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유월 스물닷새는 묘씨의 생일이었다. 묘씨는 사십 대 초반이라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정안후부의 안주인이니 항렬이 높았고 정안후부도 이번 생신 축하연을 통해 손님들을 접대하고 돈독한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에 성대한 축하연을 준비했다.
정안후부는 아침이 밝자마자 붉은 칠을 한 대문을 활짝 열어놓았고 손님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후부로 찾아왔다.
온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대 앞에 앉더니 염교에게 머리를 빗어달라고 했다.
“마님, 힘드시면 노마님께 말씀드리면 됩니다.”
채 마마의 목소리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온씨는 거울에 비친 다소 창백해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리 대꾸했다.
“이틀 동안 몸조리를 했더니 이제 많이 나아졌네.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애가 투정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그리해서야 되겠나.”
그 말을 들은 채 마마는 시선을 아래로 드리웠다. 온씨는 거울에 비친 채 마마의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내가 엽승덕을 보고 괴로워할까 봐 걱정이 되는 거겠지……. 그러나 가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게 되는 게야! 못 갈 게 뭐가 있어?”
온씨에게 생신 축하연에 참석하지 말라고 하면 그녀는 분에 겨워 몸이 더 상하리란 걸 채 마마는 알고 있었다. 하여 채 마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님 말씀이 맞습니다.”
온씨는 의복을 갈아입고 채 마마와 함께 안녕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안녕당 가까이에 위치한 정자 부근에서 나씨, 엽승강과 마주쳤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가씨를 안고 있는 유모가 그들 부부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이 어린 아가씨가 바로 나씨의 여식이었다.
“형님.”
나씨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서니 온씨의 낯빛이 조금 창백해 보였다. 옅은 화장을 하긴 했지만 칙칙한 안색을 완전히 가리지는 못했다. 나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요즘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어요.”
“응. 감기 기운이 있어 그러네.”
온씨가 기침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나씨는 이미 엽영교에게서 온씨가 송화 골목의 그 첩실 때문에 화병이 났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전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씨는 속으로 엽승덕을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온씨가 너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씨는 온씨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요즘 날씨가 무더워서 병이 나기 쉬워요. 그러니 형님께서도 건강에 유의하세요.”
“알겠네.”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이 좋게 안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안녕당 문밖에서 엽승덕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엽승덕은 여전히 품위 있는 모습이었으나 온씨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는 엽승강을 보고서야 인사를 건넸다.
“셋째야.”
“오, 형님!”
엽승강은 쾌활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는 엽승덕이 밖에서 첩실을 데리고 사는 것에 대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안녕당 서차간으로 들어가자 다른 사람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묘씨는 복록수福祿壽 문양이 들어간 항주산 비단으로 만든 암홍색 긴 배자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진주를 상감하고 공작새 문양이 수놓인 암홍색 말액을 쓰고 있었다. 그녀와 엽학문은 침상에 앉아 자손들의 절을 받고 있었다.
엽승덕, 엽승신, 엽승강 그리고 엽영교가 맨 앞줄에 서 있었고 온씨, 손씨, 나씨가 같은 줄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엽균과 엽영, 엽미채, 나씨의 딸을 안고 있는 유모 그리고 엽승신의 서녀를 안고 있는 유모가 같은 줄에 서 있었다. 방 안의 사람들은 묘씨를 향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올린 후 생신을 축하드린다며 한입으로 인사했다. 그러자 묘씨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일으켰다.
“그만하면 되었다. 가서 각자 일들 보거라!”
엽승덕 형제는 공수를 한 뒤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엽균이 온씨를 쳐다보니 그녀는 낯빛만 살짝 창백할 뿐 병이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았다. 이에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애야. 넌 고뿔에 걸렸으니 어서 돌아가서 쉬려무나.”
묘씨가 온씨를 걱정해 쉬도록 배려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그러더니 온씨는 엽균을 쳐다보며 말했다.
“균이 네가 이 어미를 부축해서 방으로 좀 데려다주렴.”
그 말에 엽균은 깜짝 놀라 얼이 빠졌다. 하나 온씨가 이미 부축해 달라고 말을 꺼냈으니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헤헤 웃으며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을 수밖에.
“어머니, 가시죠.”
그러고 나서 잠시 생각을 하더니 엽미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미채야, 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방으로 가자꾸나.”
그 말에 엽미채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곧바로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더니 불효녀처럼 비쳤을까 봐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엽미채는 얼른 일어서더니 온씨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한쪽 팔을 부축하며 말했다.
“어머니, 방으로 돌아가셔요.”
온씨를 부축하고 있는 엽균은 두 다리를 덜덜 떨며 걸었다. 모친이 송화 골목과 관련된 일을 자신에게 물어볼까 봐 못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하나 엽미채도 함께 있으니 온씨도 물어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두려운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다. 괴로운 동행 끝에 마침내 영귀원에 도착하자 엽균은 온씨를 눕힌 후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오늘 장국후부 사람들도 왔을 거예요. 포환이가 저에게 투호投壺(병 속에 화살 던져 넣기를 하여 진 쪽이 벌주를 마시는 놀이)를 하자고 했어요. 녀석이 도착했는지 지금 가서 볼게요.”
엽균은 온씨가 자신을 나무랄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래, 그만 가 보거라!”
엽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헤벌쭉 웃으며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그러더니 발바닥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서둘러 이곳에서 빠져나갔다. 채 마마는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저런 고얀!”
“신경 쓰지 말거라.”
온씨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물 드실래요?”
엽미채가 살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 오늘 네 할머니 생신이라 밖에서 네 고모가 여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으니 가서 도와 드리거라. 여긴 염교와 채 마마가 있으면 된다. 어서 가 보거라!”
엽미채는 자신이 병석에 누운 온씨 곁을 지키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불효녀 소리를 할까 봐 걱정이 되었으나 그래도 밖에 나가 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진 않았다. 그런데 온씨가 먼저 이렇게 말을 하니 한결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따가 돌아오면 어머니께 재미있었던 것들을 이야기해 드릴게요.”
“그래. 네가 제일 착하구나. 어서 가 보거라!”
엽미채는 폴짝폴짝 뛰며 밖으로 나갔다.
영귀원 밖으로 나온 엽미채는 청석판이 깔린 길을 따라 안녕당으로 돌아갔다. 도착하니 안은 이미 시끌벅적했고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생신 축하연에 일찍 온 손님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엽미채가 고개를 내밀고 안을 들여다보니 여손님들이 많이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모두 그녀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엽미채는 안으로 들어가 그녀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큰고모님, 둘째 고모님, 포 부인, 온 부인. 그리고 자리에 계신 언니들과 동생들도 다들 잘 지내셨죠.”
“인사는 그만하면 되었다. 일어나거라!”
묘씨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방 안에 있는 손님들 중 이미 출가한 엽영교의 두 서녀 언니들도 있었다. 첫째는 금위후부錦威侯府의 서출인 다섯째 아들에게 시집을 갔고 둘째는 한 7품소관七品小官에게 시집을 갔다.
첫째는 막내딸을 데려왔는데 올해로 고작 여덟 살이 되었을 뿐인데도 벌써 영리한 티가 나는 아이였다. 둘째는 아들만 하나 있는데 녀석은 이미 밖에 나가 공자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포 부인은 바로 장국후부의 부인으로, 포기와 함께 한쪽에 놓인 권의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온 부인은 바로 온씨 가문 부인이자 온남아의 어머니인 진씨였다.
온남아와 포기는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눈꼴사납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저번 엽이채 혼례식 때 포기는 엽이채를 엄청 추켜세웠는데 혼수 상자에서 돌덩이가 굴러 나오는 바람에 체면이 크게 깎였다. 그래서 그녀는 온남아에게 비웃음을 당할까 봐 오유월에 적성대에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시간도 꽤 지났으니 별로 부끄러울 게 없었고 더군다나 엽이채를 찾아가 봤더니 그녀가 회임을 한 상태였다. 시댁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평탄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이걸로 엽연채의 체면을 다시 깎아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포기가 묘씨를 바라보며 입을 오므리고 웃으며 말했다.
“노부인, 이채가 장씨 가문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출가 전의 소녀이기에 남의 회임 이야기를 꺼내기는 좀 부끄러웠다.
“그래, 그렇단다!”
묘씨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자마자 곁에 있던 손씨는 입이 귀에 걸려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가 참 복도 많답니다.”
그러자 묘씨는 입을 삐죽거리며 냉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쓱 쳐다봤다.
둘째 내외가 엽이채의 혼례식을 그 꼴로 만들어 버리자 엽학문은 집안일을 손씨에게 믿고 맡길 수가 없었다. 마침 엽영교가 출가 준비를 해야 하니 아예 그녀에게 집안일을 맡겼다. 그래서 오늘 묘씨의 생신 축하연은 엽영교와 나씨가 함께 준비했다. 즉, 손씨의 시누이와 동서는 아침부터 나가 여손님들을 맞이하는 등 정신없이 바빴던 것이다.
손씨가 집안일을 맡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이런 행사가 있을 때는 나가서 일을 도와야만 했다. 하지만 손씨는 그러지 않았고 손님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권의에 엉덩이를 착 붙이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딸을 추켜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엽이채가 도착하면 모녀가 함께 자랑을 늘어놓을 심산이었다.
온남아는 손씨가 이리 뻔뻔스럽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자 두 눈에 비웃음이 어렸고 속이 아주 답답하고 언짢았다. 그렇게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씨 가문 분들과 큰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포기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웃었다.
“오, 연채가 왔네요. 이번에도 부군은 일이 생겨 못 왔으려나?”
그 말에 온남아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포기를 흘겨봤다. 그러는 사이 주렴이 걷히더니 엽연채와 진씨가 안으로 들어왔고 그 뒤로 주씨 가문 자매가 보였다. 포기는 그 모습을 보더니 티 나지 않게 입을 삐죽거렸다.
‘궁상맞은 꼴 하고는!’
그러더니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엽연채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채야, 오늘 네 할머니 생신인데 네 부군은 또 안 오셨나 보네?”
그녀는 엽연채가 난처해하거나 굳어진 표정으로 반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엽연채는 돌아서서 밖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안에서 부릅니다. 어서 들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