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광대의 마지막(8)
황실 보고에는 무수한 보물들과 성물들이 있었고, 아무리 황제나 황태자라고 한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전부 기억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황제를 이용했다. 황실의 보고에 있는 물건들에 관한 기록서는 너무나 두꺼웠고 그녀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자신이 바라는 보물이나 성물이 있는지 황제를 통해 확인하기로 했다.
카를로스의 계획을 어그러트려놓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베를리아가 황제를 찾아가 그의 폐위 사실을 대륙에 공표해 달라고 한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베를리아의 바람대로 황제는 성물을 사용해 대륙 전역에 말을 전했다. 황제가 이용한 성물의 생김새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황제가 카를로스의 폐위 사실을 대륙에 알린 뒤, 그녀는 그 성물을 빼돌렸다.
그리고 그것을 이전에 자신과 카를로스 사이에서 쓰던 아티팩트 형태로 가공하여 그에게 넘겼다.
어차피 성물의 본질은 신력이 응축된 보석에 있었으므로 외형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게, 죽이질 그랬어. 초대 황제도 그 많은 신녀를 죽여 이 자리를 가졌고, 3대 황제도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기어코 다른 나라를 모두 쓸어버린 후 에덴버를 유일무이한 제국으로 만들었는데 나라고 해서 아비 하나 못 죽일까.”
그리고 마침내 황제의 입에서 에를니아의 이름이 나오고, 카를로스가 그간 에덴버의 만행들을 들먹였을 때… 베를리아는 참지 못하고 크게 웃고 말았다.
“하하… 아하하하!”
당신들이라면 온갖 남 탓을 해가며 서로를 상처 입히리라 생각했다. 그 신에 그 아비에 그 아들이었으니까.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의 말대로 기사들을 치워 놓은 것 또한, 애초에 이를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애먼 이가 자신의 계획을 망가트리면 안 되지 않은가.
두 번째 삶에서 확인했듯이, 카를로스는 역시 에덴버와 에를니아가 품은 진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고대 신전이 아직까지도 버젓이 존재하고 그것이 매년 사람이 드나드는 성지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도 에덴버의 긴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그곳이 발각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황실이 은폐했음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았다. 황태자가 아는 사실을 황제가 모를 리 없었다.
베를리아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삶 모두 실패했으나, 그 실패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웠다. 아주 비싼 값을 치러가며.
그러니 그 배움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다고,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는 광기에 차 홀로 외쳤다. 희열이 몸 안을 가득 채워 내뱉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다.
에덴버의 핏줄은 신의 고귀한 대리자가 아니라, 제 신을 부흥시키기 위한 학살자였다. 그 사실이 드러난 순간 에덴버의 성을 단 자들은 그들이 대륙을 지배해 오던 모든 명분을 잃었다.
명분뿐이랴? 카를로스가 성전에 대한 진실까지도 언급해 준 덕에 이제 대륙의 누구도 그 핏줄을 믿지 못할 터였다.
다른 세계에 가 다른 사람이 되어서도 채 잊지 못한 증오를 품고 있던 남자가 몰락했다.
베를리아가 그 몰락을 두 눈에 담기 위하여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릴, 마차를 준비해 뒀어요.”
그리고 때마침 메리쉬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베를리아가 곧바로 황궁으로 갈 것을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은 뒤였다.
“같이 가자, 멜.”
베를리아가 메리쉬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제는 그가 메리쉬라는 사실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그 편이 카를로스를 더 불행하게 할 터였다.
두 사람이 함께 마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당연히 황궁이었다.
***
황궁 앞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수도의 귀족들은 물론 평민들까지도 죄다 그곳으로 몰려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리들턴 백작.”
그 사람들 틈에서 아를레나 공작이 베를리아에게로 다가왔다.
“알고 있었나?”
에덴버에 관한 진실. 그것을 묻는 것이었다.
베를리아를 향한 아를레나 공작의 낯은 어느 때보다 굳어 있었다.
“에덴버가 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베를리아는 단호히 말했다. 아를레나 공작이 저렇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았다.
귀족파라고 해서 황실이 망하든 말든 상관없는 게 아니었다. 귀족들이 귀족일 수 있는 이유는 나라가 건재할 때의 이야기였으니까.
“예를 들어 새로운 신의 대리자가 나타난다면요?”
“설마 새로운 신의 대리자라고 해서 황실을 무조건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를레나 공작의 반박은 타당했다.
그간 역사 속에서 에를니아가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제 딸이며 아들이라고 하여 만든 이가 몇이던가.
신의 대리자라고 해서 무조건 황제가 되고 나라를 세웠다면, 이 대륙상에 에덴버만이 제국으로 존재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악신과 사람들을 농락한 거짓된 황실을 처단한, 또 다른 신의 대리자라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 말과 함께 베를리아가 앞으로 척척 걸어 나갔다.
“어, 어…?”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게 베를리아를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녀의 걸음을 따라 사람들이 부드럽게 옆으로 밀려났다. 마치 자의로 물러난 것처럼.
베를리아가 가장 맨 앞에 섰을 때, 처음부터 그곳에 길이 있었던 듯이 사람들 사이로 틈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안젤라가 긴장된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아를레나 공작은 드물게 놀란 얼굴을 했다. 비단 놀란 것은 그녀뿐이 아니었다. 모두가 이곳에 안젤라가 등장할 줄 몰랐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럴 법도 했다. 카를로스의 연인이던 안젤라는 이렇게 나설 사람이 아니었다.
“저는 악신 에를니아와 황실 에덴버의 악행을 고발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안젤라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를레나 공작이 저 아래에서 베를리아를 쳐다봤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베를리아는 웃었다.
리들턴의 악명은 에덴버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드높았다. 그런 이들이 대륙의 유일신과 제국 황실의 잘못을 말한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이 누명을 썼다고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성녀인 안젤라가 말하면 달라진다.
한때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하나, 어쨌든 그녀는 자신이 아는 낮은 곳들까지도 기꺼이 손을 뻗던 사람이었다. 그 자애로움과 상냥함을 에덴버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경애했다.
건국일 등에 종종 행차했기 때문에 최소한 수도의 백성들은 황제와 황태자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알았다. 그 둘의 목소리로 직접 진실이 밝혀졌고 성녀가 그게 사실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의심하는 사람이 도리어 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번 성지 순례에서 또 다른 신을 모시던 고대 신전을 발견했고.”
안젤라가 그 말을 하자 그녀의 뒤로 에르젠타샤가 나타났다. 그 순간 새까만 기운이 뭉쳐져 눈처럼 대륙 전역에 내렸다.
사람들에게서 놀라움의 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 자리에 있던 병자들의 병이 모두 나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썩어가던 고목은 다시 파릇파릇하게 살아나고 시들어가던 꽃 또한 활짝 피었다. 더러워진 물은 정화되었다.
대륙 전역에 힘이 작용했음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충분했다. 그들의 눈이 닿는 곳마다 축복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신성력을 사용하던 신관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검은 기운이라니. 신관들이 사용하는 새하얀 신성력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봐도 축복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그곳에서 에를니아에 의해 다른 신들이 봉인 당했다는 것과 에덴버 황실이 그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 알게 되었습니다. 리들턴 백작님께서는 저를 도우려다가 폐태자에 의해 누명을 쓰기까지 하셨지요.”
안젤라의 말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불현듯 나타난 ‘신’의 형상을 한 빛무리와 그녀를 홀린 것처럼 넋을 놓고 바라봤다.
리들턴 백작이 누명을 썼다. 그간 수도 없이 들어왔던 베를리아의 악행상 평소였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 안젤라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저는 고합니다. 태초의 신이자 질서와 무질서의 신 에르젠타샤 님의 이름으로 부패한 황실과 악신 에덴버에게 벌을 내리겠습니다.”
안젤라의 옆으로 메리쉬가 나타났다. 성검 속 영혼들의 봉인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성검은 새하얗게 빛나지 않았다. 검은 오색 빛으로 찬란하게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선의 신 미누엘라, 자연의 신 엔테아, 사랑의 신 르누미아, 하늘의 신 디히스트, 달의 신 리드로턴의 이름에 맹세컨대 신전은 성녀 안젤라 님과 뜻을 함께할 것이다.”
메리쉬가 선언했다.
광휘로 둘러싸인 검.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소문으로만 듣던 성검의 주인임을 빠르게 깨달았다.
“와아아아!”
누군가에게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 주변부터 시작하여 모든 이가 안젤라와 에르젠타샤의 이름을 외쳤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말할수록 에르젠타샤의 형상은 점차 뚜렷해졌고 땅 위로 내리는 축복은 선명해졌다. 그 축복을 받은 모든 이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성녀님과 에르젠타샤 님께 승리를!”
누군가 다시 소리쳤다.
그에 선동당한 사람들이 방금 멀쩡해진 굵은 고목을 베고, 그것을 다 같이 들어 성문에 들이받았다.
그리고 평소라면 마법에 의해 그런 공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을 성문이 쿠궁, 소리를 내며 이음새에 금이 갔다. 리암이 틈을 타 몰래 황성 안의 마법을 해지해 놓은 덕이었다.
자신들이 직접 낸 성과에 민심은 더욱 술렁였다. 그들 중 맨 앞에 있던 이가 안젤라에게로 다가왔다.
“가시지요, 성녀님.”
“감사합니다.”
안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를리아가 마치 성녀를 모시듯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전 같았으면 그녀를 두려워했을 백성들은 도리어 베를리아에게까지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에를니아는 끝내 나타나지 못했다. 에를니아를 향한 사람들의 믿음은 처참히 깨어졌다.
게다가 에를니아는 지나친 욕심으로 과도한 힘을 소모했다. 드디어 에를니아의 수작 또한 완전히 끝이 난 것이다.
베를리아는 비로소 신이 만든 무대에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