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42/87)

***

황성 연회 날이 밝았다.

정확히는 하루 전날이었다. 황성으로 가기 위해선 꼬박 반나절을 달려야 한다나. 공작 위 급 되면 황실 측에서 화려한 숙소를 제공한다는데, 그런 데 관심은 없고.

나는 거대한 마차를 보면서 단호히 선언했다.

“안 타.”

그러자 주변 이들이 움찔하더니 눈치를 보았다. 개중에는 내 시중 하녀로 지정된 베로니카도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너 같으면 마음에 들겠니? 나는 식은 눈으로 마차를 쳐다봤다.

……그놈의 20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가 등장했다. 설마하니, 감방에서 나왔을 때 이야기 듣고 까먹었던 건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거대하고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워서 못 타겠다. 이건 말들에게 학대야!

“너무해. 내 동생. 널 위해 꼬박 한 달을 준비했는데.”

“한 달 아니잖아.”

“……일주일?”

일주일 같은 소리 하네. 손짓 하나로 저런 마차를 하룻밤 새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이? 체이서는 눈꼬리를 내려 시무룩한 얼굴을 드러냈다. 하나 내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는 무심하게 한마디 했다.

“……오빠, 이미 다른 마차도 준비해뒀지?”

그러자 울상이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하게 미소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부드러이 입을 맞췄다.

“내 동생, 네가 이렇게 날 잘 안다는 듯이 반응할 때마다 더 좋아져서 큰일이야.”

그는 내 손에 얼굴을 묻고는 중얼거렸다.

“이건 애정이야, 그렇지?”

글쎄. 개구리가 뱀을 관찰하는 것을 과연 애정이라 부르던가. 나는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럴수록 무심하던 마음에도 점차 밀어내고픈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도.

눈을 깔아 침묵했다.

“도뮬릿 공작 각하의 방문을 대단히 환영합니다.”

한참을 달려 황성까지 빠르게 도착했다. 석양이 질 무렵, 우리가 도착했을 때 수많은 이들이 앞에 나와서 반겨주었다.

도뮬릿 공작가의 가세를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동시에 내가 드디어 제대로 된 밖에 나왔구나 하는 기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모실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어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황성 내에서는 황성 시녀가 길 안내를 도맡아 방으로 인도했다. 어째서인지 내 방으로 가는 길에 체이서도 함께였다.

나는 걷다 말고 흘끗 그를 응시했다. 그는 기민하게 내 시선을 눈치챘다. 마치 모든 신경을 내게만 쏟고 있었던 것처럼.

“이아나?”

“오빠.”

서로가 동시에 불렀지만 체이서 쪽에서 침묵했다. 먼저 이야기하라는 것이리라. 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내게 준 물건.”

대체 그것 정체가 뭐야? 솔직한 물음 대신 다른 질문이 튀어나왔다.

“왜 이제야 준거야? 분명 내가 예전에 썼던 물건이라 했잖아.”

“아아.”

체이서가 빙긋 웃었다.

“저택 창고 정리를 하다 보니, 나왔어. 네게 돌려주면 좋을 것 같아서.”

“……4년이나 지나서?”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한 가지를 먼저 확인해야 했다.

체이서는 그 칠판에 숨겨진 기능을 알았나?

“너도 알다시피 도뮬릿 저택은 참 넓잖아. 누군가 거기 넣어두었다가 잊은 모양이야.”

그 누군가란 정황상 시중인인 듯했다. 일견 툭 맞아떨어지는 말이었지만…….

“거기에 자그마한 칠판이 있던데.”

“칠판? 아.”

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오빠도 봤어?”

“봤지. 그래서 네게 줬지 않겠어?”

“아니, 꼼꼼히 봤냐는 거야.”

체이서의 우묵한 눈이 나를 지그시 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시선이 스쳤다.

“상자에 담겨 있던 그대로 가져왔어. 그러니까 보긴 했지만 굳이 일일이 확인하진 않았는데……. 왜?”

“…아냐.”

“칠판이면 네가 예전에 가지고 다니던 걸 말하나 보네. 꽤 아꼈던 거야.”

체이서가 턱을 괸 채로 미미하게 눈을 휘었다.

“유일하게 나한테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보았을 때, 체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낯이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으나, 속은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네 물건이 모조리 불탄 뒤에야, 내 손에 들어왔지. 아무것도 없는 칠판이어서 네가 왜 그랬나…… 궁금하더라.”

나는 두뇌 싸움에 능하지 않을뿐더러 소질도 없었다. 웬만하면 진솔하게 묻고 답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더는 묻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체이서는 내게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많은 대화가 필요한 일이었다. 일단은 돌아가서 다시 보고 보여줘도 늦지 않을 터다.

아울러 긴 마차 여행에 조금 지치기도 했다.

“근데 왜 오빠는 내 방 가는 길에 동행하는 건데?”

그가 배시시 눈을 휘었다.

“에스코트지.”

흘끗 시녀가 우리를 보는 것 같았다. 한순간이지만 체이서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가 노련하게 제 색을 되찾았다. 새삼 그의 능력을 떠올렸다.

‘매혹안’. 내게는 통하지 않는 데다 왜인지 내 앞에서는 거의 쓴 적이 없다 보니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기도 했다. 거기다 이런 능력을 쓰지 않더라도 그는 농밀한데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황궁 연회는 내일 저녁부터야.”

“응.”

이는 마쉬멜에게 이미 들어 아는 사실이다. 이외에도 대략적인 일정을 모두 전해 들은 참이었다.

“본래는, 연회 시작하기 나흘 전부터 참석해야 하거든. 낮에는 오찬을, 오후에는 다과회 혹은 가끔 사냥회를 열기도 해. 참석은 자유인데…… 대부분은 참여하지. 영애든 영식이든.”

짧지 않은 여행으로 피로했지만 체이서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낯선 곳에 왔으니, 적응을 위해서라도 잘 들어두는 게 좋을 듯했다. 언제까지고 마쉬멜의 신세를 질 순 없다.

“나도 해야 하는 거란 거야?”

“아니. 반대야.”

마침 시녀가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우리도 멈춰 섰다. 체이서는 허리를 기울여 내게 작게 속삭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는 그대로 떨어져서는 채 손을 잡고 손등에 친애의 인사를 남겼다.

“귀찮은 것도 피로한 것도 싫어하잖아?”

그것이 정녕 나를 위한 일일까 생각은 들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는 피식 웃었다.

“날 잘 아네?”

옳은 말이기도 했다.

“나뿐일까.”

체이서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쭉 그었다. 내 손을 잡았던 손가락이었다.

“다들 캄브라캄에 다녀온 내 동생에게 관심이 많아서 말이지.”

“그럼, 현존하는 영애중에 누가 그런 업적을 달고 있겠어.”

감빵 경험이라니. 평범하지 않긴 하지. 새삼 내 시간들이 와닿았다.

“그럼 내 동생, 있다가 또 봐.”

체이서는 방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돌아갔다. 여기까지 와서 내 방에서 밤을 지새울 건 아닌 모양이었다. 듣자 하니 내 방과 바로 옆이던데. 뭐 하러 굳이 데려다줬나 싶기도 하고. 방 하나하나가 매우 커서 복도 전체를 다 쓰는 꼴이었다.

“동쪽 끝 복도는 모두 도뮬릿 공작가에 내려주신 공간입니다. 부디 편하게 이용 부탁드리겠습니다.”

시녀가 방에 대한 설명을 잇고는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도뮬릿 저택의 하녀들은 처음 나를 보고 호기심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는데, 이쪽은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이쪽이 더 프로라 이건가.

“아울러 동쪽 끝과 서쪽 끝 공간은 오직 가장 귀하신 귀빈만을 위한 공간이니 기타 편의 및 보안에 대한 염려를 덜으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동쪽과 서쪽 끝? 듣다 말고 별생각 없이 물었다.

“서쪽 끝에는 누가 머무는데요?”

말하고서야 아차 싶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하대가 잘 나오지 않는 건 여전했다.

시녀는 왜인지 눈을 잘게 떨더니 얼른 시선을 내렸다.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어 말했다.

“헤……르님 대공께서 사용하십니다.”

나는 멈칫했다. 시선이 절로 창문을 향했다.

“도착한 건가요?”

“네, 도착하셨습니다.”

초승달 모양에 가까운 황성은 동쪽 끝 창문에서 서쪽의 끝이 고스란히 보였다. 하지만 어찌나 큰지, 굉장히 멀어 보였다.

‘도시와 도시만큼은 아니지만.’

도시와 도시정도로 떨어져 있을 때는 무심할 수 있기라도 하지…….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안내 고맙습니다.”

리케도르안은, 지금쯤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았을까.

체이서가 불렀던 이아나란 이름 어디에도 붙지 않았던 도뮬릿. 거기까지 생각하고, 걸음을 옮겼다. 내가 향한 곳은 시녀가 안내한 방이 아니었다. 시녀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고요히 인사할 뿐. 잠시후 나는 체이서의 방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오빠.”

방 안으로 들어서자 곧 그가 나타났다. 그는 뜻밖이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곧 다정히 웃었지만.

“네가 날 찾아주다니, 영광인데. 내 동생.”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

나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오빠랑 나는 남매지만 전혀 닮지 않았잖아.”

그는 다소 놀란 얼굴을 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머리카락 색도 눈 색도 이목구비도 어느 것 하나 비슷한 구석이 없어.”

“그렇지?”

그랬다. 체이서와 이아나는 남매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닮지 않았다. 겉모습도 알맹이도.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우리 사이를 두고 남매라 표현하는 것이 기만이었지만. 나는 이를 알면서도 침묵했다.

체이서의 얼굴이 재밌다는 듯 기울어졌다.

“그래서 내 동생, 하고 싶은 말이 뭘까?”

그는 오히려 녹아내릴 듯 달콤한 목소리로 ‘내 동생’ 하고 힘주어 말하는 것으로 강조했다.

“여기선 너와 같은 머리색을 했으면 좋겠어.”

마쉬멜에게서 전해 들은 연회 사양에 대해 떠올렸다.

“적어도 사람들은 우리가 남매라고 믿게.”

황성에서 열리는 데뷔당트의 주제는 ‘가면 무도회’였다.

“눈동자도 바꿔줘.”

“어렵지 않지.”

그는 팔짱을 낀 채로 긴 다리를 뻗었다. 발끝이 장난스럽게 까딱 움직였다.

“그럼 이 모습은 내게만 보여주는 거야?”

막 옷을 갈아입으려는 상태였던 듯 그는 드물게도 단추를 잡아 푼 방만한 차림이었다. 머리 또한 반은 올려놓았던 머리칼을 풀어 이마 근처에서 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의 금욕적인 공작이 아니라, 어느 부잣집의 방탕한 막내아들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좋은 일인 것 같으니 협조할게, 이아나.”

가면, 데뷔하는 이들은 모두 동등하다는 의미에서 시작된 이것은 결국 가면을 벗음으로서 끝난다.

상관없다. 가면을 벗기 전에 떠나면 되니까.

나는 깨달았다.

리케도르안을 다시 마주 하고 싶지 않은 거구나.

진실을 마주한 그를 보고 싶지 않은 거야. 괴로워하든 체이서의 과오로 이어진 증오로 나를 보든.

설사 그가 슬퍼하더라도 나는 그 모습마저 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마주 하기 두려웠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대체 누구의 눈에 들고 싶지 않아서……인지는 묻지 않겠지만.”

“…….”

“언제든 돌아오면 돼, 이아나.”

머리카락으로 손길이 스쳤다.

“내 곁으로.”

장미, 그리고 책 속 주인공. 그리고 다시 장미. 머릿속으로 이지러지며 뒤섞이는 생각 사이로 진득하게 파고든 것은 이 남자의 자욱한 향기였다.

***

황성 연회 당일.

저녁은 금세 찾아왔다. 하기야 온종일 한 거라곤 방에서 뒹군 것밖에 없으니 시간은 참 잘도 지나갔다.

그렇다고 무료할 새가 있었냐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오전부터 분주하게 들이닥친 하녀들과 준비하기 바빴으니 말이다. 도뮬릿에서 함께 온 하녀들은 평소와 다르게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적극적이었다. 괜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이 사람들 체이서 기에 눌려 지냈구나…….’

체이서 한 사람만 없을 뿐인데 이리 활기차다니.

“아가씨, 마음에 드세요?”

반면 장장 8시간에 걸친 대장정에 나는 쓰러지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티를 내는 대신 웃어보였다.

“응. 마음에 들어.”

어여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거울 속 나를 보고 상당히 놀랐으니까. 멋쩍게 이게 정말, 나? 해보고도 싶었는데 그렇진 않았다.

“아가씨께서 바라셨던 편한 의복이에요. 최대한 편의를 생각해서 만들었다고 해요.”

“…공작님께서 각별히 지시하셨대요!”

완성된 드레스는 그때 느꼈던 것처럼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붉은 줄리엣 드레스와 비슷했다. 그러면서도 흰색이 섞인 천이 우아하게 보였다.

“의상실에서 슈미즈 형태와 기타 의복 형태를 섞었다고 전했어요.”

“응, 마음에 들어.”

나는 설명을 하며 눈치를 보는 이에게 미소를 돌려주었다. 이윽고 기뻐하는 그녀의 표정에 함께 뿌듯해하면서. 하녀들은 끝으로 날이 서늘할 거라며 내게 모슬린 재질의 숄을 걸쳐주고는 사라졌다. 그녀들과 교차하듯 마쉬멜이 들어왔다.

망토를 걸친 조그만 흑마법사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옷이 날걔네.”

“고마워요. 편해서 좋네.”

“편하댜니, 아가씨 댭다.”

마쉬멜이 아장아장 내게로 걸어왔다.

“쥬인님이 보냬서 왔댜. 얼귤을 바꿀거라묘?”

그는 체이서에게 이야기 들었다며 내게 곧장 마법을 걸어주었다.

“마법은 어디댜 걸어줄까?”

“음.”

마법을 건 것이 끝이 아니라, 마법을 붙잡아 둘 매개체를 골라야 한단다. 나는 장신구들을 보다가 무심하게 하나를 택했다.

“저거.”

가면이었다.

“……연회에서 가묜을 벗을텐뎨?”

“그전에 들어갈 거야.”

마쉬멜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뭐 그래도 상관없긴 하다며 수긍했다. 이제 그는 내가 어떤 기행을 하든 쟨 아가씨니까, 하고 여기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하는 거 빤히 보여요, 마쉬.”

“…이젠 아쥬 멋댸로 부르눈구냐.”

“왜요, 애칭인데.”

“돼꼬, 이 먀법은 얼굴쁀 아니라 목쇼리도 바뀔 거댜. 주로 쳡자들이 자주 쓰눈 마법이지.”

“와, 철저하네요. 그 부분은 생각 못 했는데….”

“냬 마법이 세튜인 것쁀이댜.”

“와, 그거 본인 자랑이죠?”

마쉬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짐짓 표정을 굳혔다.

“되됴록이면 주인님께 장미 힘을 쓰지 말랴고 먈씀드려봐.”

“마법이 풀리니까요?”

“그러치.”

황성 연회에서 특수한 힘쓸 만큼 치고받고 싸울 일이 무에 있겠나. 대수롭지 않게 끄덕였다.

“요차하면 나도 있으니까. 염려 먈고.”

“아, 마쉬멜 씨도 같이 참석해요? 잘됐네.”

마쉬멜이 끝으로 마법을 한번 점검하고는 돌아갔다. 참석 시간이 다 되었을 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황성 시종인가 싶었더니, 의외의 인물이 나를 반겼다.

“이아나 양.”

르나그였다.

“이아나.”

옆에는 체이서도 함께였다.

어라, 왜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지?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반가워할 겨를도 없었다.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 르나그와 삐딱하게 문에 기댄 체이서를 번갈아 보는데 정신없었으니까.

……책 속 악당즈를 한 번에 보니까 기분이 참 묘하네.

나는 품 안에 있던 푸딩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돌아섰다.

-인간, 왜 그러나? 냥. 이 몸은 들어가 줄까?

이제는 3살이나 먹었다고, 눈치가 생긴 푸딩이 속삭였다.

‘응, 잠시만 들어가 있어.’

깜빡하고 말하지 못했는데 푸딩과 계약하고 난 뒤로 두 가지 사실을 알았다. 하나는 푸딩의 모습이 반투명해졌다 실체를 가졌다가 오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것으로 푸딩은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해서 날 쫓아다닐 수 있었다. 계약하고 나서 얼마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몸에서 문신을 발견했다는 건데.

‘왼쪽 허벅지 안쪽이었지, 아마?’

남들 눈에는 절대 안 띌 곳이라 좋긴 한데, 기분이 묘하달까. 허벅지에 문신이라니 말이다. 그것도 리케도르안과 같은 붉은 장미.

흐려지는 기분을 애써 다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눈앞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생각해보면 르나그는 내 약혼자 아니었나?’

듣자 하니 체이서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 같긴 했는데, 관계상 약혼자가 맞았다.

이를 생각한 건 이 무도회의 성질을 떠올려서였다.

‘아……. 파트너가 필요한 파티란 걸 잠시 잊고 있었어.’

들어보니 저쪽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이아나 양에겐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누가 뭐랬나?”

“공작께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닙니까?”

“그럴 리가.”

내 눈이 핑퐁을 그리듯이 두 남자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나는 내 역할을 하러 온 겁니다. 공작.”

“그대는 가끔 그대의 작위를 잊는 것 같은데. 후작.”

“더 높은 직위가 반드시 영광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요. 당신의 손을 잡고 가면, 당신의 후광을 얻고자 하는 얼마나 많은 사내 새, 아니. 영식이 나타날 것 같습니까?”

“내가 잘난 걸 어떡하겠어? 그리고 내가 옆에 있을 건데.”

나 잠깐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욕설이 오갔던 것도 같고 아닌가.

체이서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옆에 있을 예정이라.”

나는 어느새 가면을 쓰고 그들의 싸움을 심드렁하게 감상했다.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왜 싸우는 거지?’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닌지 순진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인간, 저 인간들은 왜 싸우는 거냐? 냥.

‘몰라. 기싸움하나 봐.’

날 두고 말이지.

“그래서, 내 동생 누가 좋겠어?”

마침내 불똥이 내게로 튀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를?”

“네 파트너.”

파트너……. 그냥 입장할 때만 함께하고 들어가서는 각자 논다던데. 마쉬멜이.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양쪽에서 느껴지는 집요한 두 시선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내 난 탐탁지 않게 입을 열었다.

“아무나 좋아.”

진심으로 누가 됐든 별 상관이 없었다. 그러자 르나그의 얼굴에 눈에 띄게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반면 체이서는 진한 웃음을 지었다. 내 손을 살짝 잡으며 웃음기 어린 녹진한 음성과 함께.

“여기선 날 택해줘야지.”

그의 엄지가 부드러이 손바닥을 쓸었다. 그렇게 간지럽히며 귀로 작게 속삭였다.

“섭섭해, 응? 짖어야 택해 줄 거야?”

“짖, 뭐?”

“멍.”

체이서가 내 손을 가져와 제 크라바트 위에 올렸다.

“당장이라도 목걸이를 찰 수 있는데.

……이 목걸이가 내가 갖다버린 개 목걸이라는 데에 푸딩의 간식 열 달치를 걸 수 있었다.

이 미친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뭐 하는 거야?”

그러나 체이서는 내 손바닥에 입술을 슬쩍 묻고 그대로 움직였다.

“멍.”

야릇하게 휘는 눈매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미쳤어!”

하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아나 양.”

가만히 지켜보던 르나그가 불쑥 끼어든 것이다. 그는 오늘도 차갑고 날카롭게 벼려진 낯으로 머리칼을 느슨하게 묶어 늘어트린 채였다.

그의 얼굴로 망설임이 스쳤다.

“……저도 짖으면 됩니까?”

“돌았어요?”

르나그는 잠시 움찔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공작은 하는 것 같기에…….”

“오빠가 이상한 거예요.”

“너무해, 이아나.”

넌 좀 가만히 있어 봐!

“이아나 양의 취향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남자는 4년이 지난 지금에도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무어라 하지 못했다. 어처구니없어서였다. 다음 순간 이 남자가 입을 달싹였다.

“전 그저…….”

나보다 한참 큰 남자가 시무룩해하는 기색은 영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사실 이쪽도 미남이었으니까.

“……이아나 양은 짖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예?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쳐다보면, 그대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시무룩해 하는 이 남자는 진심이었다.

나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나를 진지하게 응시하는 르나그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진지하게 엉뚱한 소릴 하는 사람에겐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사실 르나그와는 실로 오랜만에 본 것이었다.

3년 전 그가 내게 도망을 제안했을 때부터 나와 그 사이에는 미약한 연대가 생겼지만.

이는 깊어지지 못했다.

이 시간 동안 르나그가 바빴으며, 또한 체이서가 나를 보는 것을 온갖 수단을 통해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서 이렇게 종종 얼굴을 보았지만, 최근엔 많이 바빠졌다더니 이렇게 연회를 왔나 보다. 사실 르나그 정도 되는 귀족은 데뷔당트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 때문인가?’

고개를 들면 이 남자가 살포시 시선을 피했다. 손등으로 슬쩍 제 얼굴을 가리면서.

커다란 손아래 미처 가려지지 못한 붉은 뺨을 보았다.

이젠 숨기지도 않네.

3년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런 것들이었다. 그가 더는 내게 이런 행동들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 쓸쓸한 황무지, 그 땅을 고고하게 누비는 뱀과 같이 날카롭게 생겨서는, 이런 모습을 보일 때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조금 신기한 마음이 들곤 했다.

내가 대꾸하지 않자 르나그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흘러가 버렸다. 곧이어 체이서에게서 누구를 선택할 거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누구와 함께 갈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굳이 골라야 하는 질문인가 싶지만…….’

“나는 어느 쪽이든 좋은데…….”

흘끗 르나그를 보았다. 긴 눈매가 움찔 떨렸다.

“기왕이면 약혼자랑 가는 게 좋지 않나?”

남들 보기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르나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리 보면 외모랑은 다르게 바로바로 반응이 온단 말이지.

체이서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나긋하게 미소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

웃고 있지만 상대로 하여금 긴장을 느끼게 하는 미소였다. 그리고 이건 그의 주특기였다.

저 눈 봐, 사고 치겠네.

-인간, 고를 거냐, 냥?

자칫 잘못 이야기했다가는 오늘 내로 발테이즈와 도뮬릿이 큰 싸움을 벌였다는 소문이 퍼지겠다 싶었다.

결국 나는 극적으로 타협했다.

그럼 이렇게 해, 내 말에 두 남자가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덩치가 산만 한 인간들이 이 순간만큼은 순한 양과 다를 바 없었다.

십 분 뒤, 나는 르나그와 복도를 걷고 있었다.

르나그와 복도를 함께 걷고, 입장은 체이서와 함께하기로 타결을 본 참이었다.

……이게 뭐라고 타결씩이나 보는지 의문이었지만. 무심히 바닥을 응시했다.

“날이 좋습니다.”

하나 내 시선은 바닥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여름을 좋아하십니까?”

이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에 저절로 끌어 올려졌으니까.

감방 출소로부터 4년, 이것저것 많은 것이 변했다. 리케도르안이 성장했고, 체이서가 속내를 드러냈다. 스스로는 변함없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가 보기엔 나 또한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남자도 변했다.

하나 내 주변 이들 중에는 가장 한결같은 이이기도 했다. 그게 참 신기했다. 감방에서는 약간의 오해를 해서, 계산적으로 잘해주는 것이라 알았어도…….

지금은 그가 진심이란 걸 아니까.

또 항상 진심이었단 것도.

“여름은 좀 신기한 계절이에요, 저한테.”

이전 세상에서 한 해의 시작과 끝은 모두 겨울이었다. 추운 날 호호 김을 불며 한 해를 보내고 종소리와 함께 새해를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는 조금 덥다 싶은 따뜻한 날씨에서 다들 우아하고도 품위 있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뜨거운 태양과 함께 떠오르는 한 해의 시작을 맞이한다.

“그래서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여름은 항상 내게 많은 것이 일어난 계절이었다.

리케도르안을 만난 일, 체이서의 동생임을 알게 된 일, 책 속 여주인공을 탈출하게 한 일…….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까지.

호오를 따진다면 좋지 않음에 가깝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이제 와선 그렇지. 작게 중얼거리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눈을 들면 고요하지만 깊은 시선이 그곳에 있었다. 그래, 항상 진지한 얼굴을 하던 남자였다.

“제게는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담백하게 제 말을 뱉어낸 남자가 손을 뻗었다. 나는 잠시 의아해하다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에스코트 받는 중이었는데, 손도 잡지 않았구나.

이제야 떠올린 건 내가 이쪽에 밝지 않은 탓이다. 이론이야 배워도 저택에 감금당해서 어찌 알겠나. 하나 르나그는 다를 테지. 과연 내 시선의 뜻을 느낀 것인지 그가 멋쩍은 듯이 웃었다.

“긴장한 나머지, 손을 내미는 것도 잊었군요. 무례에 사과드립니다.”

나는 잘게 떨리는 손끝과 손바닥에 맺힌 땀을 모른 척해주었다.

“아니에요.”

줄곧 르나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는 분명 푸딩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3년이나 보았던 만큼 푸딩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먼저 묻지 않았다.

내가 바라지 않으면 묻지 않겠단 듯이.

“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나는 그의 깊은 배려를 언급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르나그도 수호신이 있죠?”

“예.”

그가 끄덕였다.

그럴 터다. 그도 ‘장미’였으니까. 그동안은 굳이 묻지 않던 질문이었다.

그가 내게 묻지 않는 것만큼이나 나도 묻지 않았다. 배려는 아니었다.

“제 수호신이 궁금하십니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를 잡고 있지 않은 손이었다.

곧이어 그 손의 소매에서 스르륵 무언가 기듯이 움직였다.

고개를 내민 것은 ‘뱀’이었다.

“노란 장미, 발테이즈의 수호신은 뱀입니다. 이름은 아줄르라고 합니다.”

이미 한차례 석판에서 보아서 짐작했던 것이지만 생각만 한 것과 새하얀 뱀을 눈앞에서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노란색이 아니네.’

새하얀 색이었다.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르나그와 똑같은 황금색이다.

“아줄르…….”

“예.”

뱀은 반갑다고 인사라도 하듯 날 보며 빠르게 혀를 내밀었다. 속도가 2배는 빨라진 것 같았다.

‘되게 조그맣네.’

생각 이상으로 작았다. 노란 장미의 수호신이 뱀이란 걸 알았을 때 집채만 한 종류를 생각했는데. 아나콘다 같은 것 말이다.

하나 이쪽은 아기 뱀인가 싶을 정도로 작고 앙증맞았다. 머리 모양은 뾰족했으나 눈은 둥글둥글했다. 여러모로 날카로운 인상의 이 남자에게는 어울리는 느낌이 아니었다.

과장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뱀 모양 팔찌인 줄 알았겠다.

“만져보셔도 괜찮습니다.”

“네?”

“아, 물끄러미 보는 것 같으시기에.”

그건 그런데. 머릿속에서는 푸딩이 만지지 말라! 냥냥냥! 아우성이었다. 질투라도 난 모양이다. 하나 나는 싹 무시하고 하얀 뱀을 만져보았다.

‘……매끄러워.’

살살 만져주자, 아줄르는 눈을 감고 살랑살랑 움직였다. 뜻을 몰라 르나그를 쳐다봤다.

“기분이 좋다는군요.”

아. 기분 좋은 거였구나.

“그런데 뱀, 아니 아줄르가 작은 것 같은데 아직 어린 건가요?”

“아니요. 성체입니다.”

각성을 한 상태란 소리였다. 그럼 일부러 작은 형태로 있는 건가?

할 수만 있다면 거대한 독수리가 되는 아퀼라도 심심하면 카나리아 형태를 하곤 했으니까.

“작은 형태를 선호합니다. 맹독을 주입하기에 효율적인 형태니까요.”

……예?

“또한 방심을 유도하고 시도하기에도 효과적이지요.”

아하……. 그런 무시무시한 뜻이.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이고 슬그머니 손을 떼어냈다.

아기 뱀인 줄로만 알았던 짐승에게 독이라니. 영 무서웠으니까.

그러자 르나그가 손을 말아쥐고 살짝 미소했다. 나타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미소였다.

“걱정 마십시오, 이아나 양이 물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요.”

아니, 그래도. 모르는 일이지. 항상 사고는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때. 방심했을 때 일어나는 법이라고.

하나 여기까지 보았는지 르나그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꼬옥 붙잡았다.

미약한 힘이지만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조금 섭섭합니다. 제가 당신을 위험하게 할 리 없지 않습니까.”

상당히 진솔한 얼굴에 나는 그제야 내가 무례할 수도 있었음을 알았다.

“죄송해요.”

“아…… 아뇨. 사과받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르나그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저 저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서…….”

다른 손을 휘휘 저으면서. 손에 휘감긴 뱀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나는 그의 난감한 얼굴을 보다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제가 순간 겁을 먹었지 뭐예요.”

나는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르나그에게 죄송하지만 우리 또한 언제 적이 될지 모르잖아요.”

체이서는 날로 적을 늘리고 있었다. 그만큼 강대해지고 있단 얘기도 되지만 그림자가 짙어진 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물론 르나그가 내게 해준 일을 기억한다. 잊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가 언제까지고 내 편이 되어줄 거란 생각은 안 했다.

“르나그는, 내 상황을 알고 있잖아요?”

그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나와 그의 관계가 체이서의 관여로 어그러질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한다는 거다.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것도요.”

나는 담백하게 이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숨기고 웃어주기엔 이미 그가 많은 것을 주고 해주었다.

“언젠가 우리는 약혼 관계가 아니게 될 수도 있어요.”

체이서의 위험성을 주지시켰다. 똑똑한 남자이니 내가 하는 말을 모르지 않으리라.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에게서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나 그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속이 편하십니까?”

“……상처 주려던 건 아니에요. 언젠가 나와 당신이 의도하지 않은 이유로 파혼할 수도 있다는 얘기.”

“저는 하지 않을 겁니다.”

심각하게 얘기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이런 가능성도 있다,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지나쳤음을 알고 사과하려 했다.

하나 다음 순간 그가 내 말을 막았다.

“좋아합니다, 이아나.”

달빛이 떨어지는 아래, 안경 밑으로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마음이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어찌 반응하면 좋을지 몰랐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따뜻한 손끝이 움직였다.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푸른색으로 물든 시린 달 아래 뜨거운 뺨과 울 듯한 표정을 지은 남자가 말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울지 마세요.”

뭔가 위로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것 같은데…… 적절하게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안경에 물 묻어요.”

기껏해야 나온 위로가 이런 거라니. 최악이구나 싶었다.

-……인간, 너는 위로에 소질이 없다, 냥.

심지어 나보다 훨씬 어린 3살 수호신님마저 타박을 숨기지 않았다.

하나 이런 형편없는 위로에도 그는 작게 웃어주었다. 스치듯 사라지는 미소는 저렇게만 계속 웃어도 날카로움은 덜할 건데. 싶은 생각을 남겼다.

“당신이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란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담담히 인정했다. 그리고 읊조렸다.

“좋아합니다.”

나를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안경을 벗어 가슴 주머니에 접어 집어넣었다.

“……내가 날카로워 무섭단 한 마디에 바로 어울리지도 않는 안경을 쓸 만큼.”

내용에 놀랄 새도 없이 남자가 고개를 숙여 붉힌 채로 이었다.

“사랑합니다.”

씁쓸해서 더욱 달콤한 고백이었다. 공기가 담은 이 달큼함에 질식할 만큼.

“말재주를 배우지 못해……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난감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날카로운 얼굴에 그린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억지로 그린 것처럼 어색했으나 붉음이 묻어나오는 얼굴이었다.

“나는 당신에겐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날것에 가까워진 이 남자의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냉혹과 살벌함을 자아냈다.

“절 농락하고 가지고 놀아도 상관없으니까. 부디.”

하지만 긴 눈매에 담긴 애절함은 무심한 내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저 곁에만 있게 해주십시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침묵한 끝에 겨우 말했다.

“……그렇게 못된 사람은 못 돼요.”

가지고 놀 생각은 없다. 마음이 없을 뿐이지.

내 말을 어찌 알아들은 것인지 날카롭게 벼려진 낯으로 순수한 미소가 피어났다.

“네. 이아나.”

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작고 가녀린 개나리꽃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미소였다.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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