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3화 (73/858)

제73화

엽연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엽연채는 출가 전 엽미채와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 수를 놓거나,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곳에 시집오고 나서는 추길과 혜연 말고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조차 없어 심심하던 차였다. 그러니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는 게 시간을 때우기 가장 좋은 방도였다.

“도성 중심 쪽으로 가서 보는 게 어떨까요? 그곳에 상점이 제일 많아 보이더라고요.”

이번에도 엽연채는 시원하게 응했다.

“그럼 그쪽으로 가 보죠!”

엽연채는 침실로 들어가 의복을 갈아입은 후, 추길을 데리고 주묘화와 함께 문을 나섰다. 그녀는 집안의 작은 마차를 빌려 경인에게 말을 몰게 했고, 거리에서 적당한 곳을 찾아 말을 세웠다. 엽연채 일행이 마차에서 내리자 주묘화가 말했다.

“면포 상점에 갈 생각이에요.”

“면포를 사서 직접 만들려고요?”

엽연채가 묻자 주묘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돈으로는 완제품을 살 수는 없지만 좋은 면포를 살 수는 있어요. 돌아가서 이낭께 옷을 지어 달라고 부탁드리면 돼요.”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 이낭의 솜씨가 좋은가 보군요.”

그러자 주묘화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럭저럭 괜찮아요. 제가 입었을 때 예에 어긋나지는 않을 정도예요.”

엽연채는 주묘화에게 호감이 있었기에, 새언니로서 돈을 좀 써서 성년식을 화려하게 보내게 해 주고 싶었다. 지난해 자신의 성년식을 치를 때는 옷과 장신구에만 은화 천 냥이 들었다. 하지만 주묘화에게 그렇게 해 줄 수는 없었다.

첫째로 그만큼 돈이 있다는 걸 드러내서는 안 되었고, 둘째로는 주묘서가 분명 비교를 할 것이니 주묘화의 성년식이 그녀 때보다 성대하게 치러져서는 안 되었다. 또 한바탕 난리가 나 집안이 시끄러워지면 좋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주묘화가 미소를 지으며 길을 안내했다.

“제가 싸고 예쁜 면포를 파는 곳을 알아요. 가요, 새언니!”

주묘화를 따라 골목 두 개를 지나간 후, 그들은 평범해 보이는 한 면포 상점 앞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면포를 고르자 상점 여주인이 그들을 환대했다.

“아가씨! 아가씨!”

그때 추길이 갑자기 엽연채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불렀다.

“응?”

엽연채가 고개를 돌리자 추길이 한 사람을 가리켰다.

“밖에 있는 저분, 큰공자님이 아니신가요?”

엽연채는 순간 멍해져서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거리를 쳐다보니 맞은편의 찻집 문 앞에 두 소년이 서 있었다.

왼쪽 소년은 짙푸른 무늬 비단으로 만든 옷깃이 둥근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는 수려한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로 엽연채의 오라버니인 엽균이었다.

오른쪽에 서 있는 열일곱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서생들이 입는 어두운 회색 도포를 입고 있었고, 비단으로 만든 문생건文生巾(서생들이 주로 쓰는 단순한 형태의 모자)을 쓰고 있었다. 전형적인 서생 차림이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기는 하나 뛰어난 외모라고는 할 수 없었고, 그저 말쑥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 의젓함과 품위가 느껴지는 것이, 딱 봐도 서책을 많이 읽은 학생임을 알 수 있었다.

엽연채는 그 서생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온몸의 솜털이 다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은정랑의 아들 허서였다.

엽연채는 은정랑을 본 적이 없어서 그녀가 뚱뚱한지 말랐는지도 몰랐다. 엽승덕이 그녀를 꽁꽁 숨겨 놓았기 때문이기도, 자신과 모친 역시 은정랑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허서는 본 적이 있었다!

전생에 허서를 보았을 때 그는 이런 차림이 아니었다.

별채에 있던 자신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돌연 인기척이 났다. 소리를 듣고 눈을 떠 보니 어렴풋이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화려한 다갈색 비단옷을 입은 그는 허리춤에 푸르스름한 회색 거미 문양이 들어간 은색 허리띠를 차고,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있었다. 그다지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으나 화려한 옷에 옥대를 두르니 귀티가 나고 늠름해 보였다.

엽균이 이 별채를 찾아온 지 사오일쯤 지났을 때였으며, 허서가 ‘본래의 부모 밑으로 입적’하고 정안후부 공자가 되었던 때기도 했다. 그는 침상 곁으로 다가오는 것도 껄끄러웠던지 5척尺 정도 떨어져서 혐오스럽다는 듯 그녀를 죽 훑어봤다.

“전에 봤을 땐 그 누구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워 동경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어쩌다 이 꼴이 된 게냐? 정말 비위 상하는 몰골이구나.”

그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떴다. 그때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잠시 후 추길이 안으로 들어와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이 바로 그 사생아 허서입니다! 역겨운 놈! 전에 멀리서 아가씨를 몇 번 보고는 연모의 마음을 품었기에, 오늘 일부러 찾아뵌 거라고 하네요. 뻔뻔스럽고 천박한 놈! 저놈이 혹시… 아가씨께 무슨 짓이라도 했습니까?”

“내 몰골을 보더니 비위가 상한다고 하더구나… 하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엽연채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 갔다.

‘허서, 이 사생아 놈……! 아니지. 이놈은 사생아마저도 아니야. 남의 둥지를 차지한 뻐꾸기처럼 후안무치한 놈에 불과하지.’

“새언니?”

주묘화는 엽연채가 미동도 없이 밖을 주시하는 걸 보고는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둘째 아가씨, 제 오라버니가 보이네요. 가서 인사나 나누죠.”

엽연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주묘화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답했다.

면포 상점을 나온 두 사람은 인파를 뚫고 맞은편을 향해 걸어갔다. 엽균과 허서는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큰형님, 요즘 왜 집에 안 오십니까? 어머니께서 며칠 동안 형님을 기다리고 계셨어요. 매일같이 형님이 제일 좋아하는 배골산약탕排骨山藥汤(갈비랑 산약(마)을 산사나무, 국화 등과 함께 끓인 탕)을 끓여 놓으시는데 형님은 오시지도 않고요.”

허서의 말에 엽균은 순간 멍해지더니 미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유, 넌 왜 일찍 알려 주지 않은 게냐? 정랑께서 괜히 헛고생을 했잖니.”

“어머니는 형님이 공부하시느라 바쁜데 괜히 방해될까 봐 그러신 거겠죠?”

허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엽균이 수학하는 곳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명산서원明山書院이라는 서원이었다. 도성 내에서 대단히 유명한 이 서원은 본래 엽균의 자질과 학문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엽학문이 뒤로 몰래 돈을 찔러 주고 나서야 그는 서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엽균은 서책을 읽기도 싫고 서원에 다니기는 더더욱 싫었지만, 집안의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엽균은 공부로 바빴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요 며칠 친구 몇 명과 놀러 다니느라 송화 골목에 가지 않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오늘 아침 문밖을 나서는데 주방에서 배골산약탕 냄새가 나더라고요. 형님, 어서 가요!”

“그러자꾸나.”

허서의 부추김에 엽균이 순순히 응할 때였다.

“어머, 오라버니. 배골산약탕을 드시러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저도 같이 가요!”

부드럽고 매력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엽균과 허서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허서는 그만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요염하고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는 소녀가 활짝 웃으며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복숭아와 자두처럼 탐스럽고 꽃처럼 고운 소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색채는 모두 그녀가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주위 풍경은 흐릿해지고 그녀의 모습만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엽연채가 발걸음을 내딛자 꽃문양이 들어간 하늘거리는 암홍색 치마가 멋스럽게 펄럭였다. 허서는 엽연채를 보더니 넋이 나가 멍하니 서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실 엽연채를 처음 본 게 아니었다. 그는 상대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성정을 지녔는지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요에 못 이겨, 온씨 모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남몰래 몇 번 엽연채와 온씨를 관찰했는데, 처음 엽연채를 봤을 때는 선녀가 따로 없는 그녀의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었었다.

엽연채는 자신을 향한 허서의 눈빛을 느꼈다. 그녀의 눈에는 순간 짙은 혐오감이 비쳤으나, 입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바로 이자였다. 오라버니의 모든 것을 차지했을뿐더러, 은정랑이 결국 정실부인의 자격으로 정안후부로 들어갈 수 있게 한 자!

엽연채는 엽균의 말로에 대해선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제구실도 못 하는 엽균의 행태에 분노가 치밀면서도, 한편으론 비참한 모습에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친어머니는 내팽개친 불효자가 아버지의 외실에게는 살갑게 굴며, 친누이는 보호하지 않고 되레 남의 집 자식은 보호했지.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차례다!’

그래도 같은 피가 흐르는 육친인지라, 엽연채는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말로를 보았을 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이번 생에선 되돌릴 수 있으면 반드시 되돌려 놓을 것이다. 만약 되돌릴 수 없다면 그들과 함께 죽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허서는… 엽승덕이 할아버지께 자신과 은정랑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했다던데? 하하,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이는 엽승덕과 은정랑이 직접 인정한 사실이었다. 엽연채가 열 살이던 해,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은정랑이 어떻게 생겨 먹은 여인인지 확인하려고 송화 골목에 왔었다. 은정랑의 거처는 그때도 송화 골목에 위치했었고, 엽연채는 근처에 서 있는 나무 아래에 몰래 숨어 있었다.

그러나 엽승덕이 문 앞에 서서 집 안에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엽승덕의 몸에 가려 있기도 했고, 각도상의 문제로 안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엽승덕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이 서화는 내가 엄청 공을 들여 구한 것이니 요 선생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게요. 이걸 받으면 틀림없이 허서를 받아 줄 거요.”

그러자 안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까지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인나리께서도 서화를 좋아하신다고 하던데 가져다드리면서 효도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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