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단편적 진실(7)
성검이 담겨 있으리라 추정되는 상자를 발견한 카를로스가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그것을 불쾌하게 보던 메리쉬가 조소했다.
“베릴을 낫게 만들 수 있다고 나서더니 정작 이곳에 오니 저것이 탐나나?”
메리쉬가 카를로스의 시야를 막아섰다. 메리쉬는 성검이 아니라 베를리아의 쪽을 제 몸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는 카를로스와는 달리 마치 저따위 검 어찌 되어도 좋다는 듯 굴었다.
카를로스의 입매가 비틀렸다. 메리쉬가 베를리아에게 각별하게 굴었던 것이 하루이틀 있던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오늘따라 기분이 뒤틀렸다.
아마도 항상 베를리아의 뒤에서 그녀의 그림자나 쫓던 자가 당당히 앞에 서 있는 꼴을 보자니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런 듯했다.
“네놈이 지금 내 앞에서 당당할 때가 아닐 텐데.”
카를로스의 말에 메리쉬가 표정을 굳혔다. 같잖은 협박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의 혼절이 실제 상황이거나 리리카가 없었다면 정말로 저 말에 휘둘려야 했을 터였다. 그녀가 저주의 낙인으로 인해 받는 고통은 리리카 외에는 신성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으니까.
“하… 지금 나랑 베릴을 두고 흥정이라도 하자는 건가?”
메리쉬의 목소리에 불쾌감과 거부감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흡사 베를리아를 두고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거 같았다.
그게 다시 카를로스의 속을 긁었다. 정말로 순진하게 오직 베를리아밖에 모른다는 듯한 그 모습이.
‘베릴! 다쳤어?’
‘괜찮아, 카를. 나는….’
‘베릴, 그만하자. 차라리 도망가자, 우리… 응?’
본격적으로 황위 구도가 수면 위로 떠오르던 때였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4황자였던 카를로스를 먼저 처리하기 위한 세력들이 나타났다. 그럴 때면 베를리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그들의 위협과 목숨값을 그대로 갚아줬다.
그러나 아무리 베를리아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처음에는 결국 그녀도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 소녀였다. 막 황위 계승 구도로 인한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베를리아도 종종 다쳐오고는 했다.
그래서 카를로스는 차라리 도망가고 싶었다. 어차피 뒷배도 전혀 없는 4황자쯤이야 어디서 죽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그때는 베를리아가 매번 자신 때문에 다쳐오는 것보다야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안 돼, 카를.’
그런 카를로스를 만류한 사람이 베를리아였다.
‘네게 이능이 있는 이상 황실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당시 베를리아의 말은 옳았다. 카를로스도 안젤라가 남들 몰래 숨어든 자신을 어떻게 찾아왔는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황족을 찾아낼 수 있는 성물이 있는데 이능이 있는 황족을 허술하게 살려 둘 리가 없었다.
‘네가 살려면 모두 죽이고 황태자가 되어야 해.’
그러고 보면 카를로스에게 처음 황태자가 되라고 한 사람은 베를리아였다. 소녀는 네멘 리들턴에게서 므시아를 빼앗으면서 권력 싸움의 본질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머지가 죽지 않으면 싸움은 끝나지 않고, 결국 최후의 승자만이 평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너는….”
카를로스가 홱 메리쉬를 노려봤다. 억울하고 메리쉬가 부러웠다. 비틀린 마음이 카를로스를 충동질했다.
“네가, 나와 같은 상황이 된다면 다를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베를리아가 자신에게서 돌아선 이유가 메리쉬는 그와 다르기 때문이라면, 카를로스는 그것이 상당히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를 황태자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베를리아가 아니었던가.
므시아의 힘으로 카를로스를 보호했더라도 그는 이름을 숨기고 숨어 살아야 했을 것이다. 심지어 황태자가 된 지금도 전쟁은 끝나지 않은 채로 계속 이어졌다.
끌어 내려지면 카를로스는 죽는다. 그러니 버텨야 했다.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을 법한 베를리아가 제게 등을 돌렸다. 그것이 그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너야 베릴의 비호 아래, 쉽게 귀족의 성까지 달고, 베릴의 말만 들으면 되는 애완견 같은 삶을 살고 있으니 그리 굴 수 있는 거겠지.”
카를로스는 말을 이을수록 억울한 기분이 되었다. 황태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는데도 절대 위협받을 일 없다고 여겼던 정통성을 의심당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그가 어떻게 메리쉬처럼 모든 것을 베를리아에게 걸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카를로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메리쉬가 별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이 비웃음을 흘렸다.
“네놈에게서 베릴이 등을 돌린 것이 네놈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기가 막히지만.”
메리쉬가 한 발짝 카를로스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카를로스보다 키와 체구가 큰 덕에 그것만으로도 강하게 압박하는 듯한 분위기가 흘렀다. 카를로스 또한 남들보다 키나 체구가 건장한 편인데도 그랬다.
확실히 메리쉬는 카를로스 에덴버의 입장 같은 것을 겪어본 적 따위 없었다. 베를리아에게 거둬진 뒤로 위험한 일에 투입되기는 했으나 그녀는 늘 목숨이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임무를 수행하게 시켰으니까.
“베릴을 두고 모든 것을 걸 수도 없다면 감히 그 사랑을 바라지도 말아야지.”
그러나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메리쉬에게 베를리아는 전부를 내어주어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베를리아가 그의 세상이고 그의 신이었다. 메리쉬의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신에게 그 세상의 무엇인들 못 내어주랴.
“…허세 부리지 마.”
카를로스가 이를 갈며 말했다. 눈앞의 남자는 의심의 여지라고는 단 하나도 없이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속이 뒤틀렸다.
어쩌면 이 남자에게서 절대로 베를리아를 빼앗아오지 못할 것 같은 끔찍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든지.”
메리쉬는 애초에 카를로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았던 듯이 대꾸했다. 그가 베를리아의 쪽을 돌아봤다.
“베릴을 낫게 할 거라면 빨리해. 네놈이 여기 오래 있는 것을 베릴이 좋아할 거 같지 않으니.”
카를로스에게는 메리쉬의 그 재촉조차도 대단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꼭 베를리아가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그가 그녀의 방에 있을 이유 따위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카를로스가 살벌하게 메리쉬를 쳐다봤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력은 메리쉬가 더 강했고 리들턴의 저택에서 카를로스가 그를 위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을 카를로스도 알았다. 매번 메리쉬와 대치할 때면 그는 이런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황태자까지 되었는데도.
권력이, 힘이 부족했다. 카를로스는 감히 메리쉬 따위는 고개도 들 수 없을 그런 자리가 필요했다. 그의 시선이 메리쉬 너머의 베를리아를 향했다.
‘그래야만 너도 되찾아올 수 있겠지.’
카를로스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그가 베를리아가 아닌 성검의 쪽으로 다가갔다.
제가 성검이 담긴 상자를 집어 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메리쉬의 모습은 카를로스의 안에 점차 더 음습한 감정이 들게 했다. 메리쉬는 여전히 베를리아의 앞을 지키고 있었다.
“베릴이 이 상황에서 저주를 돌려받는다면 위험해지리라는 것은 너도 알겠지.”
“베릴이 네게 돌아가길 바란다면서, 베릴이 위급한 상황에서 정작 그녀의 안위를 가지고 나와 흥정을 하는 건가?”
카를로스의 말이 협박임을 메리쉬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그제야 메리쉬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였다. 적나라한 반응은 오직 베를리아의 이름을 언급해야만 흘러나오다니, 카를로스는 메리쉬를 두고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거슬리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베릴이 네놈으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내가 네놈을 가만히 둘 것 같나?”
“잃은 뒤에 무슨 짓을 한들 무슨 소용이지?”
아드득- 메리쉬의 잇새에서 이를 악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의 주변으로 살벌한 기세가 넘실거렸다.
카를로스를 마주할 때마다 늘 오만했던 메리쉬의 표정에 처음으로 무력감이 어렸다. 그것이 카를로스를 희열에 차게 했다.
“성검은 내가 가져가야겠다.”
카를로스가 당당히 선언했다. 메리쉬는 이를 갈면서도 카를로스를 저지하지 못했다. 카를로스가 마침내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베를리아가 그에게서 성검을 가로챘고, 귀족들과 황제가 카를로스 하나를 끌어내기 위해 일을 벌였다. 극한으로 몰아붙여진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유일한 희망이 되어줄 성검을 되찾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것이 카를로스의 눈을 가렸다.
하다못해 눈앞의 메리쉬라도 없었다면 한 번쯤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봤을 것이었다. 그러나 질투와 적개심에 눈먼 카를로스는 그럴 기회조차 쉽게 놓쳤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서 저주의 힘을 나눠 받은 후 리들턴의 저택을 나서자,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상으로 만들어놓았던 저주의 낙인은 베를리아의 얼굴에서 사라진 뒤였다.
‘결국 너는 끝까지 베를리아를 선택하는 법이 없구나.’
예상했던 일이었으나 기분이 더러웠다. 그녀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래놓고 돌아오라 말라 하는 꼴이 우스웠다.
“베릴, 몸은 정말 괜찮은 건가요?”
메리쉬가 걱정스레 물었다. 카를로스를 속이기 위해서 또 다시 흑마법을 사용했다. 그러니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응, 괜찮아.”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메리쉬를 달랬다. 그리고는 재스민을 불러들였다.
“리리카에게 준비를 하라고 일러줘. 부족함 없게 시중을 들 사람을 붙여주고.”
“예, 베를리아님.”
베를리아의 명에 재스민이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카를로스가 가져간 성검에 미리 손을 써둔 덕에 그는 깜박 속은 채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래 가지고 있다 보면 성검이 가짜라는 것을 깨닫게 될 터였다. 그러기 전에 일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베를리아가 바라던 대로 이틀 뒤, 곧바로 다시 중앙 의원들이 소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