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36)화 (136/148)

136화. 광대의 마지막(9)


 

황성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이미 기사들 또한 카를로스와 황제의 대화부터, 안젤라의 연설과 에르젠타샤의 기적을 듣고 본 뒤였다. 그 때문에 길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성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은 그들을 기만한 황태자와 황제를 찾기 위하여 우르르 흩어졌다.

시녀와 시종조차 도망갔거나, 도리어 성난 군중에 감화되어 그들과 함께했다.

고귀한 자들만 밟을 수 있다던 황실의 새하얀 대리석은 흙 묻은 신발들에 의해 금세 더러워졌다.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무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베릴, 어디 가요?”

안젤라가 의아한 얼굴로 베를리아를 붙잡았다. 베를리아가 목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속닥였다.

“카를로스는 여기 없을 거예요. 그 자존심 강한 인간이 군중들에게 때려 맞을 생각 따위 없을 테니까.”

베를리아는 카를로스를 너무 증오했다. 그래서 너무 잘 알았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녀와요. 조심하고요.”

안젤라가 베를리아의 팔을 놓으며 마주 속삭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베를리아가 향한 곳은, 황성의 안쪽이 아닌 그 밖이었다.

***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가 서늘함이 감도는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중앙 신전의 대기도실이었다.

평소에는 개방되지 않지만, 황족이나 귀족들이 거액의 돈을 내면 특별히 열어 주고는 하는 곳이라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나 거기에 카를로스가 있었다.

“왜, 왜 대답을 하지 않지?”

카를로스는 베를리아가 온 것조차 모르는 것처럼 에를니아의 조각상만을 바라봤다.

그의 마지막 희망이 오직 에를니아뿐이었기 때문이리라.

“끝났어, 포기해.”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로 다가갔다. 조용하고 싸늘한 공간 안에 오직 그녀의 발걸음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베를리아는 온기 하나 없는 그곳이 그의 마지막으로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삶에서 자신이 감옥에 머무르다 단두대에서 죽었듯이, 카를로스 또한 이 싸늘한 공간에서 몰락하고 군중의 적의 앞에 돌을 맞아 죽게 될 터였다.

“대답해, 에를니아!”

쾅!

카를로스가 제단을 내리쳤다. 이미 직전에도 그런 행동을 몇 번이나 했던지, 웬만하면 다치지 않을 그의 손이 피투성이였다.

물론 그런 것을 본다고 해서 베를리아의 안에서 안타까움 따위가 피어오르지는 않았지만.

베를리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카를로스가 하는 양을 말리지도 않고 지켜봤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마치 태생이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부턴가 늘 고고하게만 굴던 그가 저토록 밑바닥으로 치닫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에를니아가 대답할 일은 없었다.

에를니아는 완전히 부서져 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의 믿음은 사라지고, 이제 봉인에서 깨어날 다른 신들은 에를니아를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너 때문이야.”

그리고 결국 에를니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그만둔 카를로스가 휙 돌아서 베를리아를 보며 말했다. 또, 그녀의 탓이었다.

“맞아, 나 때문이야.”

그러나 베를리아는 억울해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그녀의 탓이지 않던가. 드디어, 마침내.

“너 하나 바닥으로 끌어 내리려고 내가 참 애썼지.”

자신이 처음 이 세계로 돌아왔을 때, 카를로스 에덴버와의 관계가 이토록 오래 가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나는 너를 금방 무너트릴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너는 나를 언제든 네 멋대로 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어떻게 보면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그 오만함이.

“카를로스, 나는 너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는데 그러면 내가 너 홀로 괜찮도록 둘 줄 알았어?”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카를로스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가 이미 지나온 베를리아의 삶들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대단히 뻔뻔한 말이었다.

“너 때문에 나는 죽을 뻔했고, 내가 아끼는 사람이 죽었어. 그뿐이야? 그 전에도 너는 계속 나를 이용하고 소유물처럼 다뤘어. 그런데도 잘못한 게 없다고?”

그게 완벽히 카를로스다워서, 베를리아는 순간 울컥했다. 어차피 이렇게 따지고 드는 것은 괜한 말씨름밖에 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래서 내가 보상해 준다고 했잖나, 황후가 되게 해 주겠다고….”

“제발!”

숨이 턱 막혔다. 베를리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카를로스와의 대화는 기본적으로 분노를 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히 고통스러웠다.

“나는 네가 주는 것들이 안 행복하다잖아! 싫다잖아!”

울컥 감정이 밀려들었다. 대체 나는 너한테 뭐였길래, 내가 하는 말은 너에게 단 하나도 제대로 닿질 않는 건지. 나의 분노도, 나의 절망도, 나의 비명도 모두 벽에 막혀 돌아온다. 끔찍했다.

그것은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아주 증오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그 새까만 감정 덩어리는 전부 그녀가 그간 쌓아 온 고통이었으니까.

“대체 너는 이 상황까지 와서도 내게 미안하다고 말할 생각이 없어?”

베를리아가 따지듯 말했다. 사과한다고 용서할 것도 아니었고, 카를로스가 미안하다고 한들 그게 진심이리라고 생각되지도 않을 터였다.

그냥, 차라리 카를로스가 살려달라고 빌면 그게 훨씬 기분이 나을 것 같았다. 늘 그래왔고 두 번째 삶에서 가장 최악이었던 것처럼, 멋대로 판단하여 자신을 휘두르려 들 게 아니라.

“…나는 네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해 주겠다고 하는 거야.”

카를로스는 마지막까지도 뻔뻔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을 이었다. 베를리아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울컥해서 저딴 놈과 대화를 나눠 보려고 한 스스로가 아주 멍청하게 느껴졌다.

“역시 너 같은 건 살려 두지 말아야 하나 봐.”

베를리아는 생각을 바꾸었다.

군중에게 돌이 맞아죽는 것도 괜찮았지만, 이곳에서 홀로 죽게 해 그 시체를 황무지에 던져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그만큼이나 카를로스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싫었다. 증오스러웠다.

베를리아가 에르젠타샤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얼굴 위로 곧바로 붉은 낙인이 타올랐다.

에르젠타샤와 메리쉬가 베를리아에게 힘이 다 사라졌다고 했으나, 그녀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베를리아는 어떤 방식으로든 제 손으로 직접 카를로스를 처단하고 싶었다.

그래서 방법을 갈구하던 와중에 에르젠타샤의 힘이 여전히 몸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죽어,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의 손으로부터 무형의 기운이 찰나에 카를로스에게로 훅 날아갔다. 그가 이를 악물며 검으로 그것을 쳐냈다.

그러나 카를로스의 행동은 별다른 의미 없이, 그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쿵!

베를리아가 울컥 피를 토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담담히 소매로 그 피를 훔쳤다.

에르젠타샤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사력을 다했다. 그러니 카를로스가 신의 힘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베를리아가 차분한 걸음으로 카를로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그 짧은 거리를 가는 동안 수도 없이 생각했다.

목을 베어 죽일까, 졸라 죽일까.

맞아 죽게 할까, 사지가 잘려 죽게 할까.

카를로스에게는 애석하게도 베를리아는 뒷골목 출신이었고 사람을 죽이기 위한 온갖 방법을 알고 있었다.

베를리아의 힘이 카를로스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콱 바닥에 짓눌러 고정시켰다.

“안 돼요, 베릴!”

그 순간 메리쉬가 끼어들어 막아서지만 않았더라면, 베를리아는 어떤 방법으로든 카를로스를 잔인하게 죽였을 터였다.

“…멜, 왜?”

베를리아가 자신을 막은 메리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 또한 카를로스에게 원한이 많을 터였다. 그런데 왜 자신을 막는가.

“…너 어디 있었어?”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베를리아는 뒤늦게 깨달았다. 메리쉬가 황성의 문이 강제로 열리고 그 안으로 들어선 때부터 자신의 주변에서 보이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먼저 이 신전에 와 있었어요.”

베를리아가 움찔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오면 될 것을 왝 굳이 먼저 앞질러 갔던가.

“그러니까 왜?”

“당신이 카를로스 에덴버를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요.”

곧바로 베를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상대가 메리쉬라도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비켜. 카를로스는 살아남아서는 안 돼.”

베를리아는 자신이 카를로스를 일찍이 죽이지 않았기에 불러왔던 결과들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녀는 또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말 들어요, 당신 지금 위태롭잖아요!”

베를리아가 멈칫했다. 애써 숨기고 있던 자신의 몸 상태를 메리쉬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그녀가 그를 쳐다봤다.

“당신에게 아직 남은 저주를 저놈한테 옮겨놔야 해요, 그래야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길게 살 수 있다고요. 그러려면 저놈이 죽어서는 안 되는 거 알잖아요.”

메리쉬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그사이에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죽일까 봐 다급했다.

“에를니아는 부활한 신들이 막는다고 했어요. 에를니아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패배한 카를로스 에덴버는 당신에게 아무 위협도 되지 않아요.”

그러나 잠시 침묵하던 베를리아는 메리쉬가 전혀 원하지 않던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카를로스 에덴버가 이 땅 위에서 숨 쉬고 사는 걸 견딜 수가 없어. 사라졌으면 좋겠어, 마지막이 더없이 비참했으면 좋겠어. 살아 있으면 결국 언젠가 나아질지도 모르지. 난 그게 싫어. 가장 비참한 때에 죽게 만들 거야.”

살아 있다는 건 어쨌든 미래가 있다는 소리였다. 베를리아는 그 미래의 한 줌조차도 카를로스에게 용납할 수 없었다.

울컥. 그 순간 베를리아가 피를 토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속을 태우는 고통으로 인해 더는 참을 수 없던 것이다.

그것을 본 메리쉬가 얼굴을 굳히더니 돌연 이상한 말을 꺼냈다.

“만약 베릴이 카를로스 에덴버를 죽인다면… 나도 죽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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