 묘씨에게 생신을 축하드린다는 말을 건넸고 묘씨는 얼른 그들을 일으켰다. 온남아는 엽연채를 끌어당기며 그녀에게 물었다.
“연채야, 지난번 엽이채 혼례식 때 왜 네 부군을 데려오지 않은 거야?”
“음……. 제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요? 일이 생겨 바빠서 못 왔어요.”
엽연채의 대꾸에 온남아는 ‘아!’ 하더니 포기를 쳐다보며 말했다.
“맞다, 저번에는 바빠서 못 온 거라고 이야기했었네.”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손씨는 설핏 웃음을 짓더니 멸시하는 눈빛으로 진씨 모녀를 쓱 쳐다봤다.
“주 부인, 주 소저. 어서 앉으세요!”
묘씨가 얼른 주씨 가문 사람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고 나서 엽연채에게 말했다.
“연채야, 네 어머니께서 고뿔에 걸렸으니 가서 어머니를 뵙고 오거라.”
“예.”
엽연채가 일어나자 진씨도 미소를 지으며 따라나섰다.
“안사돈이 고뿔에 걸리셨습니까? 그럼 저희도 만나 뵈러 가 봐야겠네요!”
그녀는 자신들을 멸시하는 듯한 손씨의 눈빛이 몹시 못마땅했다. 게다가 장씨 가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진씨는 엽이채와 장씨 가문 사람들과는 더더욱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고모께서 아프시다고요?”
온남아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자기 모친을 끌어당겼다.
“어머니, 저희도 고모를 뵈러 가요.”
진씨가 그녀의 손을 치며 고개를 돌려 말을 꺼내려는 찰나 묘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 가 보거라.”
그러자 포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저 가 보세요. 다들 뵙고 나오시면 저도 가 볼게요. 모두 한 번에 몰려가면 붐비고 어수선할 거예요.”
그리하여 엽연채와 주씨 가문 사람들, 온남아 모녀만 밖으로 나와 영귀원을 향해 걸어갔다. 가는 길에 주묘서와 주묘화의 눈에 꽃이 만발한 화원, 정자와 고루高樓가 계속해서 들어왔다. 보이는 곳마다 모두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물론 이런 건축물은 주씨 가문에도 있지만 몹시 낡고 허름한 것들이라 이곳처럼 멋들어지지 않았다.
물가를 따라 꽃과 버드나무가 자라나 있었고 두 개의 정자를 지나가다 보니 널찍한 정원이 보였다. 바로 온씨가 지내는 영귀원이었다.
“어머님, 아가씨들. 이쪽입니다.”
엽연채가 손짓을 하며 진씨 모녀를 안으로 들였고 온남아 모녀는 자주 들러 익숙한 곳이라 알아서 문안으로 들어섰다. 정원에 있던 여종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얼른 방 안에 아뢰었고 이내 채 마마가 밖으로 나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러고 나서 주렴을 걷어 올렸다.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오자 방 안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침상에 기대어 앉아 있던 온씨는 그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엽연채가 그녀에게 다가가 침상에 다시 몸을 기대게 하며 물었다.
“요 이틀 동안 몸은 좀 괜찮아지셨어요?”
“많이 좋아졌어. 이제 거동에 지장이 없단다. 며칠 푹 쉬면 씻은 듯이 나을 게다.”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런 후에 고개를 들어 청수하고 더없이 빼어난 용모를 뽐내는 주운환을 보더니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어머니는 보면 볼수록 사위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고모,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어쩌다가 고뿔에 걸리신 거예요.”
온남아의 말이 대화의 물꼬를 트면서 사람들은 서로 안부를 물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각쯤 머무르다 온씨가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니 다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귀원 문밖으로 나오자 진씨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주로 어디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니? 우린 그쪽으로 가 봐야겠구나.”
“물가에 지어진 계향桂香 정자로 가시면 되어요.”
엽연채가 말했다.
“저는 돌아가서 할머니 곁에 잠시 있어 드리려고요. 그럼 어머님과 아가씨들 먼저 그쪽으로 가 보세요!”
할머니 생신인데 손녀가 곁에 자리하지 않았으니, 다시 가서 잠시 곁에 있어 드려야 효를 행하는 것이었다.
떠나기 전, 엽연채는 추길에게 분부를 내렸다.
“추길아, 어머님과 아가씨들을 모시고 함께 가거라.”
“그럴 필요 없다. 나도 그쪽으로 갈 거거든.”
온 부인이 말했다. 그리하여 주씨 가문 여인들은 온 부인과 함께 자리를 떴고 엽연채는 주운환을 쳐다보며 물었다.
“밖으로 가실 건가요?”
“네.”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녕당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손님들이었다. 자신이 손녀사위이기는 해도 그곳에 자리하는 건 적절치 않았기에 사내들이 있는 밖으로 가야 마땅했다.
엽연채와 온남아가 안녕당으로 돌아오니 방 안으로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서차간에서 손씨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엽연채와 온남아는 입을 삐죽거렸다. 생각할 것도 없이 엽이채와 장씨 가문 사람들이 온 게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서차간으로 돌아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과연 손씨, 엽이채, 장박원 그리고 장만만이 묘씨에게 생신 축하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할머님, 동해東海처럼 한없는 복을 누리시고 남산南山처럼 만수무강하십시오.”
“그래, 그래. 어서 일어나거라!”
묘씨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박원이 엽이채를 부축해 왼쪽 권의로 데려가 그녀를 앉혔고 맹씨와 장만만도 한쪽에 자리했다. 그러자 포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 공자님이 이채에게 정말 잘해 주시네요. 유리 인형처럼 소중히 대하는 것 좀 보세요. 이채가 시집을 가더니 더 응석을 부리네요.”
포기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무슨 응석을 부렸다고 그래…….”
엽이채는 행복한 미소를 짓더니 조금 부끄러운 듯한 기색을 보였다.
“아이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됐으니 조심하는 거죠.”
손씨가 끼어들어 신바람이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고개를 홱 돌려보니 엽연채가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연채가 돌아왔네요. 어서 앉거라!”
엽연채는 살짝 웃으며 온남아와 함께 걸어 들어오더니, 둘째 고모 곁에 놓인 수돈에 앉았다.
“연채야, 네 부군은 왜 안 왔니?”
손씨의 이 말은 의도가 뻔했다. 손님으로 온 사내들이 보통 축하 인사를 드린 뒤 밖으로 나가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공자들과 함께 밖에 있어요! 여긴 여인들뿐이잖아요.”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 말에 엽이채의 눈빛에 순간 비웃는 듯한 기색이 비치더니 그녀는 장박원에게로 몸을 돌렸다.
“부군, 부군께서도 어서 나가 보세요!”
“당신과 여기에 있겠소.”
장박원이 다정한 말투로 대꾸하는 모습을 본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쳇, 지금 부부 금실을 자랑하는 거니!’
그런데 이때 엽이채가 갑자기 기침을 했다.
“에취!”
“고뿔에 걸린 게냐?”
맹씨가 고개를 돌리더니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아닙니다. 그냥 코가 좀 간지러워서 그런 거예요.”
엽이채가 미소 띤 얼굴로 맹씨를 돌아보며 말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어머님.”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엽영교의 큰언니가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이채가 시집을 가더니 아주 보물처럼 귀하게 대접받고 있군요. 다들 이채를 애지중지하시니, 진작에 시집간 이 고모가 부러움을 느낄 정도예요.”
묘씨와 엽영교의 둘째 언니 등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포기가 엽연채를 힐끗 쳐다보았는데 그녀 곁에는 온남아 하나뿐이라 외로워 보였다. 그에 반해 엽이채는 왼쪽에 장박원이, 오른쪽에는 맹씨와 장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들 장씨 가문의 고부 관계가 좋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 밖으로 맹씨는 며느리를 살뜰히 챙겼다. 엽이채의 혼사가 비웃음거리로 전락했기에 사람들은 그녀가 시댁에서 순탄치 않은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순탄치 않기는커녕 모두에게 금덩이가 따로 없는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잘 지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람은 본래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법이다. 남의 비웃음 좀 사면 뭐 어떠한가? 권세가 있고 잘살면 결국 사람들은 떠받들어 주게 되어 있는 법이었다.
온남아는 엽이채를 받들어 주는 사람들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저도 모르게 차가운 눈빛으로 맹씨를 흘겨봤다. 맹씨는 전에 고모와 아주 가깝게 지냈으면서 지금 엽이채 이 뻔뻔한 계집애에게 이리도 잘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엽연채는 맹씨를 이해했다. 맹씨는 겉으로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 주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 어찌 됐거나 엽이채는 이미 혼례식도 정식으로 올린 적자嫡子의 아내였다. 아무리 그녀가 원망스러워도 아들인 장박원과 사이가 멀어지지 않으려면, 또 딸 장만만이 아무 탈 없이 태자에게 시집을 가려면 참아야만 했다.
아마 맹씨는 집안에 어떠한 소란도 더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일념에 불타고 있을 것이었다. 체면을 위해서라도 밖에서는 엽이채를 감싸줘야만 했다.
더군다나 엽이채는 회임을 했다. 맹씨가 장박원의 아들을 품에 안게 되면, 엽이채 배 속의 아이가 그녀의 손자라면 이보다 더한 불만도 사그라질 것이다. 다만…….
그렇게 생각을 하던 엽연채의 눈길이 장만만에게로 향했다. 장만만은 자신을 쳐다보는 엽연채를 보고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전에 장만만과 엽연채는 돈독한 사이였다. 엽연채와 장박원이 혼약을 맺기 전에도 장만만은 그녀와 자주 교류했었다. 이후 장씨 가문과 엽씨 가문이 혼사를 맺자 장만만은 당연히 엽연채를 더욱 살갑게 대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장만만은 엽연채를 볼 낯이 없었다.
“장 소저께서도 이제 열여섯이죠. 어떤 가문과 혼약을 맺었어요?”
엽영교의 둘째 언니가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팔월은 돼야 결과가 나올 거예요. 이 아이한테 그런 복이 따를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맹씨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