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 거야.”
다음 날 오후, 체이서가 내게 돌려준 대답은 이러했다. 놀랄 수밖에 없는 답변이었다. 나는 치수를 재다 말고 등을 돌렸다. 막 줄자를 두르던 이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정말 가?”
“응.”
체이서는 멀지 않은 소파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어깨에는 털을 두른 제복을 편하게 얹고 있었는데, 오늘도 잘나빠진 실루엣이었다.
눈요기로는 참 좋은데 말이지.
알맹이가 글렀다는 생각을 다시 하며, 체이서의 말에 집중했다.
“황제 폐하께서 전 귀족의 참여를 명하셔서. 어쩔 수가 없네.”
체이서는 드물게도 곤란하다는 음색을 드러냈다. 평소처럼 과장해서 꾸민 것이 아닌 진심으로 곤란하다는 기색이었다.
“특히 우리 집안을 콕 집어 말씀하셨거든.”
흡사 물어달라는 듯한 말에 나는 얌전히 질문했다.
“뭐라고 하셨는데?”
“그대의 집에 고귀한 보석은 언제 꺼낼 것인가.”
황제가?
어떤 분인지 몰라도 왜 그런 말을 했나 싶었다. 책 속에서 그녀는 잠시 등장하고 사라지는 인물이었다. 하나 등장은 없는 대신 황제와 그녀의 티아라에 관련한 에피소드가 길게 등장했던 기억이 있었다.
아마 프란시아와 리케도르안, 체이서가 모두 엮인 이야기였지?
“참 우습지.”
체이서는 턱을 매만지며 붉은 눈에 차차 웃음기를 지웠다.
“널 겨우 보석 따위에 비교하다니.”
입술만 끌어올린 채 나를 향했다.
“황제 폐하라 하셔도 나를 강제할 수는 없는데 말이야.”
“그래도 들을 거잖아?”
“그렇지.”
체이서가 웃는 채로 수긍했다. 아직은 황실의 심기를 거스를 때가 아니다,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이 일로 황실이 붉은 장미 손을 들어주면 곤란해서 말이야.”
체이서의 진솔한 이유에 나는 움찔했다. 붉은 장미를 듣는 순간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되면 도뮬릿을 노릴 검이 더욱 많아지고…….”
이리되면 위험한 것은 나였다. 약한 이를 먼저 노릴 테니까.
“왜, 가기 싫어?”
체이서는 나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생각 없는데.”
하나 그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오히려 달콤하게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난 널 보내기 싫은데.”
황홀할 정도로 아찔한 음색이 귀에서 녹아내렸다.
“혹시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건, 아니고?”
떠보는 것이 다분한, 아니 의도를 숨기지 않은 말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없어.”
진심이었다. 리케도르안을 떠올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솔직히 쉬르멜라의 일로 알았다. 이쪽과 저쪽은 상상 그 이상의 상극,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라는 걸.
거기다 내 유일한 목적이었던 푸딩도 내게 돌아왔다. 더는 리케도르안과 부딪칠 일은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말이지.
나는 가슴을 살짝 쓸어내렸다. 체이서의 시선을 의식해 그저 의미 없는 동작인 척 손을 내렸다. 체이서는 웃으며 그래? 하고 한마디 하고 말았을 뿐 더는 묻지 않았다.
“그래서 옷을 맞추는 거였어?”
“겸사겸사지.”
나는 질린 듯이 옷감을 바라봤다. 산더미같이 쌓인 것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걸 어느 세월에 다 볼 건데.
“……집에 옷이 넘쳐.”
넘친다. 정말 넘친다. 넘치다 못해 흘러내린다.
더구나 나는 화려한 드레스는 입지도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저택에서만 생활하는데 입을 일 있겠어? 그 덕에 맞춰둔 옷은 옷장에 굴러다니고 있을 거다.
“오래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너는 치수만 재고 돌아가도 돼.”
듣던 중 반가운 얘기였다. 다만 그 치수도 필요 없어서 그렇지.
“치수도 재지 않아도 될걸.”
눈으로 딱 봐도 변한 게 없는데 무슨 변화가 있을 거라고. 한데 체이서는 이 말엔 부정의 제스처를 보였다. 오히려 성큼 걸어와서는 보여주겠다며 내 손끝을 잡아 올려 손목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이전보다 조금 살이 붙었어.”
“그래?”
난 무심히 내 손목을 응시했다. ……잘 모르겠는데?
혹시 몰라 푸딩에게 물었다.
‘나 살쪘어?’
-인간, 인간은 너 같은 인간을 두고 살이 쪘다고 하나, 냥?
‘아니. 변한 게 있냐고.’
-……변화? 이 몸은 모르겠다, 냥.
뒤쪽에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의아해하는 기색이 다분하게 느껴졌다.
3년간 한시도 빼놓지 않고 붙어 다닌 짐승 쪽도 모른다는데.
하나 하녀들이 치수를 재고, 나온 수치를 들어보니 조금 늘긴 했단다. 표현하자면 엄지 마디의 1/3쯤? 듣기론 사람의 몸에 변화를 보이려면 최소 2kg은 쪄야 보인댔다.
나는 황당했다.
‘아니, 이걸 어떻게 알아차리냐고.’
체이서는 싱글벙글했다. 내 말이 맞지? 이렇게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이런 걸 어떻게 알아?”
“세심함이지.”
세심함은 얼어 죽을. 나는 속으로 차게 중얼거리며 미친 인간의 업적이 하나 더 늘어났구나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 감사한 일이기도 한 건지. 조금 고민되기도 하네.”
“갑자기 왜?”
“만천하에 자랑할 기회를 주셨으니까?”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참, 이렇게만 보면 얼빠진 여동생 처돌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아니, 저 능글함을 가장한 아래 어떤 미친 인간이 있는지 아니까.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거지.
“아가씨, 어떤 드레스가 좋으세요?”
내가 있을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취향은 필요한 건지, 하녀들이 나를 둘러싸고 질문을 했다.
개중 이 질문을 한 사람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베로니카였지?’
얼마 전 장례식 날 내게 말을 걸었던 하녀이자, 쉬르멜라에서 이름을 빌렸던 이이기도 했다.
“편한 거.”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그럼 색은…….”
“편한 거.”
“……어, 모양은…….”
“아주 편한 거.”
“장식이나 레이스에 대한 의견은…….”
“으음…… 편한 거?”
베로니카가 일순 곤란한 얼굴을 했다. 미안해. 근데 정말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저택의 편한 생활에 길들여진 것이 틀림없다. 족쇄를 제외하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생활이니.
“……그냥 나도 오빠가 입는 것 같은 거 입으면 안 돼?”
“나?”
“제복 바지 하나 줘.”
“흐음,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제복은 기사만 입을 수 있어, 이아나.”
“그래?”
“뭣하면 이번에 건의라도 해볼까? 영애들의 제복…….”
“됐어.”
체이서는 기사는 아니었지만 기사 작위를 포함하는 작위인 공작이었다. 그래서 본인은 된다는 건데.
결국 나는 최대한 타협을 보았다.
“그럼 이렇게나, 슈미즈 형태로 잡아보겠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나올 드레스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왔던 줄리엣의 드레스 같을 듯했다. 시안이 그렇게 생겼더라고. 옆에서 나를 시중 들던 베로니카는 정중하면서도 가끔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보였다.
나는 그녀를 빤히 관찰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오빠.”
나는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족쇄 좀 풀어줘.”
그 순간 방안에는 쥐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숨을 삼키는 이도 있었다.
“왜?”
체이서는 느릿하게 반문했다.
“시선을 너무 끌어. 이걸 쳐다보는 시선은 그만 보고 싶거든.”
그러자 체이서의 얼굴로 잠시지만 묘한 표정이 스쳤다. 무어라 하나라고 짚어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차라리 다른 거로 바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제안했다. 체이서가 감시를 그만둘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어차피 황성 연회에 가잖아.”
체이서는 잠깐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체이서는 다정하지만 조금은 이질적인 눈으로 나를 담았다.
“이아나도 시선을 끄는 걸 좋아하지 않는구나.”
……도? 별일이었다. 그럼 본인도 시선 끄는 건 좋아하지 않는단 건가. 저렇게 생겨서? 나는 족쇄에 대한 이야기가 흔쾌히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다른 한구석으로는 찝찝했다.
<……인간, 너는 외로워했잖아.>
베로니카라거나 푸딩이, 보였던 시선들. 나는 정말로 괜찮은데. 어째서 그렇게 보는 걸까. 한편으로는 황성 연회에 가는 일이 기쁘기도 묘하기도 했다.
왜, 당신과 멀어지려 하면 다시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까.
그렇게 드레스를 맞춘 날이 저물었다.
그날 밤.
방으로 돌아온 나는 피곤함에 침대에 몸을 푹 누웠다. 물러나도 된다고 하더니만 결국 고르다 시간이 다 지나갔다.
무슨 치와와인 양 바라보는 하녀들의 울망울망 눈을 외면할 수가 있어야지. 그녀들은 체이서와 남기는 죽어도 부담스러웠는지, 체이서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을 때마다 애타는 시선을 보내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지금이었다.
푸딩이 앞발로 나를 톡톡 쳤다. 귀찮아서 그냥 뒀더니, 이번엔 꾹 눌렀다.
-이, 인간, 죽었냐! 냥!
“안 죽었어…….”
그러자 푸딩은 안심한 건지 발에 힘을 빼더니 이번엔 양 앞발로 꾹꾹이를 시작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 안마 같지도 않은 앙증맞은 안마는 뭐람. 그렇게 웃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웬 짐을 잔뜩 가져온 체이서였다.
“이 시간엔 어쩐 일이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체이서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나타났기에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저게 뭐지?’
그는 방 한구석에 짐을 내려놓더니, 이내 상자를 펼쳤다. 내게 보여주려는 의도 같았다. 상자 하나에는 별다른 것이 들어 있지 않았다. 고작해야 타다만 액자 틀과 양피지 몇 개, 칠판으로 보이는 것뿐이었다.
“저게 뭐야?”
“……네가 오래전에 쓰던 물건.”
체이서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오래전에 쓰던 물건? 이상하네. 오래전이라고 해봐야…….
“혹시 캄브라캄에 가기 전에?”
“응, 맞아.”
아니, 그걸 왜 지금 줘? 남아 있기는 했어?
“그걸 왜 주는 건데?”
갑작스럽게 나타나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했다. 이 넓디넓은 방에서 머리에 들어온 건 상자 속 물건들과 의문뿐이었다.
“……불에 탔다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분명 과거에 내게 그렇게 말했잖아?
<이전의 물건이 전부 타 버려서, 새로 가져오게 했어.>
<응. 살던 곳에 불이 나서.>
그렇게 말했던 물건들이 왜 남아 있는 건지. 있었다면 왜 이제야 주는 건지. 체이서가 묘한 얼굴을 했다.
<불이 왜 나?>
<그러게.>
<세상엔 이상한 사람이 너무 많아.>
대답하지 않는 그를 보며 의문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절대 대답을 유보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능글맞게 말을 돌리면 돌렸지, 이런 식으로 어색할 정도로 침묵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그만…… 알려줘도 될 것 같아서?”
뭐를? 다시 이어진 그의 침묵에 공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그의 표정은 극적이었다. 광기 어린 표정을 하다가도 서글픈 얼굴을 했고, 씁쓸한 미소도 스쳐 지나갔다.
-인간, 흑장미가 이상하다, 냥.
조용히 있던 푸딩마저도 슬쩍 끼어들어 한마디를 할 정도였다.
“뭘 알려주는데?”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크게 심경 변화를 맞이한 사람 같달지.
“사실 있잖아…….”
체이서와 심경 변화라니,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이었다. 차라리 푸딩이 내일 당장 훌륭한 독수리가 된다는 말이 더 믿겨지겠다.
그러나 체이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달싹임에서 끝이었다.
“아니다, 쉬어. 이아나.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
그는 멋대로 말을 꺼내고, 망설이고, 판단하고는 휙 나가버렸다. 나가기 직전 한마디를 남기고.
“남은 물건들은 모두 검사를 거쳤어. 어떤 마법적 흔적도, 독도, 함정도 없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어째서 나가는 뒷모습이 씁쓸해 보였던 것인지.
그를 본 4년 동안 가장 담백한 퇴장이었다.
-흑장미가 많이 이상하다, 냥.
“그러게……. 배탈이라도 났나.”
괜히 엉뚱한 소리로 말을 돌리지 않으면, 체이서가 남긴 무거운 공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뭐야. 괜히 분위기만 잡고 나가버리기는.
시선이 그가 남긴 상자에 머물렀다. 일단 이걸 들여다보자 싶어 쪼그려 앉았다. 상자 안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물건이 거의 없었다. 개중에 눈에 띄던 것을 잡았다.
-인간, 그것이 뭐냐, 냥?
“글쎄……. 칠판?”
여기서도 칠판이라 표현하려나.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조그만 칠판이었다.
‘분필은 보이지 않는데.’
칠판 하나뿐인가? 나는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았다. 칠판의 뒤편에는 직접 그린 것인지 삐뚤빼뚤한 그림이 있었다. 모양을 자세히 보니 모양의 장미인 것 같다. 그 옆으로는 움푹 패인 홈도 있었다. 손가락을 넣어보니 딱 들어맞았다.
푸른 색깔이네.
이아나 로즈 도뮬릿.
이전의 이아나가 가졌던 거라더니. ‘이아나’는 악필인 듯 엉성한 글씨체가 보였다. 정갈한 필체를 가진 체이서와는 대조적이었다. 흠, 공부할 때 쓰기라도 한 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내려놓았을 때였다.
-인간, 그거 조금 이상한 것 같다, 냥.
“뭐가? 이거 체이서가 아무런 마법 흔적이 없댔는데? 설마, 독이라거나.”
-아니 그게 아니라…….
푸딩이 앞발로 나를 쳤다.
-글씨가 나타나고 있다, 냥.
뭐? 나는 급히 칠판을 다시 바라봤다. 과연 푸딩의 말처럼 칠판에는 희미한 빛이 일며 못 보던 글씨가 있었다.
아니, 적히고 있었다.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이름을 적은 글씨와 같은 글체였다. 악필이었지만 알아보기 어렵지는 않았다.
「그저 단순한 내 기록일 뿐이야.」
……이게 뭐야.
나도 모르게 푸딩을 바라봤다. 조그만 고양이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 인간. 여기서 기묘한 힘이 느껴진다 냥.
“묘한 힘?”
-이상하다……. 흑장미가 있었을 때는 전혀 못 느꼈는데 냥. 이건, 장미의 힘이다.
그렇게 말하는 푸딩도 제 말에는 자신이 없어 보였다.
“……장미의 힘이라니. 체이서 건가?”
아닌데, 그는 ‘이아나’의 물건이라고 했는데…….
-흑장미의 힘이 아니야. 전혀 달라.
“뭐?”
놀란 나머지 손이 미끄러졌다. 손가락이 톡, 칠판을 쳤다.
「이건 아무도 못 보게 숨겨둘 거야.」
어라. 글씨가 지워지고 새로운 것이 쓰인다. 마치 이전 세계의 터치 패드라도 되듯이.
“뭐야, 이게…….”
나는 시험하듯 다시 눌러 보았다. 글씨가 끝난 시점에 또 툭 두드렸더니, 다른 글씨가 쓰였다.
「오빠도 보지 못하게. 아니, 오빠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상관없나? 알아줬으면 좋겠어. 오빠 보고 있어? 나는 오빠를 사랑했으니까. 비록 오빠는 그렇지 않았지만.」
사각사각 쓰이는 필체를 제외하면 정말로 이전 세계의 터치스크린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오빠는 왜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지? 우린 남인데.」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사실들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당신이 보리라 믿어. 그러니 내가 살아온 삶에서 사실만 추려낸 것.」
……내가 정말 이걸 봐도 되는 걸까?
참 이상하지. 이것의 주인인 ‘이아나’는 분명 체이서를 언급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도리어 체이서가 읽기 바라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체이서는 어째서 이걸 내게 준 걸까? 그것도 오만하던 성정에 맞지 않게, 그토록 망설이던 얼굴로.
나는 망설이다가, 다시 한번 칠판을 두드렸다.
「나는 이아나 로즈 도뮬릿. 하지만 입양아야. 피가 섞이지 않았단 얘기지만. 모두가 날 필요로 했어.」
이윽고 나온 글씨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나는 푸른 장미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