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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화 (1/858)

제1화

엽연채는 화장대 앞에 앉아 꽃무늬가 새겨진 정교한 구리 거울을 멍하니 들여다봤다.

거울 속에는 진홍색 혼례복을 입은 아리따운 소녀가 봉관鳳冠(봉황새 장식을 올린 화려한 예식용 관)을 쓰고 하피霞帔(예식 등 특별한 날에 귀부인들이 착용하던 어깨 덧옷)를 걸친 채 앉아 있었다.

엽연채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거울 속의 소녀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갸우뚱했고, 눈살을 찌푸리자 소녀도 눈살을 찌푸렸다. 환각이 아니었다.

“아가씨, 관 때문에 불편하시죠?”

여종 혜연이 물었다.

“하루 종일 쓰고 계셔야 하니 꽉 끼거나 헐거우면 참지 말고 말씀하세요.”

엽연채는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번뜩였다. 그녀가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혜연아, 여기 좀 보거라. 거울 속 이 여인이 누구냐?”

혜연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아가씨죠. 아가씨가 아니면 누구겠어요?”

“내가 혼례식을 다시 올린다는 말이냐?”

추길이 ‘풉’ 소리를 내며 입 안에 있던 차를 뿜었고, 옆에 있던 희낭喜娘(신부 들러리)은 크게 휘청이는 바람에 하마터면 허리를 삘 뻔했다. 혜연이 허둥대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례식을 다시 올리시다니요? 아가씨 혼례식은 이번이 처음… 아니지, 흠, 처음이라는 말도 필요 없죠. 아가씨는 그냥 혼례식을 올리시는 거예요!”

희낭이 웃으며 말했다.

“얘가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아가씨는 방금 혼례복의 옷고름을 다시 묶고 싶다고 하셨다.”*

(* 엽연채가 ‘改嫁’, 즉 혼례를 다시 올리느냐고 물었기에 희낭은 ‘改嫁衣’, 즉 혼례복 매무새를 다시 정리한다는 말로 좋게 표현한 것임)

그러더니 정말 옷고름을 다시 풀어서 다른 형태로 묶어 주었다.

“자, 이렇게 묶으면 부부가 한평생 화목하게 산다고 하지.”

혜연은 고마워하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추길아, 다 됐으니 얼른 모시고 나가서 차를 마시고 있어.”

눈치 빠른 추길이 미리 돈궤에서 꺼내 놓은 말굽은을 희낭의 손에 쥐여 주며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방 안에는 주인과 여종 단둘만 남게 되었다.

혜연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런 농담은 하지도 마세요. 그 소리가 장씨 집안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 납니다.”

엽연채는 벅차오르는 흥분을 누르며 차분한 목소리로 슬쩍 떠보듯이 물었다.

“내가 혼인할 사람이… 장박원이냐?”

“아가씨, 또 실없는 소리를 하시네요.”

연이어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자신의 아가씨 때문에 혜연은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박원 공자님이 아니면 누구시겠어요? 그런 말씀은 이제 그만하셔요!”

혜연이 애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자 엽연채는 알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상으로 가 앉고 싶으니 부축 좀 해 주렴.”

혜연은 그녀를 부축하며 조심스럽게 발보상拔步床(지붕과 기둥이 달린 대형 침대로, 아주 작은 집처럼 생겼음) 쪽으로 걸어갔다. 침상에 편히 걸터앉아 주위를 둘러본 엽연채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다시 살아났으며, 혼인하기 직전의 순간으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기쁘면서도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만 더 일찍 돌아왔다면, 파혼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 상황에선 딱 한 가지 선택밖에 할 수 없었다. 엽연채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때 주렴이 흔들리더니 추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불평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길시吉時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얘는, 급할 게 뭐 있니!”

혜연이 추길에게 핀잔을 줬다.

“뭔가 일이 생겨서 아직 못 오시나 보지. 이따 신랑이 오시면 못 들어오게 너무 막지나 말라고 사람들에게 일러 둬. 작별 인사 같은 것도 서둘러 해치우면 그만이니까.”

엽연채가 입꼬리를 올리며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자조 같기도, 쓴웃음 같기도 했다. 조금 있으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새신랑은 물론 오지 않을 테고.

일각一刻(15분)쯤 지나자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꽉 쥐고 두 눈을 내리깔았다.

‘왔구나!’

밖에서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그만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머리의 주인은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여쁜 소녀였다. 주렴을 걷어 올린 추길이 당혹스러워했다.

“셋째 아가씨?”

현재 엽씨 가문의 주인은 후작 엽학문이었다. 그의 슬하에는 적장자와 서출인 차남, 삼남이 있었다. 엽연채는 적장자 일가에서 태어난 정실 소생의 적장녀였고, 셋째 아가씨 엽미채는 같은 일가의 서녀였다.

“미채니?”

엽연채가 그녀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이리 오렴.”

“큰언니.”

엽미채는 엽연채 곁으로 달려와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밖에… 밖에 일이 났어요.”

“신부 맞이 행렬이 너무 소란스럽게 구는 모양이지요?”

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게 아니야.”

엽미채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부 맞이 행렬은 코빼기도 안 보여. 오지 않으려나 봐. 그게, 큰형부와 둘째 언니가 같이 도망가 버렸대!”

엽미채가 말하는 둘째 언니란 엽학문 차남의 여식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깜짝 놀란 추길이 물었다.

“셋째 아가씨,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으신 겁니까?”

혜연 역시 몹시 놀란 목소리로 엽미채에게 물었다.

“진짜야. 밖에서 다들 이리 말하고 있는걸!

아침에 어머니께서 나와 둘째 언니에게 영춘원迎春園에 가서 안식구들을 대접하라고 하셨어. 그런데 가는 도중에 둘째 언니가 갑자기 어지럽다고, 방으로 돌아가야겠다면서 사라지지 뭐야? 그래서 방금 전까지 나 혼자 정신없이 사람들을 맞이했어.

아무튼 모두들 신부 맞이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와야 할 사람들은 오지 않고 이런 소식만 들려오는 거야, 글쎄!”

“누가 함부로 그런 말을 퍼뜨린다는 말입니까? 이건 우리 엽씨 가문 아가씨와 장씨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에요!”

혜연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어느 가문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손님으로 온 어떤 사내가 그랬어.”

엽미채는 그녀를 쳐다보며 쭈뼛쭈뼛 말을 이어 갔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 신부 맞이 행렬이 오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라. 그때 그 사내가 ‘설마 성 밖에 있던 그 두 사람이?’라고 말했어.

사람들이 캐물어 보니 성 밖에서 젊은 남녀 한 쌍이 망파정望波亭 부근에서 만나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잖아. 그 두 사람이 장박원과 둘째 언니였던 거지.

사내는 공무를 보러 어제 성 밖으로 나갔다가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오는 길이라 두 사람을 그냥 지나쳤다나? 스치듯 봤을 때 낯이 익다고는 생각했는데,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제 착각이겠거니 하고 넘겼대.

그도 그럴 게 오늘은 장박원과 큰언니의 혼례식이잖아. 그런데 지금까지 새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러 오지 않으니 그 사람도 의심이 들기 시작한 모양이야.”

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캐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다들 둘째 언니가 어디 있냐고 물었지. 그러자 웬 입이 가벼운 부인이 아침에 둘째 언니가 봇짐을 메고 어수선한 틈을 타 문밖을 나섰다고 그러더라. 물건을 사러 가는 줄로만 알았지 형부와 눈이 맞아 달아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면서.

일이 커지든 말든 손님들은 신이 나서 온갖 망측한 이야기를 해댔어. 결국 새신랑이 처제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이야기를 손님 모두가 알게 되었고, 이젠 일을 덮으려야 덮을 수 없을 지경이야.”

울먹거리던 엽미채가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는 이어서 말했다.

“전 둘째 언니의 방을 들여다보고 오는 길이에요. 돈이 될 만한 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더라고요. 그 말이 정말 사실인가 봐요, 큰언니…….”

엽연채가 막막함에 눈을 꼭 감았다. 전생의 기억이 물밀듯 떠올랐다. 가슴속에서 쓰라린 고통이 밀려오는데,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입을 뗐다.

“신부 맞이 행렬이 도착했니?”

“아직이요…….”

엽미채의 대답에 엽연채의 까만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갔다. 결국 그녀는 전생에 했던 것과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은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조부모님께서 어찌하고 계신지 알아보고 오렴. 혜연이 너도 따라가거라.”

그 말을 들은 엽미채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혜연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어멈 둘에게 아무도 방에 들이지 말라고 당부한 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엽미채의 뒤를 따라갔다.

엽연채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상황이 돌아가는 걸 지켜본 다음 결단을 내려도 늦지 않을 터였다.

* * *

그 시각, 안녕당安寧堂의 동차간東次間(정면이 여러 칸으로 된 건물에서, 중앙 칸 옆에 위치하는 칸을 ‘협칸’이라고 하는데 그중 제1 협칸을 ‘차간’이라고 함).

굳은 표정을 한 엽학문이 태사의太師椅(팔걸이가 달린 각진 나무 의자로 권위를 상징하며 집안에서는 주인의 자리를 뜻하기도 함)에 앉아 있었다. 황단나무로 만든 찻상 맞은편에는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한가로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인상은 날카롭지만 자태가 퍽 고운 이 여인은 엽학문의 후처 묘씨 부인이었다. 그녀는 슬하에 딸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올해 열여섯이 된 과년한 딸은 아직 출가 전이었다.

말석에는 엽학문의 세 아들 적장자 엽승덕, 서출인 차남 엽승신과 삼남 엽승강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의 부인인 온씨, 손씨, 나씨도 함께였다.

온씨는 딸의 혼삿날 자신의 조카와 딸의 신랑 될 사람이 도망을 쳤다는 소식에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온씨는 곧 숨이 막히는지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제 과로를 해 감기에 걸린 상태였는데, 그게 악화된 모양이었다.

“마님! 마님! 정신 차리세요!”

결국 까무러치고 만 온씨의 곁에서 어멈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버님, 저희 둘째가 그런 짓을 벌였을 리 없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손씨는 화장이 다 지워질 정도로 엉엉 울면서 말했다.

“분명… 오해가 있을 거예요. 아버님… 아버님……!”

어멈의 다급한 목소리에 손씨의 울부짖음이 더해지니 엽학문은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참다못한 엽학문이 결국 버럭 성을 냈다.

“그 입 다물라! 다들 그 입 다물어! 첫째, 너는 얼른 네 처를 데리고 나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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