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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71)화 (71/148)

71화. 추락의 전조(1)


 

“내가 너와 짜고 거짓말을 한 걸 들킬 거야, 들킬 거라고!”

베를리아에게 불려 온 리암은 잔뜩 불안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녀가 리암에게 새로 명령한 것 때문이었다.

“안 들키게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시키는 대로나 해.”

그러나 베를리아는 리암의 투정을 받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말이 튀어 나갔다.

“그 많은 빚을 1/3이나 깎아 주는데 이 정도면 날로 먹는 거 아냐?”

“그건…!”

리암은 여전히 무언가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위험수당으로 베를리아가 빚을 싹 다 없는 셈 쳐 주길 바랐을 터였다.

‘그럼 앞으로 네가 어떤 꿍꿍이를 부릴 줄 알고.’

베를리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리암 로베르가 그녀의 말을 거부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런데 뭐 하러 그 거액의 돈을 낭비해가며 그를 부린단 말인가? 리암과는 어차피 카를로스를 처리할 때까지 완벽히 얽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바에야 리암의 약점을 계속해서 잡아 두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런 의미에서 리암이 므시아에 진 빚 중 1/3은 그녀가 판단한 적정한 금액이었다. 로베르 후작가가 쫄딱 망해도 절대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남아 리암이 노예가 되지는 않아야 할 테니까. 그러니까 딱, 일말의 희망만 남겨 놓은 셈이었다. 차근차근 그 빚을 줄여 가면 언젠가 베를리아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준비되면 연락해.”

베를리아가 리암에게서 돌아섰다. 이제 등을 보이는 것은 그녀였다. 그 사실이 더없이 유쾌했다.

***

‘황태자한테 성검을 찾았다고 말해. 위치는 내가 정해 줄 테니.’

리암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움직인 모양이었다.

“황태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답니다.”

황실에 심어둔 베를리아의 수하에게서 마도구를 통하여 연락이 왔다. 리암이 직접 성검의 위치에 대해 언질을 준다면 황태자도 분명 믿으리라 예상했었다.

“재스민, 마차는?”

베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스민을 돌아봤다.

“베를리아 님의 명대로 준비해 놨습니다. 산속을 사흘 밤낮으로 달려도 아무 문제없을 거예요.”

재스민이 베를리아에게로 다가와 눈치 빠르게 제 주인의 외출을 도우며 말했다. 베를리아는 멀리 가기 위하여 움직이기 편한 바지와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 위로 재스민이 여러 가지 보호 마법이 걸린 외투를 베를리아에게 입혀 주었다.

“베를리아 님이랑 같이 외출하실 거 아니에요? 준비나 하세요.”

재스민이 그새 다가오려는 메리쉬를 힐끔 째려봤다.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 옆을 내어 준 이후로 찰떡같이 떨어지지 않는 탓에 오랜만에 드는 시중이었다.

베를리아는 객관적으로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므시아에게는 조금 달랐다. 므시아의 일원 중에 그녀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상벌이 확실하기 때문일 뿐이다. 베를리아는 제 것에는 무엇도 아끼지 않는 성격으로, 므시아 중 그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없었다. 재스민은 그런 베를리아를 혼자 독차지하려 드는 메리쉬가 괘씸했다.

“…하.”

메리쉬가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재스민이나 므시아의 누구도 그를 이런 식으로 대하지 못했다. 베를리아가 므시아에서 주인으로서 두려운 사람이었다면, 메리쉬는 다른 차원으로 무서운 대상이었으니까.

베를리아가 한때 카를로스밖에 몰랐기에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다면, 메리쉬는 의도적으로 주변을 무시했다. 그는 베를리아를 제외한 모두가 제게 아무 값어치가 없는 귀찮은 존재일 뿐임을 숨기지 않았다.

맹수처럼 타고난 감이 발달한 메리쉬는 작은 기척에도 예민했다. 신경이 예민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베를리아의 앞에서야 워낙 바짝 제 머리를 낮추고 있으니 그녀는 모를 수도 있겠지만, 므시아의 누구도 리들턴 저택 내 메리쉬의 방 근처에 접근하지 않았다. 철저히 그가 거슬린다며 싫어하는 탓이었다. 인간의 숨소리, 걸음 소리, 말소리 하나하나 귀에 속삭이듯 들린다는 예민함은 범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웬만한 것들이야 마도구로 처리되니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세밀한 곳까지 사람의 닿아야 하는 청소도 분명 있었다. 이런 경우 주로 메리쉬가 베를리아와 함께 외출할 때를 노려야만 했다.

그 예민함은 종종 베를리아가 아플 때면 극에 달했다. 특히 베를리아의 상태가 안 좋을 때 그녀의 시중을 들거나 그녀의 방을 청소하던 사람이 소음이라도 내면 삽시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아파 잠든 베를리아를 깨울지도 모른다는 까닭 하나였다. 만약 므시아가 베를리아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메리쉬의 손에 여럿 죽어 나갔을지도 몰랐다.

“아직도 준비 안 하셨어요? 베를리아 님보다 늦으시면 어떻게 해요.”

거친 흙바닥을 걸어도 괜찮을 만큼 두꺼운 밑창을 가진 신발을 내오던 재스민이 메리쉬를 타박했다. 므시아에서 메리쉬가 그렇게 무서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렇게 막 나갈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요즈음 베를리아가 유해지면서 메리쉬 또한 그 맹수 같은 이빨을 누그러트렸기 때문이다.

므시아의 많은 이들이 여전히 메리쉬를 무서워하고 있었으나 가까이에서 지내는 재스민은 알 수 있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를 좇던 베를리아는 주변으로부터 항상 공격을 받았기에 위태롭고 예민했다. 그럴 때마다 메리쉬의 세상은 매번 천재지변이라도 난 것처럼 통째로 뒤흔들렸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 그래서 메리쉬도 시시각각 촉을 곤두세우고 발톱을 드러내고 있어야 할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예전이야 늘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대로 휘두르면 그만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역시 재스민의 예상대로 못마땅하게 그녀를 쳐다보던 메리쉬는 휙 등을 돌아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베를리아보다 준비에 늦을 일은 없을 테지만,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호위를 전담하게 될 테니 꼼꼼한 준비는 당연한 일이었다.

“저는 먼저 나가 마차를 점검하고 있을게요, 베릴.”

“그렇게 열심히 준비 안 해도 된다니까.”

메리쉬의 말에 베를리아가 힘을 풀라는 듯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이미 재스민이 두 번 세 번 마차를 점검했다. 그러나 메리쉬는 베를리아의 안위에 관해서라면 꼭 제가 확인을 해야만 만족했다. 작위까지 가지게 된 지금도 여전히 베를리아의 호위를 메리쉬가 전담하는 까닭이기도 했다.

베를리아는 부족하다면 므시아의 인원을 몇 더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메리쉬가 거절했다. 그가 말하길, 자신보다 강한 자가 없으니 나머지는 거추장스럽다는 것이다. 뭐, 사실이긴 했지만 베를리아의 곁에 가기도 힘든 므시아의 일원들로서는 썩 재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요.”

결국 베를리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메리쉬가 먼저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 재스민이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저 성질머리에 베를리아 님이 아니면 거둘 사람도 없을 거예요.”

재스민이 말을 이으면서도 능숙하게 베를리아의 머리를 하나로 묶은 후 풀리지 않도록 고정해 주었다. 베를리아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좋아.”

진심이었다. 메리쉬에게는 오직 베를리아만이 특별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베를리아 님이 좋으시다면 저도 좋아요.”

재스민이 잠깐 멈칫거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베를리아의 곁에 메리쉬 다음으로 오래 있었던 재스민이었다. 제 주인이 얼마나 그간 고생이 많았는지 그녀도 알았다. 그러니 제 주인이 좋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

그 대답에 베를리아가 다시 미소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며 재스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올게.”

***

원작 속에서 성검이 발견되는 곳은 수도에서 꽤 떨어져 있었다. 황태자는 비밀리에 움직여야 했으니 공식적인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수도 없을 터였다. 결국 답은 말과 마차뿐이었다.

베를리아는 재스민이 준비한 마차에 흑마법을 걸어두었다. 세상의 질서를 어그러트리는 이 힘은 현존하는 마법보다 훨씬 활용 범위가 넓었다. 예를 들어 투명화 마법과 방음 마법, 가속화 마법 등을 여러 번에 걸쳐 시전하지 않아도 됐다. 그녀가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정한 법칙에서 벗어난 마차는 타인의 눈에 보이지도, 길에 바퀴 자국을 남기지도 않게 되었다. 이것이라면 카를로스가 말을 타고 간다고 해도 충분히 앞서가리라.

“베릴, 생각해 봤는데요.”

고도의 기술과 마법을 이용해 만들어진 마차는 가는 내내 소음 하나 없이 편안했다. 그 속에서 메리쉬가 말을 꺼냈다.

“그거 저 주시면 안 될까요?”

메리쉬의 시선이 마차 안에 놓인 기다란 상자에 향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베를리아가 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준비해 놓은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메리쉬가 왜 이제 와 바꾸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걸? 안 돼.”

베를리아는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단호히 거절했다. 다른 것이었다면 얼마든지 메리쉬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을 터였다. 그렇지만 상자 속에 든 것만큼은 줄 수 없었다. 그러나 보기 드문 그녀의 재고 없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메리쉬는 재차 애원했다.

“아시잖아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어요.”

“이미 주인이 될 자를 준비해 놨어.”

“그게 누구든 저보다 잘하지는 못할 거예요.”

베를리아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메리쉬의 말이 맞았다. 상자 속의 물건을 그에게 준다면 그는 누구보다 완벽히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해낼 터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가 메리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준비해 둔 이유가 있었다.

“내가 네게 이것을 주면 황태자는 대놓고 너를 공격하려고 들 거야.”

베를리아는 높은 확률로 카를로스가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카를로스가 메리쉬에게 호의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리가 없었다. 그건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든 확신이었다.

베를리아는 메리쉬가 위험에 노출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카를로스가 메리쉬를 찌르는 환영을 본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객관적으로는 메리쉬가 절대 질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가 황태자를 피하길 바랐다. 그러나 불안해하는 그녀와 달리 메리쉬가 시선을 똑바로 맞춰 오며 말했다.

“그래야만 가장 좋은 기회가 만들어지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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