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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61)화 (61/148)

61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5)


 

네이먼은 평민이었지만 빠르게 출세한 편이었다.

신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며 살아가는 신관들이라고는 하지만 신전의 모두가 알았다. 신관 또한 다른 자들과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 머물 뿐이라는 것을.

네이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부족한 배경을 매울 만큼 신성력에 재능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른 나이에 말단 평신관이 아닌 고위 신관이 되었다. 그리고 네이먼은 앞으로도 신관으로서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고 싶었다.

단언컨대 굳이 베를리아의 눈 밖에 나도 상관없다는 무모한 마음으로 병자들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이먼은 누구와도 척을 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무리에서 눈에 띄지 않고 싶었다. 네이먼에게 다른 신관들과 어울려 같은 행동을 한 것은 보호색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까 네이먼은 단순히 운이 없었던 셈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왜, 하필, 그날, 베를리아가 그렇게 나온 건지 원망했다.

‘신전은 날 도와주지 않을 거야.’

신전은 네이먼을 보호하기 위하여 거액의 기부자가 내보인 뜻을 거스르지 않을 터였다. 그게 네이먼이 중앙 신전이 아니라 중앙 귀족회의 귀족에게 바로 접촉한 이유였다. 그의 판단은 일부분 정확했다. 네이먼과 거래한 백작은 중앙 신전을 통한 고발이 정식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백작은 중앙 귀족회에 속한 귀족이었으니 중앙 신전에도 그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네이먼의 판단은 일부분 잘못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동아줄로 그 백작을 고르지 말았어야 했다. 네이먼의 그릇된 판단은 고발이 완전히 실패하면서 끝이 났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베를리아가 네이먼을 내려다봤다. 계획이 실패하자마자 그녀에게로 달려온 것을 보니 아주 아둔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기와 적개심으로 계속해서 베를리아를 공격했더라면 정말로 처참한 꼴을 맞이했을 테니까.

“내가 네게 내릴 벌만 있는 것 같은데.”

그녀가 무릎 꿇은 네이먼의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베를리아의 뒤쪽으로 해가 기울며 그녀의 그림자도 길게 늘어졌다. 교묘하게도 베를리아의 그림자가 네이먼을 삼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이먼이 여기서 공격을 멈춘 것은 멈춘 거고 자신에게 고발장을 보냈던 것에 대하여 그냥 넘어가 줄 자비 따위 베를리아에게는 없었다. 아마 저자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패를 알자마자 곧바로 이리로 달려왔으리라.

“제, 제 말을 들어 보시고…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으시다면 기꺼이 내리시는 벌을 받겠습니다!”

그녀가 눈매를 가늘게 늘어트린 채로 네이먼을 쳐다봤다. 기꺼이 받지 않으면 또 어찌할 텐가. 괜히 그런 트집을 잡아 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렇지만 베를리아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절대적인 약자를 상대로 애먼 시간을 낭비하며 굳이 그리 구는 것도 멋없는 짓이었다.

“그래, 그러면 말해 보든가.”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네가 내게 가져온 것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에 따라….”

물론 저 겁 많은 신관이 안심할 수 있도록 말을 덧붙였다. 그녀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원래 자리로의 복귀뿐만 아니라 더한 것을 줄지도 모르니까. 나는 상도 벌도 후한 사람이거든.”

그 말을 듣자, 겁먹은 와중에도 네이먼의 시선에 욕망이 맴돌기 시작했다. 베를리아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욕망에 솔직한 인간은 꿍꿍이를 뒤로 숨기는 인간보다 훨씬 다루기 쉽고 뒤탈도 없으니까.

“…약속…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즉시 입을 열 것 같았던 네이먼은 의외로 잠시 주저한 후에야 조심히 말을 꺼냈다. 그를 비롯한 많은 이가 아는 베를리아는 잔혹한 사람이었다. 의심할 만도 했다.

“내가 약속을 안 한다면 네 주제에 어쩔 건데.”

그러나 그런 낌새를 대놓고 보이면 당한 사람은 당연히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다. 삽시간에 말 한마디로 살벌해진 분위기에 네이먼의 어깨가 들썩였다.

“죄, 죄송합….”

“좋아, 약속해 주지. 네가 가져온 것이 내게 도움이 된다면 최소한 이 이상으로 너에게 보복을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바로 사죄를 하는 것을 보니 그녀의 경고를 알아먹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딱 경고 정도만 하려 했던지라 베를리아 또한 그 이상의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공증에 사용하는 마도구를 꺼내든 그녀가 그것에 대고 네이먼이 원하던 약속을 내뱉었다.

한순간에 빠르게 이루어진 일에 네이먼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반쯤 넋을 놓은 그가 웅얼거렸다.

“교황 성하께서 위태위태하십니다.”

베를리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신관의 말은 상당히 추상적이었으니까. 그녀의 눈에 별다른 이채가 돌지 않자 네이먼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현재 교황 성하께서는 혼수상태에 빠져 계십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마치 자신이 말하는 내용이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가를 베를리아에게 피력하는 것처럼.

“…사실인가?”

그녀의 상체가 홱 네이먼의 쪽으로 쏠렸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실로 이것은 중요한 정보였다.

“예, 현재 신관들이 달라붙어 그 몸에 신성력을 불어넣고는 있지만….”

네이먼의 말끝이 늘어졌다. 그 꼬리에 따라붙을 내용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교황은 현재 그토록 신성력을 퍼부어도 깨어나지 못하는, 즉 곧 죽을 상태라는 말이리라. 그토록 위대한 신성력도 시체를 살려낼 수는 없으니까.

“언제부터 그랬지?”

“황태자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되셨습니다.”

“하, 하하…! 성녀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

베를리아는 기가 막혀 웃음을 터트렸다. 황태자가 즉위를 한 지도 시간이 상당히 흘렀다. 그 사이에 진짜 베를리아가 여전히 카를로스에게 대항하는 귀족들을 쳐내고, 또 끝내 황태자의 손에 죽을 뻔한 모든 일이 일어날 만큼.

‘하긴 그런 정신없던 틈이 아니라면 이런 대단한 사실을 지금까지 모르지는 않았겠지.’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으니 진짜 베를리아도 신경 쓰지 못했다. 빙의 후에 판을 엎겠다고 바빴던 터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고.

“…그게, …그렇습니다.”

네이먼이 망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베를리아의 재촉 전에 먼저 사실을 털어놓았다. 조금 전 그녀가 한 경고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탓이다.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은? 신전 외부에 알려진 바가 있나?”

“신전에서도 교황 성하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극소수의 신관들이 달라붙어 성하의 숨이 붙어 있게 할 만큼 상태가 중하신 탓에 귀족들은 물론이고 황궁에조차 침묵 중이죠.”

“그런데 네가 아는 이유는?”

“배경도, 귀족들과의 친분도 없는 제가 이 나이에 고위 신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제가 가진 신성력 덕이죠. 교황 성하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된 것도 제가 그분의 생을 이어가게 만드는 신관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베를리아의 말이 조금 느리게 흘러나왔다. 그녀가 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렇지 않으면 폭소라도 대단히 크게 터트릴 것 같았으니까.

‘카를로스, 네 불행이 이토록 기분 좋은 걸 보니… 내가, 악녀가 맞긴 맞는 모양이야.’

네이먼의 말대로라면 카를로스는 교황의 상태에 관해 모른다. 두 손으로 입술을 가려도 찢어질 듯이 올라간 입꼬리가 숨겨질까 걱정이 들었다.

황태자가 베를리아에게 그딴 태도를 취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던가. 바로 베를리아가 네멘 리들턴의 명에 의해 카를로스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부터였다.

그녀는 카를로스를 이해할 여지 따위 제 안에 단 일말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카를로스를 잘 알았다. 황태자는 어린 날부터 수많은 위협과 무시에 시달려와서인지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배신에 대해서는 치를 떨었고 실수 한 번에 목숨이 왔다 갔다 했던 까닭인지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했다.

그런데 안젤라가 카를로스에게 진실을 숨긴 것이다.

‘원작에서는… 원작에서는 어떻게 서술됐더라?’

소설을 통째로 외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베를리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네이먼의 말대로 그가 전한 사실은 그녀에게 대단히 유용했다. 그러니까 베를리아는 이 쓸모 있는 패를 어떻게 써야 할지, 쓰기에 가장 적절할 때가 언제인지 고심해야만 했다.

“좋아, 나는 지금부터 네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거야.”

그녀가 자신을 점령할 듯한 웃음을 애써 삼킨 뒤 네이먼에게 말했다. 대단히 반가운 사실이었으나 이는 네이먼의 말이 거짓이 아닐 때만 유지될 기분이었다.

“그동안 너는 내가 정한 곳에서 머물도록 해.”

즉 그때까지 감금과 감시를 당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만약 이 사실이 진실이라면. 나는 네게 추후… 추기경의 자리를 약속하지.”

그러나 네이먼은 베를리아의 말에 어떤 토도 달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무엇보다도 네이먼에게 간절했을 제안을 꺼내 왔으니까.

네이먼은 자신이 현재의 지위 이상은 올라가지 못하리라 짐작했다. 다 죽어가는 교황의 숨을 붙여 놓을 신성력을 지니고서도 그게 그의 한계였다. 배경도 없고 인맥도 없는 신관이란 대개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대신관의 자리조차도 네이먼에게는 감지덕지할 위치였다. 그런데 추기경이라니! 교황의 자리는 인력으로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다수 신관이 최대로 올라갈 수 있는 직위는 추기경이었다. 그야말로 네이먼의 꿈이 아니던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리들턴 백작님…!”

네이먼이 굽신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지금까지의 핍박과 잠깐의 감금 따위 추기경의 자리에는 당연히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이제 쓸개까지도 베를리아에게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네이먼을 내보내고 그녀가 메리쉬와 재스민을 불러들였다.

“멜, 재스민. 너희가 다녀와 줘야 할 곳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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