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62)화 (62/148)

62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6)


 

메리쉬는 교황청으로 재스민은 성녀가 머무는 중앙 신전으로 향했다. 하나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메리쉬의 실력이라면 교황청에 숨어드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재스민 또한 평범한 하녀는 아니었으니 무사히 성녀를 만나고 돌아올 테고.

물론 굳이 두 사람을 보낸 데에는 메리쉬와 안젤라를 만나게 하기 싫은 마음도 있었지만.

“리리카, 방에 있어요?”

교황이 죽어간다. 그렇다는 것은 신전의 권력 판도가 뒤바뀔 타이밍이라는 뜻이었다. 베를리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우당탕탕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동안 조용하더니 대뜸 벌컥 문이 열렸다.

“베를리아 양! 여긴, 여긴 웬일로?”

잔뜩 당황한 모습이 오히려 베를리아를 그보다 더 당황스럽게 했다. 지금까지 매번 광대처럼 굴던 모습과 지나치게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겨우 같은 저택 내에서 리리카의 방을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리리카는 베를리아가 마치 아주 먼 거리라도 온 듯이 굴고 있었다.

“그냥… 할 말이 있어서요.”

베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방문을 열고 다급하게 몸을 내민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리리카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

“놔요.”

“아….”

베를리아의 단호한 말이 무언가를 충동적으로 말하려던 리리카의 입을 다물게 했다. 망연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리리카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손은 빠르게 떨어져 나갔으나 손끝에는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감정이 그득했다.

‘가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리리카는 웃으며 문에서 비켜섰다. 몸을 돌린 덕에 제 얼굴이 보이지 않아 안도감이 들었다.

“들어와요, 베를리아 양.”

리리카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부단히 애썼다. 여태까지 태연하게 잘만 굴었는데. 정말 겨우 방 한 번 찾아온 것이 뭐라고 갑자기 충동이 들끓었는지 알 수 없었다.

베를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떨떠름한 얼굴이 되지 않도록 표정을 굳혔다. 리리카에게 용건이 있는 것은 자신이었으니 먼저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새삼 후회가 되었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다른 때처럼 하인을 시켜 리리카를 불렀을 테니까.

메리쉬의 사랑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있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세상이었다. 유일무이한 세계였다. 그 안에 절대적인 충성이 존재하든 맹목이나 신뢰가 존재하든… 사랑이 존재하든,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언젠가 메리쉬가 진실을 알고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될까 두려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자신이 베를리아로 존재하는 한 비밀만 잘 지킨다면 그의 사랑이 사라지지 않으리라 자신했다.

그런데 리리카는 아니었다.

이곳은 카를로스 에덴버와 안젤라 애거스틴이 주인공인 세계였다. 그 속에서 베를리아 리들턴은 모두에게 미움 받는 것이 너무 당연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메리쉬를 제외한 누군가가 베를리아를 사랑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때문에 리리카의 존재는 등장부터 지금까지 쭉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다. 소설 속에서는 한 글자도 서술되지 않았던 남자가 베를리아를 향해 저런 감정을 보인다는 게.

‘리리카, 당신은 정말로 원작에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혹은… 악녀에 대한 사랑은 서술할 필요조차 없었던 걸까?’

빙의하고 나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점차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과 동화되어 갔다. 그런데도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서 타인에게 사랑받았던 기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카를로스의 그 같잖은 호의 몇 번에 첫사랑을 시작할 만큼 그랬다. 탓하는 것은 아니지만, 베를리아를 향한 메리쉬의 맹목이 충성이 아니라 사랑으로 방향이 흘렀다면 베를리아의 선택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사랑하는 방법도 단 하나밖에 몰랐다. 진짜 베를리아는 어리석게도 지금의 그녀처럼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린 날부터 네멘 리들턴의 실험체로 살아 왔던 베를리아의 세계는 지극히도 좁았다. 사랑은커녕 인간관계도 배울 틈 없이 살았으니 민들레 씨앗처럼 불현듯 찾아온 첫사랑이 소녀 안의 세상을 전복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리리카, 나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예요?”

하려던 말이 아니라 이런 질문을 꺼낸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진짜 베를리아가 기억하지 못한 것인지, 원작에서 관심이 없어 서술하지 않은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카를로스밖에 모르고 산 진짜 베를리아의 실수라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베를리아를 둘러싼 세상이 그녀에게 다른 곳을 볼 기회조차 보여 주지 않은 것이라면 퍽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본디 소설이란 주인공들 외에 주변 인물의 자세한 서사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보통이기는 했지만.

“…베를리아 양이 웬일로 그런 것을 물어요?”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로 차를 준비하던 리리카가 되물었다. 공간을 채우던 잠깐의 기묘한 공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게요. 됐어요, 딱히 안 궁금해.”

그녀가 내뱉은 말이 딱 리리카와 베를리아 사이의 선이었다.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않는 사이. 궁금해도 그에 관해 묻지 않는 사이. 딱 그런 사이.

“…제게 할 말이 있으신 거죠?”

베를리아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는 리리카는 웃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광대가 웃는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리리카, 내 저택을 처음 찾아왔을 때 했던 말 기억해요?”

물 흐르듯이 대화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이 또한 기묘하게도 베를리아와 리리카 두 사람 모두 이런 흐름에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무슨…?”

“당신이 다음 대 교황이 될 수 있다는 말.”

‘제가…! 다음 대 교황이 될 수 있다면요?’

베를리아가 에루아트의 핏줄이 가진 가치보다 위험성을 높게 사 리리카를 거부했을 때 그가 했던 말이었다. 리리카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제가 베를리아 양에게 필요한가요?”

마치 베를리아의 수긍 한 마디면 나머지 이유는 모두 상관없다는 것처럼 담담한 낯이었다. 그녀는 교황이 될 마음이 있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조차 필요하지 않음을 리리카의 태도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교황을 바꿔야겠어요, 리리카.”

“그래요.”

그녀의 말 한마디에 리리카는 참으로 쉽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베를리아는 리리카의 시선을 피했다.

교황이 된다면 리리카는 안전해질 수 있었다. 더 이상 아무 위협도 받지 않을 것이고 권세 또한 누리게 된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전적으로 리리카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면면히 외면해 왔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의 사랑을 이용했었다. 지금 그녀가 하는 행동이 황태자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녀는 명확히 판단했다. 지금의 이 죄책감도 결국 자신의 이기심에 불과했다. 가고자 하는 길을 멈출 것도 아니면서 알량하게도 마음만 불편해하고 있었으니까.

“베를리아 양.”

리리카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베를리아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저는 언젠가 반드시 교황이 되었을 겁니다.”

달래는 듯한 음성은 아니었다. 리리카는 마치 미래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했다.

그는 아마도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으리라.

“저는 교황이 될 겁니다. 그때가 지금일 뿐이죠.”

리리카가 선언했다. 베를리아의 고민을 끝내 주듯이.

***

“베를리아 님, 재스민이 돌아왔습니다.”

하인이 말을 전하는 순간 베를리아는 곧바로 알았다.

“누군가와 함께 왔나?”

“예, 성녀를 데리고 왔더군요.”

하인이 공손하게 답했다.

“알겠어. 응접실로 가지.”

재스민이 홀로 돌아왔더라면 그녀가 베를리아를 직접 찾아왔을 터였다. 재스민이 누군가를 지키고 있지 않았더라면 굳이 다른 하인을 시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재스민을 보냈던 것은 서로가 만날 적당한 장소와 시간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별도의 언질 없이 이렇게 바로 리들턴의 저택으로 달려온 것을 보면 성녀도 꽤 급했던 모양이었다.

‘이리로 즉시 오는 게 현명한 선택지는 아닌데.’

베를리아는 성녀와 몰래 만나려고 했었다. 단번에 이런 식으로 달려오게 해서 안젤라가 리들턴의 저택에 왔다는 사실을 황태자가 알 법한 위험을 지게 할 생각은 구태여 없었으니까.

그녀가 소설 속에서 보고 판단했던 것과 달리 안젤라는 강단 있고 그다지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이렇듯 이성을 차리지 못하고 앞뒤 구분 없이 달려온 것은 성녀가 그만큼 카를로스를 사랑한다는 증거이리라.

사랑이 하필 그런 것이었다. 사람을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찰나에는 달콤하나 흩어지면 무의미한 독약.

“리들턴 백작님.”

베를리아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안젤라가 벌떡 일어났다. 성녀는 어느 때보다 초조해 보였다. 항상 우아한 모습으로 예의를 차리던 것과는 다르게.

베를리아는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향했다. 그녀의 걸음걸음마다 성녀의 어쩔 줄 모르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베를리아가 자리에 앉자 재스민이 그녀와 성녀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은 후 응접실에서 나갔다.

“이렇게 조급하게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에요.”

“그게….”

성녀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보아하니 할 말은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재스민에게 같이 오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제가 혹시라도 성녀님께서 교황이 위중한 상태라는 사실을 숨겼다고 황태자에게 발설할까 봐 그게 걱정되어서 달려오신 건가요?”

안젤라의 어깨가 움찔했다. 베를리아의 말은 그만큼이나 노골적이었다. 성녀의 등이 긴장으로 인해 빳빳하게 세워졌다. 안젤라는 끼익 소리가 날 만큼 굳은 동작으로 베를리아쪽으로 목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성녀의 시선이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맞아요.”

몇 번을 의미 없이 입술을 달싹인 끝에 안젤라가 겨우 말을 꺼냈다. 그런 성녀와는 대조되는 모습으로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린 베를리아가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먼저 카를로스한테 그 사실을 언급할 일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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