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78)화 (78/148)

78화. 단편적 진실(1)


 

“멜, 혹시 카를로스 에덴버가 일전에 널 공격한 적이 있어…?”

베를리아가 흐릿한 기억을 억지로 붙잡으며 물었다.

“아니요, 그러고 보니… 제가 베릴을 대신하겠다고 말한 이후로 종종 살벌하게 쳐다본 것 치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베를리아의 물음에 메리쉬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얼마 가지 않아 베를리아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메리쉬도 자신을 두고 할 황태자의 생각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못했다.

그렇지만 카를로스는 지금까지 그 짧은 순간의 일을 두고두고 기억해뒀다. 그 정도로 집착했으면서 가만히 있었던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멜이 네게 무슨 잘못을 했어?’

‘네가 내 말에 언제부터 의문을 가졌어, 베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베를리아의 기억이 계속 이어졌다.

‘그렇지만 카를….’

‘왜, 못하겠어?’

베를리아를 향해 번뜩이던 카를로스의 푸른 시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조용히 그녀를 압박하던 그 두 눈.

“매번 그랬듯이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던 것뿐이지.”

“그게 무슨…?”

베를리아의 말에 메리쉬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황태자가 나에게 너를 죽이라고 했어, 멜.”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베릴께서는 제게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요.”

복잡하게 굴 것도 없이 베를리아가 그에게 죽으라고 했다면 메리쉬는 기꺼이 그렇게 했을 터였다. 그런데도 메리쉬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그녀가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겨우 그런 개 때문에, 내 말을 어기겠다고? 베릴, 네가?’

카를로스의 행동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베를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메리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몸을 돌려 안았다.

“리리카를 부를까요?”

“…저주나 흑마법 때문이, 아니라.”

‘베를리아 리들턴, 대답해.’

베를리아가 순순히 메리쉬를 죽이겠노라 대답하지 않자 카를로스는 점점 더 그녀를 몰아붙였다.

기억 속에서 카를로스의 손이 베를리아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 밀어붙였다. 그녀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마치 자신이 직접 겪었던 고통처럼 그 악력이 생생한 탓이었다.

‘왜? 그놈이랑 무슨 특별한 사이라도 되나 보지?’

‘그게 무슨….’

‘인제 와서 날 벗어나고 싶어졌어?’

‘아냐, 카를!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착각하지 마! 네가 날 벗어나서 살 수 있을 거 같아?!’

그 눈이었다. 광기 어린 집착이 가득 찬 푸른 눈.

기억 속 카를로스에게서 얼마 전 베를리아에게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 말하던 그 끔찍함이 느껴졌다. 소름끼쳤다.

“우욱…!”

“베릴!”

그녀가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속이 울렁거리더니 그대로 뒤집혔다. 아침이었기에 먹은 것이 없으니 게워낼 것이 있을 리 없는데도 속에 든 것을 모조리 토해냈다.

“베릴, 포션을….”

메리쉬가 다급하게 포션을 가져왔다. 그녀가 손을 마구 휘저었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베를리아는 그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게 아니었다. 생리적인 반응이 아니라….

‘날 벗어나려거든,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어.’

보다 정신적이고 본질적인 거부감에 의한 일이었다. 뇌리에 카를로스의 두 손이 베를리아의 목을 움켜쥐는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허억…!”

그녀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실제로 자신의 목이 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은 어떻게 했더라?

기억이 머릿속을 헤집었고 충격이 온몸에 내리 앉았다. 시야가 일렁이고 머리가 제대로 된 사고를 거부했다.

카를로스가 목을 조른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는 듯이, 두 손에 힘을 풀고 저항하지 않았다.

기억 속에서 카를로스의 손에 힘이 풀리는 순간, 그녀도 주저앉았다. 마치 그제야 그 손에서 놓여난 베를리아처럼.

“베릴, 숨 쉬어요, 베릴…!”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다급하게 받쳐 안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렀다. 정말이지, 정말이지… 지독한 사랑이었다. 제 목을 졸라도 그 손에 기꺼이 쥐여 준다. 그게 카를로스를 향한 베를리아의 사랑이었다.

그때 카를로스는 진심으로 목을 졸라 베를리아를 죽일 작정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진 살기와 광기는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는 그를 사랑했다.

“…나였어.”

눈물이 죽죽 흘렀다. 그녀가 양팔로 머리를 감쌌다.

나였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죽이려는 만행을 저지르고서도 태연히 너는 나를 사랑한다는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바로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아아….”

비명이 되지 못한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대체 너는 왜 그렇게까지 카를로스를 사랑했던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마구 내리쳤다. 퍽, 퍽, 듣기만 해도 제법 아플 법한 소리가 울렸다. 답답하고 슬펐다. 그런 베를리아의 손을 메리쉬가 잡아챘다.

“베릴, 정신 차려요.”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품에 꽉 안았다. 발버둥 치는 그녀의 행동에 얻어맞고 제 얼굴이 할퀴어지는데도 메리쉬는 베를리아를 놓지 않았다.

“베릴, 베릴, 내가 여기 있어요. 나를 봐요.”

메리쉬가 끊임없이 속삭였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일부러 침착함을 가장한 채로 베를리아가 자신을 보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카를로스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친 것이 그뿐이었던가?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

이건 또 언제의 기억이었던가. 그녀의 머릿속으로 카를로스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베를리아에 대한 원망과 질책이 가득한 목소리.

“정말로 내가… 카를로스를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베를리아의 목소리에 의심이 어렸다. 그녀는 그동안 모두 카를로스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녀가 가진 모든 가치관과 생각들이 뒤흔들렸다.

“아니에요, 베릴. 당신은 그저 사랑했을 뿐이에요.”

메리쉬의 두 손이 베를리아의 양 뺨을 감쌌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조심히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당신의 잘못은 없어요.”

베를리아의 두 눈이 한없이 흔들렸다. 정말로 그럴까? 그릇된 믿음을 심어 놓았다. 그 죄, 과연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메리쉬의 손이 그녀의 뺨을 적신 눈물을 닦아주었다. 혹시라도 검을 잡는 제 손에 박인 굳은살이 베를리아를 아프게 할까 봐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베릴이 한때 그놈을 사랑했다고 해서, 베릴을 고통스럽게 할 자격까지 쥐여 준 것은 아니잖아요.”

오랫동안 고통받아온 사람들은 대개 쉽게 착각에 빠진다. 해소되지 않는 고통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노라고.

왜냐하면 제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 중에서 자신을 바꾸는 일이 가장 쉬우니까.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만 더 잘하면 무언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 얼마나 부질없고 애처로운 희망 고문이란 말인가.

“있다면, 베릴에게서 그자를 더 빨리 치워버리지 못한 제 잘못이겠죠.”

메리쉬의 손끝이 떨렸다. 그의 표정이 더없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베릴이 이렇게 고통받을 때까지 그냥 두고 보기만 해서.”

베를리아의 사랑을 믿고 그녀를 막 대한 것은 엄연히 카를로스의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의 생각이 이토록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오랜 기간 고통받으면 그 속에서 이성을 차리기 힘이 드리라.

그때의 메리쉬는 정말 그 방법밖에 몰랐다. 베를리아가 원하는 대로 뭐든 하는 것. 그렇지만 다른 방법을 알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은 채로 베를리아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베릴.”

베를리아가 멍하니 메리쉬를 바라봤다. 아니다, 네게는 죄가 없었다. 만약 메리쉬조차 없었다면 그녀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만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네가 왜 미안해, 멜.”

베를리아의 보랏빛 눈이 뚜렷해졌다. 길을 잃고 흔들리던 시선은 온전히 메리쉬에게 박혀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 에덴버를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었다. 그 사랑의 과정에서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최소한 카를로스만큼은 그녀에게 죄를 물을 수 없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

카를로스가 언제 정확히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 말은 틀렸다. 카를로스를 베를리아가 스스로 고통스러워할 방향으로 밀어 넣었다고? 우스운 소리다. 베를리아도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그저 카를로스가 그녀의 사랑을 무기로 방만하게 휘두르며 그런 길을 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이 베를리아의 탓을 한 거다.

그녀가 눈물을 지워냈다. 카를로스는 왜 베를리아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남주인공은 왜 꼭 악녀를 죽여야만 했을까? 악녀가 여주인공을 죽이려고 해서?

생각해보면 정치판에서 서로를 죽이려 하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고, 설령 되갚고 싶다 할지라도 그것은 위협을 당한 여주인공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던가?

악녀는 언제든 남주인공에게서 돌아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악녀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악녀가 원하는 것이 사랑이든 권력이든 다른 무엇이든- 남주인공은 악녀가 바라는 것을 절대 주지 않을 테니까.

카를로스도 알아버린 것이다. 자신이 베를리아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면… 베를리아는 언제든지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죽이려고 한 거다. 말 그대로, 자신이 가질 수 없으니 남도 못 가지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베를리아 리들턴은 결코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베를리아가 눈물을 털어냈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있는 한, 베를리아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약속은 깨야겠어요.’

그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베를리아는 제 행복을 위하여 기꺼이 이기적으로 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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