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추락의 전조(2)
“나는 너를 기회로 삼을 생각 없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베를리아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메리쉬를 내걸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베를리아가 어느 방향으로든 떠미는 순간 망설이지도 않고 사력을 다해 나아갈 테니까. 그러니 시작도 말아야 했다. 그러나 메리쉬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생각해 보세요, 베릴. 그놈은 음험하고 의심이 많아요.”
메리쉬의 발언에 사감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황태자를 베를리아의 곁에서 오래 지켜봐 왔다. 어쩌면 원작과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의 편중적인 기억에 의존한 그녀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지도 몰랐다.
“그런 황태자가 쉽게 이것을 갖게 되었을 때 곧이곧대로 믿을까요?”
메리쉬가 상자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쟁취감은 사람의 기분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치열한 머리싸움에서는 들뜨는 순간 승기를 빼앗긴다. 그런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봤을 때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 기묘한 집착을 드러낸 지금, 그녀의 연인인 메리쉬만큼 좋은 패는 없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이 진짜와 다를지라도 메리쉬의 존재가 카를로스의 눈을 가려 줄 테니까.
“저로 해요, 베릴.”
메리쉬가 마차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베를리아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그가 순종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베를리아가 야속하다는 듯이 그를 내려다봤다. 이렇게 굴면 그녀가 약해진다는 것을 메리쉬도 눈치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다치면 어떻게 해.”
갑자기 왜 이렇게 약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베를리아 스스로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 현재 상황은 카를로스에게 대단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원작의 남주인공이라는 사실만 뺀다면 그는 베를리아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그녀는 상당히 비약적이었다. 그 사실을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아… 그만 화내. 넌 나를 사랑하잖아?’
그렇지만 잊히지 않았다. 그녀를 두고 확신하던 카를로스 에덴버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 모습이.
아무리 베를리아 리들턴이 원작에서 지독하게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했다고 할지라도 그녀가 빙의한 후에 저지른 행동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까지 베를리아의 사랑을 의심 하나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정상적인 사고로 가능한 일이던가?
“카를로스 에덴버는 미쳤어.”
그건 그녀의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베를리아가 팔을 움직여 제 무릎에 놓인 메리쉬에 손에 제 손을 얽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예측은 상대가 상식적인 범위의 일을 벌이거나 상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카를로스의 행동은 그 범위를 벗어났다. 그런 카를로스 에덴버는 그녀가 원작에서 알던 남주인공이 아니었다.
자신이 말한 뒤 그녀는 스스로 놀랐다.
‘…그래, 지금의 카를로스 에덴버라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아.’
왜냐하면 제 판단에 대하여 지독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일전에 그런 카를로스를 본 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넌 나를 벗어날 수 없어.’
그 순간 잊고 있던 꿈이 떠올랐다. 자신을 옥죄던 힘과 끔찍한 무기력함도 함께. 뇌리에 스친 것은 광기 어린 집착이 가득한 카를로스 에덴버의 두 눈이었다.
별안간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것은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에도, 그녀가 읽은 원작 속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마치 직접 겪은 것 같은 이 생생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베릴, 그놈이 무슨 짓을 할지라도.”
서늘한 베를리아의 뺨 위로 메리쉬의 손이 닿았다. 그 온기가 숨 막히는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를 건져 올렸다.
“당신이 여기 있고,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나를 그리고 당신을 믿는다. 베를리아를 바라보는 녹빛 시선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베릴의 행복을 위해 살아요.”
‘나는 베릴의 행복을 위해 살아요.’
메리쉬가 말했다. 베를리아가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기시감이 들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말이 어쩐지 그녀에게 콕 박혀 왔다.
“당신의 행복에 내가 있는 한, 나는 죽지 않아요.”
‘당신의 행복에 내가 있는 한, 나는 죽지 않아요.’
메리쉬가 단언했다. 순간 베를리아는 울컥했다. 왜 이 말이 이토록 애달프고 눈물이 날 것 같은지 알 수 없었다. 이 또한 원작에서도,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에도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슬프리만치 익숙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저렇게까지 말하는 메리쉬를 그녀는 거절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약속이야.”
그렇게 말하는 순간 베를리아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언가 이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두 손이 메리쉬의 양 뺨을 감싸 끌어당겼다. 베를리아가 그대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니, 약속하지 않아도 좋아.”
베를리아의 시선이 홀린 듯이 메리쉬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너를 지킬게.”
그것은 굳건한 맹세였다. 그녀는 어쩐지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없이 이상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믿을게요, 베릴.”
메리쉬가 미소했다. 그 웃음이 더없이 상냥하고 다정했다. 오직 베를리아만을 위한 것이었다.
메리쉬의 입술이 베를리아를 달래듯이 그녀의 입술에 얕게 여러 번 닿았다. 베를리아의 팔이 그대로 그를 끌어당겼다. 두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마치 서로에게서 흘러나오는 숨결을 확인하는 것처럼.
***
‘카를, 성검이 있는 곳을 찾았어.’
리암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카를로스는 최소한의 호위만을 데리고 말에 올라 황궁을 뛰쳐나왔다. 긴 시간 기다려 왔던 때였기에 애초에 출발할 준비를 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말을 달리는 동안 쉼 없이 생각했다.
성검을 손에 넣는다면 자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원래 제 것이었던 것도 모두 되찾으리라.
“태자 전하, 이 속도로 계속해서 달리면 말에게 무리가 갑니다!”
함께 이동하던 기사가 빠른 속도에 이는 바람 소리 사이로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출발 전에 말들에게 강화 마법과 가속화 마법을 걸었다.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동물의 몸이 가진 한계가 있었다. 카를로스는 현재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말을 모는 중이었다.
즉 이대로 간다면 말에게 무리가 갈 뿐만 아니라 죽게 될 것이었다. 말을 계속해서 갈아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들은 비밀리에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닿는 것을 극도로 최소화해야 했다. 마을을 들를 때도 조심하는 게 좋았다. 그러니 결국 말이 지칠 때마다 갈아탈 수는 없을 터였다.
“엔데르 경! 말이 다음 마을까지 버틸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라.”
황태자의 일행 중에는 마법사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카를로스가 목소리를 키워 마법사 엔데르를 불렀다.
“태자 전하…!”
순간 기사들에게서 카를로스를 만류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가 지금 한 말은 말을 죽이겠다는 뜻이나 진배없었다. 말의 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무시하고 마법으로 버티게 한다. 그렇게 되면 말은 죽을 것 같아도 몸을 움직일 터였다. 마치 시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그리고 마법이 풀리는 때가 되어서야 짐승들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황태자의 직속 호위쯤 되면 각자만의 말 한 마리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애정을 가지고 공들여 키운 말을 소모품으로 쓰라는 카를로스의 말은 썩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반발은 허용치 않겠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판단하도록!”
그러나 황태자는 제 수하들의 목소리를 가볍게 묵살했다. 기사들과는 달리 그는 말이야 또 사들여 키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검은 달랐다. 성검은 이 세상에 오직 단 하나뿐이었다.
카를로스, 자신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기사들의 반발이 있을지라도 엔데르는 황태자의 명령을 들어야만 했다. 결국 말들에게 마법이 시전되었다. 그러기 무섭게 카를로스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와 황태자를 따르는 자들이 승마에 뛰어난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매섭게 스치는 바람에 밀려 말 위에서 떨어졌을지도 몰랐다.
밤낮을 그렇게 달렸다. 휴식 시간은 졸다가 말 위에서 추락하지 않을 정신을 유지할 정도로만 주어졌다. 강행군도 이런 강행군이 따로 없었다.
종래에는 기사들조차도 제 주군인 황태자를 보며 약간의 질린 기색을 보였다. 물론 카를로스의 검술이 기사들보다도 뛰어나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사란 평생을 몸을 단련하는데 바친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조차 지치는 와중에도 황태자는 굳건했다.
혹은,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카를로스의 푸른 눈에서 기괴할 만큼 선명한 안광이 빛을 발했다.
그래서 황태자를 따르는 모든 자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입을 열지 못했다. 카를로스에게서 흘러나오는, 한편으로는 섬뜩한 그 분위기가 그들을 내리눌렀다.
말에서 내려온 시간보다 말 위에서 있던 시간이 더 길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리암이 말했던 산에 도착했다. 그쯤 되어서는 엔테르조차 완전히 마력이 고갈되다시피 되어 버렸다.
사안이 급해 빨리 이동해야 했으므로 카를로스는 체력이 강한 이를 위주로 일행을 구성했다. 기본적으로 마법사는 지구력 자체가 기사보다 약했기 때문에 일행 중에서 마법사는 엔테르가 유일했다. 그렇기 때문에 엔테르에게 끝없이 힐링 포션을 지급했으나 끝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마법이 풀려 말들이 죽어 버렸고 그들은 말을 내버려 두고 산행해야만 했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기사들을 이끌고 성검이 있다는 동굴의 앞에 도착했을 때, 그 동굴에서는 베를리아와 메리쉬가 나오고 있었다.
“안녕?”
카를로스와 마주한 베를리아는 웃고 있었다. 그녀가 가볍게 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베를리아의 뒤로 상자를 들고 있는 메리쉬도 카를로스의 눈에 들어왔다. 메리쉬의 품에 있는 상자는 딱 검이 들어가기 좋을 만큼 충분히 컸다.
“이거 어쩌나… 너, 늦었는데.”
베를리아가 약 올리듯 말하자 메리쉬가 상자를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새하얀 검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