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단편적 진실(8)
회의장으로 가는 내내 감도는 분위기가 살벌했다. 지난날, 베를리아가 황태자를 원망하며 모든 중앙 위원들이 있는 회의장 한가운데에서 쓰러졌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생리란 늘 아이러니했다. 그중에 가장 흔한 법칙 하나가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점이었다.
베를리아가 황태자의 편을 든다면 그녀는 귀족들의 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카를로스를 적대한다면, 그녀는 작위를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엄연히 말해 귀족의 편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귀족인 베를리아가, 직전에 접촉한 사람은 황태자일 뿐인데 갑자기 쓰러졌다. 귀족들은 황태자가 베를리아를 또 다시 이용해 먹었다고 생각했다. 그건 베를리아가 굳이 황태자와 짜고 친 것이 아니라면 귀족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아무리 황태자라 할지라도 그런식으로 귀족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었다.
“리들턴 백작, 몸은 괜찮아진 건가?”
아를레나 공작이 다가와 물었다. 베를리아는 늘 황태자의 개요, 가장 커다란 무기였다. 그렇기에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은 자신의 몸 상태를 철저히 숨겼다. 그러니 귀족들로서는 더욱 여태까지 멀쩡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그녀를 두고 황태자가 수작질을 했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베를리아가 마차에서 마셨던 붉은 액체는 로디메일런으로 만든 약이었다. 로디메일런은 네멘 리들턴이 직접 품종을 만들어낸 것으로 베를리아처럼 흑마법으로 몸이 개조된 이들에게만 통하는 약초였다. 물론 네멘의 성정상 실험체들의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한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로디메일런은 네멘 리들턴의 실험체들을 강제로 잠재우기 위한 약이었으니까.
로디메일런의 약 기운을 흑마법으로 몰아내려고 하면 회의장에서의 베를리아처럼 그것이 역류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러나 흑마법사라고는 베를리아뿐인 이 세상에서 그녀의 자작극임을 누가 알겠는가.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를레나 공작님. 그저…… 조금 당혹스러웠던 것 빼고는 나아졌습니다.”
베를리아가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흡사 카를로스에게 당한 무고한 피해자 같았다. 그러나 지난날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이 누구의 소행인지는 일부러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였다. 아를레나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가 아닌 척 미소했다. 사실 진실이 어떻건 베를리아나 공작이나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사냥감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다만 공작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베를리아가 황태자의 편으로 다시 붙었냐 아니냐일 터였다.
베를리아가 황태자를 위했더라면 카를로스가 그녀를 위협했다는 식으로 도는 소문을 좌시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베릴.”
회의장으로 오던 카를로스가 우뚝 멈춰 섰다. 베를리아와 그의 시선이 교차했다. 카를로스는 그녀를 대가로 성검을 거래했다. 그것을 그도 알고 베를리아도 알았다.
“황태자 전하, 전하와 제가 그런 식으로 불릴 사이던가요?”
베를리아가 담담히 말했다. 설령 친구만 되었더라도 상대의 안위를 두고 이득을 보려고 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서인지 카를로스의 입이 꾹 다물렸다. 적어도 그가 자신이 한 짓은 알고 있는 듯하여 그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그녀의 입매가 뒤틀렸다.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서 홱 돌아섰다. 미세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눈을 피하던 그가 움찔하며 그녀에게로 훌쩍 다가섰다.
“베릴, 잠깐…….”
카를로스는 베를리아를 부르고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낯설었다. 항상 카를로스를 잡는 것은 베를리아였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부름에도, 머뭇거림에도 베를리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카를로스가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는 동안 그녀는 홀로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카를로스는 자신의 말대로 성검의 주인임을 입증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귀족들이 황제와 작당하여 파 놓은 함정을 알면서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회의장 안에 긴장감이 돌았다. 성검의 주인. 만약 카를로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귀족들은 이제 그가 언젠가 황위에 앉는 것을 두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대들이 원했던 대로, ‘증명’을 해야겠지.”
카를로스가 좌중을 둘러보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굳이 증명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자 많은 이의 몸이 움찔했다. 그는 자신만만했다. 어찌 되었든 결국 성검을 손에 넣었으므로.
카를로스가 직접 가져온 상자를 열었다. 그 순간 새하얀 빛이 환하게 터져 나왔다. 신성한 힘이 흘러나오는 하얀 검이 모두의 앞에 드러났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별안간 검을 둘러싸고 있던 빛이 일순간에 팍하고 꺼져 버렸다.
“……!”
카를로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베를리아는 그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원작에서도 성검이 에고 소드라는 점은 뒤늦게야 드러난다. 그러니 카를로스가 성검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신전 깊숙이 감쳐져 있던 것, 신전에서도 극소수에 해당하는 자들만이 눈에 담을 수 있는 것, 기록조차 남지 않는 것. 그런 게 성검이었다. 성검이라고 하니 신성력이 넘쳐나리라, 추측할 수 있는 점은 아마 그뿐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카를로스가 성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신성력은 리리카의 것이었다. 리리카의 힘은 짐작하건대 가히 현재의 성녀와 교황에 필적했다. 신성력을 이런 식으로 응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 또 있다는 것도 리리카의 존재를 아는 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짐작 못 할 일이었다.
“황태자, 방금 무엇을 한 거지?”
황제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의 늙은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과 분노가 떠올랐다. 제 아들을 버리려고 했던 주제에 황가에서 성검을 소유할 수 있다니 진실로 탐이 났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카를로스는 말문이 막힌 채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넘실거리던 신성력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카를로스라고 한들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마 지금 짐의 앞에서 그 쇳덩이를 성검이라 소개하려던 것은 아니겠지.”
황제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누가 봐도 카를로스가 성검이라고 내민 것에서 신성력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신성력이 없는 그것은 황제의 말대로 그저 쇳덩이일 뿐이었다.
카를로스가 홱 베를리아를 돌아봤다. 그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떨리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흔들림 없이 그 시선을 마주했다. 카를로스의 얼굴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그제야 안 모양이었다. 성검을 찾는 순간부터 베를리아가 쓰러졌던 일까지, 그동안 철저히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것임을.
카를로스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그는 베를리아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황태자! 짐이 묻질 않느냐!”
쾅! 황제가 노하여 황좌의 손잡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칼날 같은 서늘함이 장내를 맴돌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목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목이 떨어지는 상대가 누구일지는 너무 자명한 일이었다.
“착오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황제가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카를로스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마 가져오는 도중에 문제가…….”
카를로스의 입에서 나온 변명은 형편없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성검이 담겼다는 상자를 들고 오시는 모습을 저희의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역시나 황제의 충신인 이아난 공작에게서 곧바로 반박이 돌아왔다.
“하……! 겨우 변명이 그뿐이더냐?”
황제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맹렬한 눈빛으로 카를로스를 내려다봤다.
“분명히 리들턴 저택에서 가져올 때는 아무 문제가…….”
카를로스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제 생물학적 아버지일 뿐인 황제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였으나, 지금은 말이 달랐다. 황제를 기만하는 일은 황태자라고 할지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다시 쳐다봤다. 우습게도 그녀가 그의 뒷통수를 친 시점에서 카를로스가 매달릴 사람은 결국 베를리아밖에 없었다. 멀쩡한 성검의 모습을 본 사람은 이 자리에서 베를리아와 카를로스뿐이었으니까.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것이 정말이더냐, 리들턴 백작?”
황제가 베를리아를 향해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똑바로 카를로스를 바라봤다가 황제에게로 돌아갔다.
“황태자 전하께서 지난날 제가 회의장에서 쓰러진 이후 리들턴 저택을 찾아오셨던 것은 사실이나, 저는 감히 폐하께 맹세드리건대 성검을 오늘 처음 봤습니다.”
베를리아의 입에서 카를로스의 희망을 무참히 꺾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진술은 사실과 거짓이 한데 섞여 제법 진실 같았다. 카를로스가 리들턴 저택을 다녀간 사실이 알려져도 사람들은 어차피 내부에서 일어난 일 같은 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결국 베를리아의 말이 좌중이 알 수 있는 상황 설명의 전부였다.
“베릴……!”
카를로스가 태연히 사실 같은 거짓을 고하는 베를리아에 화가 나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별안간 무언가가 그의 쪽으로 휙 날아갔다.
퍽, 쨍그랑!
“윽……!”
“네놈이 끝까지 짐을 능멸해……!”
황제의 손에서 옆에 놓여 있던 크리스털 잔이 던져져 카를로스의 이마에 명중했다. 카를로스는 하마터면 피할 뻔했으나, 이는 황제의 분노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피했다면 더 큰 화가 돌아왔을 터였다. 그리하여 고스란히 그것을 받아낸 그의 이마에 피가 흘러내렸다.
“이아난 공작! 저놈을 쫓아내라! 짐의 명이 있을 때까지 제 궁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야!”
황제가 외쳤다. 그의 명에 따라 이아난 공작이 회의장 밖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을 불러들였다. 그 순간이었다.
“나의 아들, 카를로스 에덴버는 들어라.”
하늘로부터 갑자기 새하얀 빛이 내려왔다. 그것이 찬란하게 카를로스를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