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추락의 전조(7)
베를리아의 말에 메리쉬는 마치 정지한 것처럼 멀뚱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불렀다.
“멜?”
“아.”
그녀의 부름에 얼었다가 녹기라도 한 것처럼 메리쉬가 작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별안간 화르륵 달아올랐다.
“…멜?”
메리쉬의 낯선 반응에 당황한 것은 베를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눈을 깜박깜박하며 그를 멍하니 응시했다. 메리쉬는 잔뜩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더니 제 얼굴을 가리듯이 베를리아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메리쉬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베를리아가 돌연 카를로스에게 돌아선 후 그에게 사랑한다고 할 때도, 그녀와 처음으로 밤을 보낸 이후에도 메리쉬는 도리어 당당했다. 오죽하면 재스민이 베를리아에게 너무 예뻐하면 버릇 나빠진다며 괜스레 툴툴거렸겠는가.
메리쉬는 밑바닥에서 태어났음에도 무언가를 누리는 데 놀라울 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는 베를리아의 사랑을 받는 대로 꿀꺽꿀꺽 모두 집어삼켰다. 그녀가 빙의한 후, 초반의 무뚝뚝했던 메리쉬와 지금을 비교하면 그가 얼마나 빠르게 사랑으로 피어났는가를 알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식물이었다면 물을 주면 주는 대로, 햇빛을 받으면 받는 대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잘 자라는 튼튼한 나무였을 것이었다.
그런 메리쉬가 얼굴까지 온통 붉히면서 처음으로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저는, 질투를 저만 하는 줄 알았어요.”
메리쉬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베를리아의 허리에 감긴 그의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그로 인해 메리쉬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이 얇은 옷 너머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를 더 깊이 껴안는 그의 움직임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저한테는 베릴뿐이니까.”
메리쉬가 나지막이 말을 덧붙였다. 그의 세상은 오직 베를리아뿐이었다. 반면 그녀에게는 므시아도, 리암 로베르와 데니안 론델, 카를로스 에덴버도 있었다. 지금이야 버렸다지만 세 사람이 한때 그녀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베를리아의 세계는 항상 메리쉬보다 월등히 넓었다.
그것이 딱히 불만이었던 적은 없었다. 메리쉬는 그저, 그렇기에 베를리아가 질투를 품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사랑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미안해요, 베릴. 이런 걸로 기뻐해서.”
메리쉬의 얼굴이 그녀의 목덜미에 가까이 있던 탓에 숨결이 살갗을 간지럽혔다. 연인간의 질투는 사랑을 증명하기에 가장 쉽고 명확한 감정이었다. 아닌 척하려고 해도 고개를 들고 마는 기쁨을 그도 어쩌지 못했다.
“그냥, 저는 매번 황태자를 질투해도… 베릴은 절대 안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메리쉬가 슬쩍 고개를 들고 베를리아와 시선을 마주하며 변명하듯 덧붙였다. 이런 일로 치졸하게 좋아한다고 그녀가 싫어할까 봐 눈치가 보인 탓이었다.
메리쉬를 응시하던 베를리아가 풋,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게서 그녀가 걱정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멜, 네가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즉에 솔직하게 말할 것을 그랬어.”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베를리아를 저토록 사랑하는 메리쉬를 두고 안젤라에게 질투를 느끼는 제가 못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베를리아는 자신이었고, 메리쉬는 그녀가 빙의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할 텐데 저 홀로 불안해하는 것이 참으로 한심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입 밖으로 말을 꺼내고 보니 사실은 그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셈이었다. 메리쉬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못났고 한심하면 뭐 어떻겠는가. 그가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베릴이 제 앞에서 무엇을 하시든, 저는 베릴이 좋아요.”
메리쉬는 눈매가 날카롭기 그지없어 가만히만 있어도 서늘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런 그가 눈꼬리를 유순하게 내려트리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된 이후로도 메리쉬는 자주 베를리아를 아래에서 올려다봤다. 지금처럼 그녀를 제 무릎 위로 안아 올리다시피 해서 늘 그녀가 위쪽에 존재하도록 했다.
알고 있었다. 메리쉬의 말도, 행동도 무엇 하나 단 한 번도 진심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랑해, 멜.”
그래서 자꾸만 메리쉬를 보고 있자면 벅찼다. 베를리아가 홀린 듯 말을 내뱉었다.
“저도 사랑해요, 베릴.”
환히 웃는 메리쉬의 눈매가 곱게 접혀 야살스러웠다. 베를리아가 참지 못하고 그의 목에 제 두 팔을 둘러 끌어당겼다.
마음은 충분히 충동적이었고 이성은 함락된 지 오래였다. 사부작사부작하는 움직임에 옷자락이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서로가 서로를 원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
메리쉬는 베를리아의 말을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가 그녀를 뒤에서 안은 채로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 주며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어놓았다.
“베릴에게는 너무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때, 황태자만 베릴을 놓는다면 다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베릴이 더 이상 무리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베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녀도 메리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카를로스와 리암, 데니안은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받아먹을 것은 다 받아먹은 주제에 매번 안하무인으로 굴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그들이 후회하길 바랐으나 사실 그녀가 빙의하지 않고 원작대로 갔다면 진짜 베를리아는 완벽히 버려졌을 터였다
오히려 최근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 보였던 소름끼치는 집착과 광적인 믿음이 이해 가지 않을 만큼, 카를로스는 원작 내내 진짜 베를리아에게 유독 싸늘했다. 그러니 메리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제가 베릴의 역할을 대신하겠다고 말했죠. 그런데 황태자의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어요.”
메리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날의 일은 완전히 그의 오산이었다.
‘감히 너 따위가, 베릴을 대신하겠다고?’
“제게 화를 내더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카를로스는 메리쉬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카를로스는 메리쉬에게 선명한 적의를 드러냈다.
‘그건 누구의 생각이지? 너 혼자만의 생각인가? 아니면, 베를리아가 그러던가? 감히 날 먼저 떠나겠다고?!’
단언컨대 그날의 카를로스는 메리쉬가 이전까지 봐 왔던 황태자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솔직히… 그런 황태자의 모습은 처음 봤어요. 제가 느끼기에는… 베릴이, 성녀를 해치려고 했을 때보다도 더 격했거든요.”
마치 늘 끼고 다니던 곰인형을 빼앗긴 어린아이 같은 날것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평소에 베를리아를 대하던 카를로스의 태도를 알고 있다면 아마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베릴의 개답게 주제넘게 굴지 말고 개 노릇이나 똑바로 해.’
그날, 카를로스는 이를 갈며 메리쉬에게 경고했다.
‘베를리아가 그럴 리야 없겠지만… 네 주인이 날 벗어나려거든, 죽어서 땅에 묻히는 수밖에 없을 테니.’
메리쉬는 그때 처음으로 베를리아와 카를로스의 관계에 대하여 기이함을 느꼈다. 베를리아가 일방적으로 붙잡고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의문이 생겨났다.
“베릴이 매번 괜한 희망 고문을 당하는 것이 싫어서 베릴에게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메리쉬의 어조에 카를로스에 대한 적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의문을 품었다. 그렇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카를로스가 보이는 감정은 베를리아가 그에게 주는 것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베를리아처럼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종류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마도 당시의 베를리아였더라면 그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카를로스가 겨우 그딴 것으로 베를리아를 제 곁에 매어 두는 것이 싫어서.
메리쉬에게 그렇게 화를 냈던 것 치고, 그 후 베를리아를 대하는 카를로스의 행동은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차이점이라고는 이전과는 다르게 종종 황태자가 메리쉬가 있을 법한 곳을 사나운 눈으로 보고는 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베릴이 사라졌죠.”
메리쉬의 얼굴에 자책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가 베를리아를 찾지 못할 일이라면 마녀재판을 앞두고 베를리아가 황궁의 지하 감옥에 갇혔던 일뿐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베릴이 죽을 뻔했고요. 어쩌면 황태자가 베릴을 죽이고자 했던 것은 저 때문일지도 몰라요.”
메리쉬의 커다란 손이 베를리아의 머리칼을 조심조심 쓸어 주었다. 그 얇은 머리칼 한 가닥조차 소중한 듯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그녀의 등에 제 이마를 기댔다. 마치 등 너머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베를리아가 생각하기에도 시기가 참으로 절묘했다. 마치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버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먼저 그를 벗어나려고 했기 때문에 죽이려고 굴었던 듯이.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베를리아 리들턴이란 대체 뭐였을까. 그녀의 안에 짙은 의문이 떠올랐다.
‘…죽여. …릴.’
그리고 불현듯 베를리아의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베를리아의 기억인가?’
무언가 알 듯 말 듯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갑작스레 떠오르기 시작한 것에 집중했다.
‘네 개를 죽여, 베릴.’
난데없이 생각 난 목소리가 분명해지는 순간 그녀는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카를로스 에덴버…?’
화려한 금발에 선명한 푸른 눈. 카를로스였다. 기억 속에서 그가 드물게 베를리아에게 아주 다정한 어조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누구를 죽이라고?’
진짜 베를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카를로스에게 되물었다.
‘메리쉬, 그놈을 죽여. 할 수 있지? 베릴.’
카를로스는 이미 메리쉬를 죽이려고 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